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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集說大全(2)

예기집설대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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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01 孔子少孤하사 不知其墓하사 殯於五父之衢어시늘 人之見之者皆以爲葬也라하더니 蓋殯也러라
問於郰曼父之母오사 然後得合葬於防하시니라
集說
≪集說≫ 不知其墓者 不知父墓所在也 殯於五父之衢者 殯母喪也
禮無殯於外者어늘 今乃在衢하니 先儒謂欲致人疑問하야 或有知者告之也
人見柩行於路하고 皆以爲葬이나
然以引觀之하니 殯引 飾棺以하고 葬引 飾棺以하니 此則殯引耳
按家語 라하니 是少孤也 然顔氏之死 夫子成立久矣
聖人 人倫之至 豈有終母之世 不尋求父葬之地하며 至母殯而猶不知父墓乎
且母死而殯於衢路 必無室廬而死於道路者不得已之爲耳 聖人 禮法之宗主어늘 而忍爲之乎
且如堯舜瞽瞍之事 世俗不勝異論하니 非孟子辭而闢之시면 後世謂何
此經 雜出諸子所記하니 其間 不可據以爲實者多矣
리오하시니 愚亦謂終身不知父墓 何以爲孔子乎
其不然 審矣 此非細故 不得不辨하노라


공자孔子께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그 묘소가 있는 곳를 알지 못하여 〈어머니의 시신을〉 오부五父의 거리에 (가매장)을 하자, 사람들 중에 이 광경을 본 자들은 모두 장사葬事를 지내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상여줄을 보니 빈소에서 발인하는 줄이었다.
추만보郰曼父의 어머니에게 물은 뒤에야 방산防山합장合葬할 수가 있었다.
集說
‘그 묘소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묘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한 것이다. ‘오부五父의 거리에 을 하였다’는 것은 어머니의 시신을 (가매장)한 것이다.
에 따르면 집 밖에 빈을 하는 경우가 없는데 지금 빈을 마침내 거리에서 하였으니, 이에 대해 선유先儒들이 “사람들이 의문을 갖도록 하여 혹 아는 자가 일러주기를 바란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상여가 길에 가는 것을 보고는 모두 장사葬事를 지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상여줄을 보니 초빈의 상여줄[殯引]은 상여뚜껑[輤]으로 을 장식하고, 장사葬事의 상여줄은 관 덮개와 운삽[유삽柳翣]으로 관을 장식하니, 여기의 상여줄은 초빈의 상여줄이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살펴보니 “공자孔子가 태어나 3살이 되었을 때 숙량흘叔梁紇이 죽었다.”고 했으니, 이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안씨顔氏가 죽었을 때는 공자가 성장하여 자립한 지 오래였다.
성인聖人인륜人倫의 극치이니, 어찌 어머니가 세상을 마치토록 아버지를 장사 지낸 묘지를 찾지 않아서 어머니를 빈함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묘소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어머니가 죽자 거리에 빈한 것은 반드시 집이 없어서 도로에서 객사客死한 사람이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니, 성인은 예법禮法종주宗主인데 차마 그런 짓을 하셨겠는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숙량흘이 안씨와 야합野合했다는 거짓말을 해서 “안씨가 〈아버지의 묘를〉 숨기고 공자에게 말해주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에서 이것을 인습하여 후세의 의혹을 더욱 불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고수瞽瞍의 일처럼 세속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이론異論이 생겨나게 하였으니,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여 물리치지 않으셨다면 후세에 뭐라고 하였겠는가.
(≪예기禮記≫)은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에서 뒤섞여 나왔으므로 그 사이에 근거하여 사실로 여길 수 없는 것이 많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옹저癰疽시인侍人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삼았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내 생각에도 그렇다. 종신終身토록 아버지의 를 몰랐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았음이 분명하니,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므로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역주
역주1 愼(인) : 저본의 小註에 ‘讀爲引’으로 되어 있으니, 靈柩를 끌어당기는 밧줄을 가리키는 ‘引’과 통용한다.
역주2 輤(천) : 喪輿의 덮개를 뜻한다.
역주3 柳翣(삽) : 柳는 喪輿의 윗면과 옆면을 가리는 휘장이다. 翣은 부채모양으로 된 기구로, 이것을 든 사람은 상여의 앞뒤에 서서 상여를 가린다. 후대에는 柳翣을 상여 위에 있는 棺을 장식하는 기구들을 범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역주4 孔子生三歲而叔梁紇死 : 尼丘山에서 祈를 통해 기도하여 孔子를 낳았기 때문에 이름은 丘이고 자는 仲尼이다. 孔子가 3세가 되었을 때 叔梁紇이 죽어서 防에 葬禮를 치렀다.[私禱尼丘之山以祈焉 生孔子 故名丘 字仲尼 孔子三歲而叔梁紇卒 葬於防](≪孔子家語≫ 〈本姓解〉)
역주5 馬遷爲野合之誣 謂顔氏諱而不告 : 叔梁紇이 顔氏의 여식과 野合하여 孔子를 낳았는데, 尼丘山에서 기도를 드리고 공자를 얻었다.……丘(공자)가 태어나자 숙량흘이 죽어서 防山에 장사 지냈는데, 防山은 魯나라 동쪽에 있었다. 이런 연유로 공자가 아버지의 墓가 있는 장소를 궁금해 했지만 어머니는 알려주기를 원치 않았다.[紇與顏氏女野合而生孔子……丘生而叔梁紇死 葬於防山 防山在魯東 由是孔子疑其父墓處 母諱之也](≪史記≫ 〈孔子世家〉)
역주6 鄭註……以滋後世之惑 : ≪禮記正義≫ 鄭玄 注에 “孔子의 아버지는 郰땅의 叔梁紇이니 顔氏의 여식인 徵在와 野合을 하여 공자를 낳았는데, 징재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공자에게〉 부친의 墓를 알려주지 않았다.[孔子之父郰叔梁紇 與顔氏之女徵在野合 而生孔子 徵在恥焉 不告]”라고 하였다.
역주7 孟子曰……何以爲孔子 : 내 들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를 관찰할 때에는 자기 집에 누구를 묵게 하는가를 가지고 관찰하고, 먼 지방에서 와서 벼슬하는 신하를 관찰할 때에는 누구의 집에 묵는가를 가지고 관찰한다 하였으니, 만일 공자께서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의원과 내시인 瘠環의 집에서 묵으셨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吾聞觀近臣 以其所爲主 觀遠臣 以其所主 若孔子主癰疽與侍人瘠環 何以爲孔子](≪孟子≫ 〈萬章 上〉)

예기집설대전(2)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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