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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1)

당시삼백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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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行路難〉其三
〈가는 길 험난해라〉세 수 중 세 번째 시
李白
이백
有耳莫洗
귀 있다고 潁川의 물로 귀를 씻지 말 것이요
有口莫食
입 있다고 首陽山의 고사리 캐 먹지 말 것이라
貴無名
빛을 숨기고 세상과 뒤섞여 無名을 귀하게 여길지니
何用孤高比雲月
어찌하여 孤高함을 雲月에 비기는가
吾觀自古賢達人
내 자고로 현달한 사람들을 보았더니
功成不退皆
공 이룬 후 물러나지 않은 자 모두 몸을 망쳤다네
伍子胥는 이미 吳江에 버려졌고
屈原은 끝내 湘水의 물속으로 몸을 던졌지
陸機의 뛰어난 재주로도 어찌 스스로를 지키겠는가
李斯의 휴식은 너무나도 늦었으니
華亭鶴唳詎可聞
華亭의 학 울음소리 어찌 들을 수 있었으며
上蔡蒼鷹何足道
上蔡의 푸른 매 어찌 족히 말하리오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했나,
吳中稱達生
吳中의 張翰이 달관한 삶이라 일컬어짐을
秋風忽憶江東行
가을바람에 문득 생각나 江東으로 떠났네
且樂生前一杯酒
다만 생전의 한 잔 술 즐길 뿐이지
何須身後千載名
어찌 꼭 죽은 다음에 천년의 이름 남기리오
[通釋] 이 세상에서는 고결함을 지나치게 드러내서는 안 되니, 귀가 있어도 許由처럼 潁川의 물에 씻지 말 것이요, 입이 있어도 伯夷 叔齊처럼 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 먹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의 빛을 감추고 재주와 지혜를 간직한 채 세상과 뒤섞여 無名의 삶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니, 어찌 자신의 孤高함을 드러내어 저 하늘의 구름과 달에 스스로를 견줄 필요가 있겠는가.
예로부터 현명하고 통달한 사람들을 내가 보았더니, 功名을 이룬 후 물러나지 않아 결국은 몸을 망치고 죽음에 이르렀다. 吳子胥 같은 이는 吳江에 그 시신이 버려졌고 屈原 역시 湘水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陸機는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지만 끝내 자신을 지키지 못하였고, 李斯 또한 일찍 물러나지 않은 탓에 斬刑을 당하였다. 그러니 陸機가 어찌 華亭의 학 울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겠으며, 李斯가 上蔡에서 매를 가지고 토끼사냥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대들은 들어보지 못했는가, 晉나라 蘇州의 張翰 이야기를. 그는 원래부터 성품이 曠達하여 齊나라 왕 冏이 그에게 벼슬을 주었는데도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문득 고향의 고수나물, 농어회, 순채국이 생각나 즉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말하였다. “우선 생전에 한 잔 술 마시며 즐거움 누릴 뿐이지, 어찌 하필 죽은 뒤에 천년의 명성 남기려 하느냐”고.
[解題] 이전의 憂愁나 고민은 더욱 깊어져 그는 “공을 이룬 뒤 물러나지 않은 이들은 모두 몸을 망쳤다.”고 하면서 伍子胥, 屈原, 陸機, 李斯 등 역사 속의 인물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許由나 伯夷 叔齊처럼 지나치게 孤高하여 천년 후에도 그 이름이 남기를 바라지 않고 있다. 그는 張翰처럼 悠悠自適하면서 지금의 삶 속에서 한 잔 술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를 희망하지만 거기에는 달관‧체념의 뜻과 아울러 悲歎의 기운이 담겨 있다.
[集評] ○ 朱子(熹)嘗謂 東坡寫此詩 中間節去八句 則以前四句與後四句 合爲一首 盖是之也
[集評] 朱子(朱熹)가 일찍이 말하기를, “東坡(蘇軾)가 이 시를 書寫하면서 중간 8구를 잘라버리고 前 4구와 後 4구를 합해서 한 수로 만들었는데 대개 옳게 본 것이다.”라 했다.
以今觀之 似爲簡當
지금 살펴보니 줄인 것이 마땅한 듯하다.
而意義又相續 中間八句 誠爲堆疊 有犯詩家點鬼簿之病
또 말뜻이 서로 이어지니 중간 8구는 진실로 높이 쌓인 흙무더기여서 詩家에서 말하는 을 범했다.
宜節而去之也 - 明 朱諫, 《李詩辨疑》
마땅히 잘라버려야 한다.
역주
역주1 潁川水 : ‘潁川’은 지금의 河南省에 있다. 堯 임금 때의 高士인 許由가 出仕를 원치 않아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들은 후 이곳에서 귀를 씻었다고 전해진다. 〈高士傳〉에, “허유가 中岳, 潁水의 북쪽 箕山의 아래에서 밭을 갈았다. 堯 임금이 그를 불러 九州의 長으로 삼으려 하니, 그는 그 말을 듣지 않고자 하여 潁水의 물가에서 귀를 씻었다.[許由耕於中岳 潁水之陽 箕山之下 堯召爲九州長 由不欲聞之 洗耳於潁水之濱]”고 하였다.
