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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2)

당시삼백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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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 祭孔子而嘆之〉
〈鄒魯를 지나며 孔子에게 제사 드리고 탄식하다〉
唐 玄宗
당 현종
夫子何爲者
선생께서는 무슨 연유로
一代中
일생을 그리 바쁘게 보내셨는가
地猶氏邑
땅은 여전히 추씨의 고을인데
宅卽
집은 魯恭王의 궁궐이 되었구나
嗟身否
봉황을 탄식하고 신세가 막힘을 한탄하며
怨道窮
기린의 죽음을 슬퍼하고 도가 없어짐을 원망했네
今看
지금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 지내는 것 보니
當與夢時同
공자께서 꿈꾸던 때와 같구나
[通釋] 공자께서는 무슨 연유로 일생 동안 그리도 바삐 천하를 周遊하였던가. 지금 이곳은 여전히 추씨의 식읍이지만, 공자의 집은 당시 魯恭王이 허물어 자신의 궁실로 만들어버렸다. 봉황이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자신의 신세가 막힘을 탄식하였으며, 기린이 잡혀 죽은 것을 슬퍼하고 자신의 道가 더 이상 펼쳐지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였다. 지금 전당의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보니, 공자가 꿈꾸던 때와 같구나.
[解題] 이 시는 開元 13년(725) 당 현종이 泰山에서 封禪을 행하고 長安으로 돌아오던 도중 曲阜의 공자 고택에 행차하여 제사 지내면서 쓴 시이다. 공자가 일생 동안 불우하게 살며 곤액을 당했던 사실을 통해, 존경받던 聖人의 불행함을 반영하였는데, 여기에는 작자의 깊은 동정심뿐만이 아니라 공자에 대한 讚美와 襃揚이 드러나 있다.
開元 27년(789) 당 현종은 공자를 文宣王에 봉하고, 그 제자들의 ‘十哲’ 坐像을 만들어 孔廟에 배향한 후 孔儒를 존숭하였다고 한다.
[集評]○ 三四以下俱佳 - 元 方回, 《瀛奎律髓滙評》 卷28
[集評]○ 3‧4구 이하는 모두 훌륭하다.
○ 妙之不發議論 發議論便俗 穩妥而雅 中含嘆意 見盛唐杰作 - 明 唐汝詢, 《唐詩選脈會通評林》 卷29
○ 묘한 것은 議論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니, 의론을 드러냈다면 속되어졌을 것이다. 온당하고도 雅致가 있으며 그 가운데에 감탄의 뜻까지 내포하고 있으니 盛唐의 걸작임을 알 수 있다.
○ 孔子更何贊 只以喟嘆取神 最妙 - 淸 紀昀, 《瀛奎律髓滙評》 卷28
○ 공자를 여기서 어찌 더 찬탄할 수 있겠는가. 단지 아쉬워하고 탄식함으로써 精神을 취했으니, 가장 절묘하다.
○ 孔子之道從何處贊嘆 故只就不遇立言 此卽運意高處 - 淸 沈德潛, 《唐詩別裁集》 卷9
○ 공자의 도는 어디에서 찬탄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단지 不遇함을 가지고 立言하였으니 이것은 곧 用意處가 매우 고고한 것이다.
○ 只以唱嘆 取神最妙 - 淸, 紀昀
○ 단지 唱嘆의 수법으로만 精神을 취하였으니 가장 오묘하다.
역주
역주1 鄒魯 : 魯나라 鄒邑이라는 뜻이다. 魯는 春秋시대 國名이다. 여기서는 노나라의 도읍, 즉 지금의 山東省 曲阜縣을 지칭한다. 공자가 魯나라 昌平鄕 鄒邑 출생이므로 ‘鄒魯’라 하였다. 제목에 ‘鄒’가 빠져 있는 본도 있다.
역주2 棲棲 : 棲棲는 栖栖와 같다. 《論語》 〈憲問〉편에 “미생묘가 공자에게 말하기를 ‘丘는 어찌하여 이리도 연연해하는가. 말재주를 구사하려는 것이 아닌가?’라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내 감히 말재주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요, 고집불통을 미워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微生畝謂孔子曰 丘何爲是栖栖者歟 無乃爲佞乎 孔子曰 非敢爲佞也 疾固也]”라는 구절이 있다. 栖栖를 朱子는 依依로 해석하여 세상을 잊지 못하는 뜻으로 풀이하였으나, 일반적으로 遑遑과 같은 뜻으로 보아 정처 없이 사방을 떠돌아다님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역주3 : 鄒와 同字이며 고을 이름이니, 山東省 曲阜縣 동남쪽이다. 일찍이 공자의 아버지 叔梁紇이 추읍의 대부였는데, 공자가 여기서 출생하였다.
역주4 魯王宮 : 魯王은 漢 景帝의 다섯 번째 아들인 魯恭王이다. 궁실을 짓기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공자의 古宅을 허물고, 그 궁을 넓힌 적이 있다.
역주5 嘆鳳 : 《論語》 〈子罕〉편에 “봉황새가 오지 않고, 河水에서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이제 끝이다.[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라 하였다.
역주6 傷麟 : 《史記》 〈孔子世家〉에 의하면, 魯 哀公 14년에 노나라 사람이 麒麟을 잡았는데, 공자가 그것을 보고는 ‘기린이 나왔으나 죽었으니, 나의 道도 이제 다했다.’고 탄식하였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春秋》를 기록할 적에 기린을 잡은 데까지만 서술하고 그 이후는 기록하지 않았다.
역주7 兩楹奠 : 《禮記》 〈檀弓〉에 “선생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저번 밤에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대저 明王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천하의 누가 나를 받들 것인가. 나는 곧 죽을 것이다.’ 하시더니, 병으로 누우신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夫子曰 余疇昔之夜 夢坐奠于兩楹之間 夫明王不興 而天下其孰能宗余 余殆將死也 盖寢疾七日而歿]”라 하였다. 殷나라에는 사람이 죽으면 관을 두 기둥 사이에 놓는 제도가 있었다. 공자는 殷나라의 후예이기 때문에 이러한 꿈을 꾸고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나리라 여긴 것이다. 楹은 殿堂의 기둥이며, 兩楹은 殿堂의 중간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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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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