[集評] ○ 長信秋詞 漢班婕妤大幸 其後趙飛燕姊弟有寵 婕妤失寵
奉帚平明金殿開 按婕妤賦云 奉供養于東宮兮 託長信之末流
且將團扇共徘徊 婕妤團扇歌云 常恐秋節至 涼飇奪炎熱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 趙飛燕居昭陽宮 詩意謂已與君隔 不及寒鴉猶得承昭陽日影 -宋 周弼編‧元 釋圓至 注,《三體唐詩》卷1
○ 疊山云 此篇怨而不怒 有風人之義 -明 高棅,《唐詩品彙》卷47 七言絶句2
不云錦帳寒恩 而第曰昭陽日影 此長信宮中人語 -明 陸時雍,《唐詩鏡》卷12 盛唐 第4
○ 帚平明金殿開 且將團扇暫徘徊 鍾云 團扇 用且將字暫字 皆從秋字生來
玉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 鍾云 此二句 與簾外春寒朦朧樹色 同一法 皆不說向自家身上
寒鴉日影 尤覺悲怨之甚 -明 鍾惺,《唐詩歸》卷11 盛唐6
○ 明二字中便含日影 秋字起團扇 寒鴉關合平明 寒字仍有秋意
優柔婉麗 含蘊無窮 使人一唱而三歎 -淸 沈德潛,《唐詩別裁集》
此詩咏嬪妃之失寵者 故以長信命題 本漢樂府宮詞之一也
不得承恩意 直說便無味 借寒鴉日影爲喩 命意旣新 措詞更曲
王阮亭以爲皆爲太眞而作 不獨太白淸平調 行樂詞爲然 盖當時詩人之言多如此
愚以爲太白之不可及在直奏於明皇之前 少伯不過自作樂府而已 未可同日語也 -淸 李鍈,《詩法易簡録》卷14 七言絶句
猶帶昭陽日影來 羨寒鴉羨得妙 沅湘日夜東流去 不爲愁人住少時 怨沅湘怨得妙
○ 唐王少伯 玉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句 調乎夫王詩所以妙者
在玉顔寒鴉 一人一物 初無交涉 乃借鴉之得入昭陽 雖寒 猶帶日光而飛以反形
人則色未衰 已禁長信深宮 不復得見昭陽天日之苦日者
君象日影比天顔 宮人不得見君 故自傷不如寒鴉猶得望君顔色也
神味不隨詞意俱盡 十四字中兼有賦比興三義 所以入妙 非但以風調見長也 -淸 朱庭珍,《筱園詩話》卷1
次章言語無聊 託興深遠 眞風人也 -淸 宋顧樂,《唐人萬首絶句選評》
○ 詞凡三首 其第一首云 薰籠玉枕無顔色 臥聽南宮淸漏長 第二首云 火照西宮知夜飮 分明複道奉恩時
首二句言 所執者灑掃奉帚之役 所共者秋風將捐之扇 其深宮摒棄可知
後二句言 空負傾城玉貌 正如古詩所謂 時俗薄朱顔 誰爲發皓齒
以多情之人 而及無情之物 設想愈癡 其心愈悲矣 -現代 兪陛雲,《詩境淺說》
以見恩情中絶之人 卽寒鴉亦不如也 -現代 劉永濟,《唐人絶句精華》
[集評] ○ 長信秋詞: 漢나라 班婕妤는 황제의 총애를 입었는데 후에 趙飛燕 자매가 총애를 입자, 반첩여는 총애를 잃었다.
조비연이 그를 모함하자, 반첩여는 두려워하여 장신궁에서 태후를 봉양하기를 구하였다.
○ 奉帚平明金殿開: 반첩여가 지은 賦에 “동궁에서 받들어 봉양함이여, 장신궁의 말류에 의탁하였네.
휘장 안에 물 뿌리고 쓸어냄이여, 영원토록 죽을 때까지 하리라.[奉供養于東宮兮 託長信之末流 共洒掃于幃幄兮 永終死以爲期]”라고 하였다.
○ 且將團扇共徘徊: 반첩여의 〈團扇歌〉(〈怨歌行〉)에 “늘 두려운 것은 가을철 이르러, 서늘한 바람 더위를 빼앗아 가면 상자 안에 버려져, 恩情이 중도에 끊기는 것이라네.[常恐秋節至 涼飇奪炎熱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라고 하였다.
○ 玉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 趙飛燕이 昭陽宮에 거처하였는데, 詩意는 이미 황제와의 거리가 멀어져 소양궁의 햇빛을 받는 갈까마귀만도 못한 것을 말한다.
○ 謝疊山(谢枋得)은 “이 시는 원망하면서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에 시인의 뜻이 있다.”고 하였다.
비단 휘장 속에서 은혜가 식은 것을 말하지 않고, 다만 昭陽宮의 햇빛을 말하였으니, 이는 장신궁에 있던 사람의 말이다.
○ ‘奉帚平明金殿開 且將團扇暫徘徊’에 대해 종성은 “‘團扇’은 ‘且將’자와 ‘暫’자를 사용하였으니, 모두 ‘秋’자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하였다.
‘玉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에 대해 종성은 “이 두 구는 ‘簾外春寒賜錦袍’(〈春宮曲〉의 4구) ‘朦朧樹色隱昭陽’(〈西宮春怨〉의 4구)과 동일한 법도이니,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簾外春寒賜錦袍’ 구는 氣象이 넉넉하고, 이 구와 ‘朦朧樹色隱昭陽’ 구는 그 마음이 은밀하면서도 섬세하다.
