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成王卽政之初, 召公爲保, 周公爲師, 輔相成王爲左右大臣.
召公以周公嘗攝王之政, 今復在臣位, 其意不說. 周公陳己意以告召公, 史敍其事, 作君奭之篇也.
周官篇云 “立太師‧太傅‧太保, 玆惟三公.” 則此‘爲保’‧‘爲師’ 亦爲三公官也.
此實太師‧太保而不言‘太’者, 意在師法保安王身, 言其實爲左右爾, 不爲擧其官名, 故不言‘太’也.
經傳皆言武王之時, 太公爲太師, 此言“周公爲師”, 蓋太公薨, 命周公代之.
於時太傅, 蓋畢公爲之, 於此無事, 不須見也. 三公之次, 先師後保,
此序先言保者, 篇之所作, 主爲召公不說, 故先言召公, 不以官位爲次也.
案經周公之言, 皆說己留在王朝之意, 則召公不說周公之留也.
故鄭‧王皆云 “周公旣攝王政, 不宜復列於臣職, 故不說.” 然則召公大賢, 豈不知周公留意而不說者.
以周公留在臣職, 當時人皆怪之, 故欲開道周公之言, 以解世人之惑, “召公疑之, 作君奭.” 非不知也.
史記燕世家云 “成王旣幼, 周公攝政, 當國踐阼, 召公疑之, 作君奭.”
鄭玄不見周官之篇, 言此師‧保, 爲周禮師氏‧保氏, 大夫之職, 言賢聖兼此官, 亦謬矣.
疏
○正義曰:周公呼爲‘君奭’, 是周公尊之曰君也. ‘奭’是其名, ‘君’非名也.
僖二十四年左傳, 富辰言文王之子一十六國, 無名‘奭’者, 則召公必非文王之子.
燕世家云 “召公奭與周同姓姬氏.” 譙周曰 “周之支族.” 譙周考校古史, 不能知其所出.
皇甫謐云 “原公名豐, 是其一也, 是爲文王之子一十六國.” 然文王之子, 本無定數, 竝原‧豐爲一, 當召公於中以爲十六, 謬矣.
此篇多言先世有大臣輔政, 是“陳古道以告之.” 呼君奭以告之, 故以‘君奭’名篇.
疏
○正義曰:成王의 집정 초에 召公은 保가 되고, 周公은 師가 되었으니, 곧 成王을 보필하는 左右大臣이 된 것이다.
召公은 周公이 일찍이 王의 정사를 섭행하다가 이제 다시 신하의 직위에 있게 되므로 그 의중이 좋지 않았다. 周公이 자기의 생각을 펼쳐서 召公에게 고하니, 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君奭〉편을 지은 것이다.
〈周官〉편에 “太師‧太傅‧太保를 세우니, 이것이 ‘三公’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의 ‘爲保’‧‘爲師’ 역시 三公의 벼슬인 셈이다.
이는 실로 太師와 太保이지만, ‘太’를 말하지 않은 것은 주된 뜻이 王의 몸에 대하여 스승으로 본보기가 되고 保安을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나 기실은 左右가 된 점을 말했을 뿐, 그 官名을 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太’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經傳에서 모두 武王의 때에 太公이 太師가 된 것을 말하였으니, 여기서 “周公이 師가 되었다.”라고 말한 것은 아마 太公이 薨하자, 周公에게 명하여 그를 대신하게 했던 것이리라.
이때에 太傅는 아마 畢公이 맡았을 것이나 이에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나타내 보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리라. 三公의 차서는 먼저가 師요 뒤가 保인데,
이 書序에서 먼저 保를 말한 것은 篇의 지어진 것이 주로 召公이 좋아하지 않은 점에 맞추어졌기 때문에 먼저 召公을 말한 것이지, 官位를 가지고 차서를 한 것은 아니다.
經文을 살펴보면 周公의 말은 모두 자기가 王朝에 머물러있게 된 속내를 말한 것들이었으니, 그것은 召公이 周公의 머물러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鄭玄과 王肅은 모두 “周公이 이미 王政을 섭행한 몸으로 다시 신하의 직위에 앉는 것은 마땅치 않는 일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召公은 大賢인데 어찌 周公이 머물게 된 속내를 몰라서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周公이 신하의 직위에 머물러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기기 때문에 周公의 말을 유도해서 세상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려고 했던 것이니, “召公이 의심하자 〈君奭〉을 지었다.”라고 한 것은 모른 것이 아니었다.
≪史記≫ 〈燕世家〉에 “成王이 아직 어리고 周公이 攝政하여 나라를 담당하니, 召公이 의심하자 〈君奭〉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나,
이 篇은 정권을 돌려준 뒤에 머물러 成王을 보필할 뜻을 말한 것으로 그 글이 매우 분명하니, 司馬遷이 망령되이 말했을 뿐이다.
鄭玄은 〈周官〉편을 보지 않고서 이 師와 保를 말할 때에 ≪周禮≫의 師氏와 保氏인 大夫의 職이라 여기고는 賢聖한 사람이 이 벼슬을 겸했다고 말하였으니, 또한 틀린 말이다.
疏
○正義曰:周公이 ‘君奭’이라 불렀으니, 이는 周公이 그를 높여 ‘君’이라 한 것이다. ‘奭’은 바로 그의 이름이고, ‘君’은 이름이 아니다.
≪春秋左氏傳≫ 僖公 24년 조에서 富辰이 말한 文王의 아들 16國 속에 ‘奭’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없었으니, 召公은 필시 文王의 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史記≫ 〈燕世家〉에 “召公 奭은 周나라와 同姓인 姬氏이다.”라고 하였고, 譙周는 “周나라의 支族이다.”라고 하였으니, 譙周는 古史를 상고하여 召公의 출처를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皇甫謐은 “原公은 이름이 ‘豐’으로 그중 하나이니, 이가 文王의 아들 16國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文王의 아들은 본래 정해진 숫자가 없으니, 原‧豐을 아울러 하나로 만들어 召公을 그중에 해당시켜 16을 만든 것은 틀린 것이다.
이 篇에는 先世에 大臣이 정사를 보필한 적이 있음을 많이 말하였으니, 이래서 “옛 道를 베풀어 고했다.”라고 한 것이다. 君奭을 불러서 고했기 때문에 ‘君奭’으로 편명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