역주2 首陽蕨 : 首陽山은 지금의 山西省 永濟縣 남쪽이라고도 하고 혹은 河南省 偃師縣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伯夷 叔齊가 굶주리며 은거하던 곳인데, 그들은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首陽山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史記》 〈伯夷列傳〉에,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가 周나라를 종주로 삼았다. 그러나 백이 숙제만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의리를 지키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서 먹었다.[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고 하였다.
역주3 含光混世 : ‘含光’은 재주와 지혜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간직하고 있음을 말한다. 含光混世는 《老子》의, “지혜의 빛을 부드럽게 하고 속세의 티끌과 함께 한다.[和其光 同其塵]”와 그 뜻이 같다.
역주4 殞身 : 몸을 버려 죽는 것을 말한다.
역주5 子胥旣棄吳江上 : 伍子胥가 충직하게 諫言하였지만 吳王 夫差가 듣지 않았고, 도리어 오나라 왕에게 賜死당하여 그 시신이 吳江에 던져졌다.
역주6 屈原終投湘水濱 : 屈原은 楚나라 大夫로 이름은 平, 자는 靈均이다. 懷王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겼으나 훗날 靳尙‧子蘭 같은 무리에게 참소와 비방을 당해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 이에 굴원은 〈離騷〉 〈漁父〉 같은 글을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懷王의 아들인 頃襄王 때 굴원은 또다시 멀리 내침을 당하였고, 자신의 忠君憂國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등용되지 못하자 5월 5일에 汨羅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史記》 〈屈賈列傳〉에 그의 事蹟이 자세히 보인다.
역주7 陸機雄才豈自保 : 陸機는 吳郡(지금의 江蘇省 吳縣) 사람이다. 그는 吳나라 大司馬인 陸抗의 아들이었는데 오나라가 멸망한 후 晉나라로 들어가 洛陽에 이르렀고 張華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晉나라 惠帝 太安 2년(303), 成都王 司馬潁 등이 長沙王 司馬乂를 치는데 육기를 後將軍 河北大都督으로 삼았다. 육기는 王粹‧牽秀 등의 여러 군대를 이끌고 鹿苑에서 싸웠는데 그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宦官 孟玖가 육기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참소하니, 사마영은 화가 나서 견수로 하여금 육기를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육기는 사형에 임하여 태연자약한 얼굴로 “華亭의 학이 우는 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으랴?”고 탄식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 화정은 지금의 江蘇省 松江縣 서쪽의 平原村으로 육기 형제가 일찍이 함께 놀던 곳이다. 《晉書》 〈陸機傳〉에 이 일이 자세히 보인다.
역주8 李斯稅駕苦不早 : 李斯는 楚나라 上蔡(지금의 河南省 汝南縣 북쪽) 사람이다. 荀卿을 좇아 배우다가 공부를 끝마치자 서쪽으로 秦나라에 들어가 呂不韋의 舍人이 되었다. 훗날 秦나라 王에게 등용되었는데, 진나라 왕이 천하를 평정한 뒤에 李斯를 丞相으로 삼으니 법령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사의 장남인 由는 三川의 太守가 되었고 여러 아들들은 모두 秦나라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딸들은 모두 秦나라의 여러 公子들에게 시집갔다. 삼천의 태수인 李由가 휴가를 얻어 咸陽으로 돌아가니 百官의 長들이 모두 나와 祝壽하였다. 대문과 뜰에 있는 車騎를 千으로 헤아릴 정도였는데, 이때 이사는 깊이 탄식하면서 “나는 上蔡에서 태어난 평민일 뿐인데 지금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로서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자가 없고 부귀도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만물은 극에 이르면 쇠하는 법인데, 나는 언제 어디에서 말의 멍에를 풀고 휴식하게 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훗날 秦始皇이 병들어 죽자 이사는 趙高에게 誣告를 당하였는데, 이사의 父子가 도적들과 내통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사는 함양의 저자에서 허리가 잘려 죽는 형벌을 받았다. 형벌을 받기에 앞서 이사는 둘째 아들을 돌아보며, “내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누런 개를 끌고 매를 팔뚝에 얹고서 上蔡 동문 쪽으로 나가 토끼 사냥을 하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稅駕는 말의 멍에를 풀고 수레를 멈춘다는 뜻으로, 휴식함을 이른다. 《史記》 〈李斯列傳〉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9 張翰 : 字는 季鷹이고 吳나라 사람이다. 齊나라 왕 冏이 그를 불러서 大司馬東曹掾을 삼았다. 훗날 가을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 吳 땅의 고수나물, 순채국, 농어회가 생각나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冏이 싸움에서 패하자 사람들은 모두 장한이 기미를 미리 알아챈 것이라고 하였다. 장한은 마음 내키는 대로 유유자적 살면서 세상에서 이름을 구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나 죽은 뒤에 이름이 남도록 하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 한 잔 술을 마시겠다.[使我有身後名 不如卽時一杯酒]”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曠達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晉書》 〈文苑傳〉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10 鬼簿를……병통 : 鬼簿는 귀신의 명부로, 시를 지을 때 옛사람의 성명을 많이 인용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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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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