‘寒鴉’와 ‘日影’에서 더욱 깊은 悲怨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 ‘玉顔’과 ‘寒鴉’는 함께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을 묶어 촉발되는 정서는 슬픔이니, 정을 부친 것이 끝이 없다.
○ ‘平明’ 두 자 안에는 ‘日影’이 내포되어 있고, ‘秋’자는 ‘團扇’을 상기시키는데, ‘寒鴉’는 ‘平明’과 조응하고, ‘寒’자는 곧 ‘秋’의 뜻이 있다.
○ 昭陽宮은 趙昭儀(趙飛燕)가 거처하던 곳이다.
궁이 동쪽에 있어, 갈까마귀가 동쪽의 해를 지고 오므로 자신이 그만 못하다고 여긴 것이다.
온유하고 완미하면서 함축된 것이 무궁하니, 읽는 이로 하여금 一唱三歎하게 한다.
○ 《漢書》를 보니, 班婕妤는 총애를 잃자 스스로 太后의 長信宮에서 공양하기를 구하였다.
이 시는 총애를 잃은 妃嬪을 노래하였기 때문에 ‘長信’을 제목으로 삼았는데 본래 漢 樂府의 宮詞 중 하나이다.
은혜를 입을 수 없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였다면 맛이 없었을 터인데, 갈까마귀와 햇빛을 빌려 비유하여 뜻도 신선하고 언어도 곡진하다.
少伯(王昌齡)의 이 시와 ‘西宮夜靜百花香’(〈西宮春怨〉) 같은 작품들은 모두 趙飛燕의 昭陽宮을 사용하였다.
王阮亭(王士禎)은 “모두 太眞(양귀비)을 위해 지은 작품으로, 太白(이백)의 〈淸平調〉와 〈宮中行樂詞八首〉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당시 시인들의 언어는 대부분 이와 같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태백은 明皇(玄宗)의 앞에서 직접 아뢸 수 없었고 少伯(王昌齡)은 악부를 지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함께 언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옥 같은 내 얼굴 갈까마귀에도 못 미치누나.
그래도 까마귀는 昭陽殿의 햇빛을 받는데.[玉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는 갈까마귀를 부러워하니 그 부러워함에 묘미가 있고, ‘沅水와 湘水는 밤낮 동으로 흘러가니, 시름겨운 사람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네.[沅湘日夜東流去 不爲愁人住少時]’(戴叔倫,〈湘南卽事〉)는 沅水와 湘水를 원망하니 그 원망함에 묘미가 있다.
○ 盛唐 王少伯(王昌齡)의 ‘玉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 구는 저 왕창령 시가 묘미를 갖춘 이유와 부합한다.
玉顔과 갈까마귀는 사람과 동물로 처음에는 관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까마귀가 소양궁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빌려와 비록 보잘것없더라도 햇빛을 받고 날아가니 형세가 뒤바뀌었다.
사람은 미색이 아직 쇠하지 않았지만, 이미 長信宮 깊은 곳에 갇혀 다시는 소양궁의 해를 볼 수 없는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임금은 해와 같으므로 天顔에 비유하고, 궁인이 임금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래도 임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갈까마귀보다 못하다고 스스로를 슬퍼한 것이다.
뜻을 쓴 것이 온전히 말 밖에 있어,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사물을 마주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조어가 精微하고 완곡하여 모두 드러내지 않고 또 여유로우면서도 자득한 필법을 써서 표현하였다.
神味는 시의 뜻을 따르지 않고도 모두 갖추어져 있고, 14자 가운데 賦‧比‧興의 세 가지 뜻이 있어 이 때문에 妙한 경지에 들었으니, 품격만으로 장처를 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다.
○ 첫 구는 가을 분위기만을 그려내었는데도 끝까지 읽기 힘들다.
다음 구는 말이 무료하지만 흥을 부친 것이 심원하니, 참된 시인이다.
○ 〈秋词〉는 모두 세 수인데, 그 첫 수는 ‘薰籠과 玉枕도 빛을 잃으니, 남궁의 물시계 소리를 누워서 듣는다네.[熏籠玉枕無顔色 臥聽南宮淸漏長]’이고, 둘째 수는 ‘서궁의 불빛에 夜宴이 있음을 알겠으니, 분명 複道에서 은혜를 받는 때라.[火照西宮知夜飮 分明複道奉恩時]’이다.
모두 뜻은 감춘 채 말은 다하였지만, 이 시의 처완함만은 못하다.
앞의 두 구는 맡은 바가 비를 들고 청소하는 일이고, 함께 가진 것은 가을바람에 버려질 부채임을 말하였으니, 깊은 궁궐에 유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뒤의 두 구는 城을 기울일 만한 옥 같은 용모를 부질없이 저버렸음을 말하였으니, 고시에 이른바 “시속에서 미인을 박대하니, 누구를 위하여 흰 이를 보이겠는가.[時俗薄朱顔 誰爲發皓齒]”(曹植,〈雜詩〉 5수 중 제5수)라고 한 것과 같다.
해 저물녘 날아가는 까마귀조차도 소양궁의 햇빛을 받고서 그 남은 빛으로 깃털을 빛나게 하건만 그만도 못한 것이다.
공중의 갈까마귀가 은총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정한 사람이 무정한 사물에까지 마음이 미치니, 생각이 어리석을수록 마음은 더욱 슬프다.
○ 玉顔不及寒鴉色 猶帶昭陽日影來’ 두 구에서, 갈까마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들조차도 소양궁에 날아 들어가 햇빛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恩情이 끊긴 사람을 드러내었으니, 곧 갈까마귀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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