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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正義(6)

상서정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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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注疏 제18권 周書
周官 第二十二
孔氏 傳 孔穎達 疏
成王 既黜殷命滅淮夷하고
[傳]黜殷 在周公東征時하고 滅淮夷 在成王即政後 事相因이라 連言之
還歸在豐하시니 作周官이라
[傳]成王 雖作洛邑이나 猶還西周
[疏]‘成王’至‘周官’
○正義曰:成王於周公攝政之時, 既黜殷命, 及其即之後, 滅淮夷, 於是天下大定.
自滅淮夷, 還歸在豐, 號令群臣, 言周家設官分職用人之法, 史敍其事, 作周官.
[疏]○傳‘黜殷’至‘言之’
○正義曰:據金縢之經․大誥之序, 知‘黜殷命’在周公攝政三年東征之時也.
據成王政之序․費誓之經, 知‘滅淮夷’, 在成王即政之後也. 淮夷於攝政之時, 與武庚同叛, 成王既滅淮夷, 天下始定.
淮夷本因武庚而叛, 黜殷命與滅淮夷, 其事相因, 故雖則異年, 而連言之, 以見天下既定, 乃作周官故也.
下經言‘四征弗庭’, 是黜滅之事也, 承德’ 是安寧之狀也,
序顧經文, 故追言‘黜殷命’, 以接‘滅淮夷’, 見征伐乃安定之意也.
[疏]○傳‘成王’至‘西周’
○正義曰:以洛誥之文言“王在新邑”, 今復云“在豐”, 故解之也.
史記周本紀云 “太史公曰 ‘學者皆稱周伐紂, 居洛邑, 綜其實不然.
武王營之, 成王使召公卜, 居九鼎焉, 而周復都豐․鎬’.” 是言成王雖作洛邑, 猶還西周之事也.
多方云 “王來自奄, 至於宗周.” 宗周即鎬京也, 於彼不解, 至此始爲傳者, 宗周雖是鎬京, 文無‘豐鎬’之字, 故就此解之.
武王既以遷鎬京, 今王復在豐者, 豐․鎬相近, 舊都不毀, 豐有文王之廟,
周官
[傳]言周家設官分職用人之法이라
[疏]○傳‘言周’至‘之法’
○正義曰:周禮每官言人之員數及職所掌, 立其定法, 授與成王.
成王即政之初, 即有淮夷叛逆, 未暇得以立官之意, 號令群臣.
今既滅淮夷, 天下清泰, 故以周家設官分職用人之法, 以誥群臣, 使知立官之大旨也.
‘設官分職’, 周禮序官之文, 言設置群官, 分其職掌.
經言立三公六卿, 是‘設官’也, 各言所掌, 是‘分職’也. 各舉其官之所掌, 示以才堪乃得居之, 是說“用人之法.”


