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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3)

상서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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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정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이니 念終始 典于學하면 厥德修 罔覺하리이다
[傳]斅 敎也 敎然後知所困이니 是學之半이라 終始常念學하면 則其德之脩 無能自覺이라
[疏]‘惟斅’至‘罔覺’
○正義曰:敎人然後知困, 知困必將自强, 惟敎人乃是學之半, 言其功半於學也.
於學之法, 念終念始, 常在於學, 則其德之脩漸漸進益, 無能自覺其進. 言有所益, 不能自知也.


가르침의 효과가 배움의 효과의 반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배움에 힘쓸 것을 생각한다면 그 德이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닦여질 것입니다.
斅는 敎의 뜻이다. 남을 가르쳐본 연후에야 困苦함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자신이 직접 배운 효과의 절반이다. 시종일관 항상 배움에만 생각을 갖는다면 그 德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닦여진다는 것이다.
經의 [惟斅]에서 [罔覺]까지
○正義曰:남을 가르쳐본 연후에야 困苦함을 알게 되고, 곤고함을 알게 되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학문에〉 힘쓸 것이니, 남을 가르치는 효과가 바로 직접 배운 효과의 반이란 것은 곧 그 공효가 배움의 효과에 반이란 점을 말한 것이다.
학문의 법칙에 있어서 시종일관 생각하는 것을 항상 학문에 둔다면 그 德의 닦여짐이 점점 진취되어 그 진취된 점을 자신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니, 곧 날마다 더해지는 바가 있어도 스스로 알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惟斅……罔覺 : 임금의 학문은 어찌 단지 자신만을 닦을 뿐이겠는가. 政敎를 행하는 것도 배움의 반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배워 德을 밝히는 것이 배움의 반이고, 政敎를 통하여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 배움의 반이니, 당초에 스스로 배운 반과 나중에 백성을 가르친 반을 합해야 배움의 전체가 된다는 것이다.
역주2 惟斅學半 : 宋代 葛興仁이 “가르침을 받는 것도 ‘斅’라 하니, 가르침의 효과는 학문하는 과정에 있어서 반을 차지하니, 나머지 반은 모름지기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受敎亦曰斅 斅於爲學之道半之 半須自得]”라고 풀이하였는데, 蔡傳에서 “이 말이 지극히 新巧하나 단, 옛사람이 학문을 논함에 말이 모두 平正하고 的實하였으니, 이 章의 句數가 한둘이 아니거늘, 중간의 한 마디 말만 이처럼 巧險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釋敎의 기지와 권모술수로 잘못 聖賢의 학문을 논한 듯하다.[此說極爲新巧 但古人論學 語皆平正的實 此章句數非一 不應中間一語獨爾巧險 此蓋後世釋敎機權而誤以論聖賢之學也]”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朴世堂(≪思辨錄≫)은 “‘惟斅學半’은 응당 葛氏의 說이 본지를 터득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朱子와 蔡氏가 도리어 깊이 공격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말을 보면 葛氏의 뜻을 터득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 뜻을 터득하지 못하고서 문득 전인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닌가.……만일 이것을 가지고 齊家, 治國, 平天下하는 뜻을 삼는다면 그 說이 또 견강부회하여 新巧하게 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3 (曰)[日] : 저본에는 ‘曰’로 되어 있으나, “毛本에는 ‘曰’이 ‘日’로 되어 있으니, 옳다.”라고 한 阮元의 校勘記에 의거하여 ‘日’로 바로잡았다.

상서정의(3) 책은 2019.10.0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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