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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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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愈(768~824)
자는 退之이며 시호는 文公으로 懷州 修武縣 사람이다. 貞元 8년(792) 진사에 급제,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정원 19년(803) 監察御使가 되었을 때, 首都의 장관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陽山縣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國子監에서 근무하였으며, 元和 12년(817) 吳元濟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刑部侍郞이 되었으나, 원화 19년(819) 憲宗이 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목종이 즉위하자 國子祭酒로 등용되어 吏部侍郞까지 올랐다. 산문에 있어서 그는 친구 柳宗元 등과 함께 종래의 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식의 古文을 唱導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모범이 되었다. 시에 있어서는 지적인 흥미를 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를 존중하고 도교‧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로 평가되었다.
시문집으로 《昌黎先生集》, 《外集》, 《遺文》 등이 있다. 《당시삼백수》에 수록된 작품으로 〈山石〉 〈八月十五夜贈張功曹〉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石鼓歌〉가 있다.

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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