성왕成王이 이미 나라의 을 내치고 회이淮夷를 멸망시키고서
나라를 내친 일은 주공周公동정東征할 때에 있었고 회이淮夷를 멸망시킨 일은 성왕成王이 친정한 뒤에 있었으나 일이 서로 연관되기 때문에 연달아서 말한 것이다.
되돌아와 풍읍豐邑에 계시니, 〈사관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주관周官〉을 지었다.
성왕成王은 비록 낙읍洛邑을 조성하였지만, 외려 서주西周로 돌아왔다.
서서書序의 [성왕成王]에서 [주관周官]까지
정의왈正義曰성왕成王주공周公섭정攝政할 때에 이미 나라의 을 내치고 친정한 뒤에 회이淮夷를 멸망시키니 이에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회이淮夷를 멸망시킴으로부터 되돌아와 풍읍豐邑에 계시면서 신하들을 호령하며 나라가 을 베풀고 을 나누고 사람을 쓰는 법을 말씀하시니, 사관史官이 그 일을 서술하여 〈주관周官〉을 지었다.
의 [黜殷]에서 [言之]까지
정의왈正義曰:〈금등金縢〉의 과 〈대고大誥〉의 에 의거하여 ‘나라 을 내친 일’이 주공周公섭정攝政한 지 3년만인 동정東征할 때에 있었음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성왕정成王政〉의 와 〈비서費誓〉의 에 의거하여 ‘회이淮夷를 멸망시킨 일’이 성왕成王이 친정한 뒤에 있었음을 〈공안국은〉 알았던 것이다. 회이淮夷가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할 때에 무경武庚과 함께 반란을 하였는데, 성왕成王이 이미 회이淮夷를 멸망시키자 천하天下가 비로소 안정되었다.
회이淮夷는 본래 무경武庚으로 인하여 반란을 하였으니, 나라의 을 내침과 회이淮夷를 멸망시킨 그 일이 서로 연관되기 때문에 비록 연도는 다르지만 연달아 말해서 천하天下가 이미 안정되자 이에 〈주관周官〉을 지은 까닭을 보인 것이다.
아랫 에서 말한 ‘사면으로 제후諸侯 가운데 정직하지 못한 자를 정토征討하였다.’는 것이 바로 내치고 멸망시킨 일이고, ‘나라의 을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 바로 안녕安寧의 상태이니,
경문經文을 고려했기 때문에 ‘나라 을 내친 일’을 추후로 말하여 ‘회이淮夷를 멸망시킨 일’에 접속시켜서 정벌征伐을 통하여 안정시켰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의 [성왕成王]에서 [서주西周]까지
정의왈正義曰:〈낙고洛誥〉의 글에 “이 새로 세운 도읍에 계시면서”라고 하고, 지금 다시 “풍읍豐邑에 계신다.”라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풀이한 것이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태사공太史公이 ‘학자들은 모두 나라가 를 치고 낙읍洛邑에 머무른 것으로 칭하지만 그 실상을 속속들이 파보면 그렇지 않다.
무왕武王이 〈최초에 나라의 거주지를 낙읍洛邑에〉 경영하였고, 성왕成王소공召公으로 하여금 〈그곳이 길지吉地인지〉 거북점을 쳐서 확인해보게 한 다음 구정九鼎을 옮겨두었으며, 나라는 다시 풍읍豐邑호경鎬京에 도읍을 세웠던 것이다.’ 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성왕成王이 비록 낙읍洛邑은 만들었지만 외려 서주西周로 돌아온 일을 말한 것이다.
다방多方〉에 “나라로부터 와서 종주宗周에 이르렀다.”라고 한 ‘종주宗周’가 바로 호경鎬京인데, 저기에서 풀이하지 않고 여기에 와서 비로소 을 단 것은 종주宗周가 비록 이 호경鎬京이기는 하지만 경문經文에 ‘’․‘’의 글자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해석을 한 것이다.
무왕武王이 이미 호경鎬京으로 옮겼건만 지금 성왕成王이 다시 풍읍豐邑에 있는 것은 풍읍豐邑호경鎬京이 서로 가깝고 옛 도읍이 헐리지 않았으며 풍읍豐邑문왕文王의 사당이 있으므로 큰일이 있을 경우 풍읍豐邑으로 가서 선포하기 때문이었다.
주관周官은〉 나라가 을 베풀고 을 나누고 사람을 쓰는 법을 말씀한 것이다.
의 [言周]에서 [之法]까지
정의왈正義曰:≪주례周禮≫에서 매 벼슬마다 인원수와 직무분장을 말하였으므로 그 정법定法을 세워서 성왕成王에게 넘겨준 것이다.
성왕成王의 친정 초기에는 회이淮夷반역叛逆이 있어서 벼슬을 설립할 뜻으로 신하들에게 알릴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이미 회이淮夷를 멸하여 천하가 청명하고 태평하기 때문에 나라의 벼슬을 설립하고 직무를 나누고 사람을 쓰는 법을 가지고 신하들에게 고하여 벼슬을 설립하는 대체적인 뜻을 알게 한 것이다.
설관분직設官分職’은 ≪주례周禮≫의 벼슬을 차례로 열거한 글로서 여러 벼슬을 설치하여 그 직무를 나눔을 말한 것이다.
에서 말한 “삼공三公육경六卿을 세운다.”는 것이 바로 ‘벼슬을 설립한 것’이고, 각각 분장을 말한 것이 바로 ‘직무를 나누는 것’이다. 각각 그 벼슬의 분장한 바를 들어서 재질이 〈직무를〉 감당할 만하여야 그 관직에 거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을 쓰는 법’을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位)[政] : 저본에는 ‘位’로 되어 있으나, 宋刊 單疏本 및 書序의 傳 ‘在成王卽政後’에 의거하여 ‘政’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六服)[罔不] : 저본에는 ‘六服’으로 되어 있으나, 宋刊 單疏本에 의거하여 ‘罔不’로 바로잡았다.
역주3 : 宋板에는 ‘大’로 되어 있다.
역주4 成王至周官……故事就豐宣之故也 : 저본에는 ‘周官’의 傳 ‘言周家說官分職用人之法’의 뒤에 있으나, 武英殿本 및 上海古籍出版社 整理本에 의거하여 여기로 옮겨 번역하였다.

상서정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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