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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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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維(701~759)
성당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서화와 음악에도 모두 조예가 깊어 예술계의 거장으로 추앙받는다. 山西省 祁縣 사람으로 字는 摩詰이다. 開元 9년(721)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한 차례의 좌천을 겪은 뒤, 開元 22년 張九齡이 집정한 뒤, 右拾遺로 발탁되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뒤 장구령이 퇴각하자 정치적 시련을 겪다가 李林甫가 집정한 뒤, 終南山의 輞川에 별장을 마련하고 은거와 관직 생활을 오고 갔다. 天寶 14년(755)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군에게 투옥되었다가 관직을 부여받기도 하였는데, 평정 후 그로 인하여 잠시 좌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에 中書舍人, 給事中 등을 거쳐 尙書右丞까지 관직이 올라 ‘王右丞’이라 칭해졌으며, 권문세가를 비롯하여 寧王, 薛王 등으로부터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각종 시체에 뛰어났지만 특히 오언율시와 절구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수전원의 한가하고 탈속한 정취를 시에 담으며, 隱居와 불교의 섭리를 주요한 주제로 다루어, 詩聖 杜甫, 詩仙 李白과 대비하여 詩佛이라 칭해졌다. 특히 자신이 개척한 남종산수화를 시로 옮겨놓은 듯한 시풍을 창도하여 蘇軾은 “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세계는 陶淵明, 謝靈運의 시풍을 창조적으로 계승, 함축미와 여운미가 생동하는 시풍을 開導하여, 맹호연, 위응물, 유종원 등과 함께 산수전원시인으로 칭해졌다. 후대에 이들의 시풍을 따르는 유파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예술계의 큰 흐름을 이루었다. 대개 두보, 한유로 이어지는 유파와는 대별되는, 순수예술성을 추구하는 계보를 형성하였는데, 明代 董其昌은 남종산수화의 시조로 추숭하였고, 淸代 王士禎은 왕유의 시풍을 神韻說의 종지로 삼았다.
《王右丞集》에 400수의 시가 전한다. 《唐詩三百首》에 수록된 작품으로 〈送別〉, 〈送綦毋潛落第還鄕〉, 〈靑溪〉, 〈渭川田家〉, 〈西施詠〉, 〈洛陽女兒行〉, 〈老將行〉, 〈桃源行〉, 〈輞川閑居贈裴秀才迪〉, 〈山居秋暝〉, 〈歸嵩山作〉, 〈終南山〉, 〈酬張少府〉, 〈過香積寺〉, 〈送梓州李使君〉, 〈漢江臨眺〉, 〈終南別業〉, 〈和賈舍人早朝大明宮之作〉, 〈奉和聖制從蓬萊向興慶閣道中留春雨中春望之作應制〉, 〈積雨輞川庄作〉, 〈酬郭給事〉, 〈鹿柴〉, 〈竹里館〉, 〈送別〉, 〈相思〉, 〈雜詩〉, 〈九月九日憶山東兄弟〉, 〈渭城曲〉, 〈秋夜曲〉 등이 있다.



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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