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吳以伍子胥
之謀
하야 西破彊楚
하고 北威齊晉
하며 南伐越
하다
越王爲人이 能辛苦하니 今王不滅이면 後必悔之하리이다
其後五年에 吳王聞齊景公死하고 而大臣爭寵하며 新君弱하고 乃興師北伐齊하다
吳王不聽
하고 伐齊
하야 大敗齊師於
하고 遂與鄒魯之君會以歸
하야 益疏子胥之言
하다
越王句踐用子貢之謀하야 乃率其衆以助吳하고 而重寶以獻遺太宰嚭하다
太宰嚭旣數受越賂하고 其愛信越殊甚하야 日夜爲言於吳王하니 王信用嚭之計러라
伍子胥諫曰 夫越은 腹心之疾이어늘 今信其游辭僞詐而貪齊하시니 譬猶石田하야 無所用之니이다
子胥謂其子曰 吾諫王호되 王不我用하니 吾今見吳之滅矣라
子胥爲人
이 剛暴少恩
하니 其怨望猜賊
이면 爲禍也深
하리이다
前日王欲伐齊에 子胥以爲不可호되 王卒伐之하사 而有大功이어늘 子胥計謀不用하니 乃反怨望하니이다
今王又復伐齊어시늘 子胥專愎强諫하고 沮毁用事하야 徼幸吳之敗하야 以自勝其計謀耳니이다
今王自行하사 悉國中武力以伐齊어시늘 而子胥諫不用하야 因輟佯病不行하니
且臣使人微伺之러니 其使齊也에 乃屬其子於鮑氏하니이다
夫人臣內不得意라하야 外交諸侯하고 自以先王謀臣으로 今不用이라하야 常怏怏하니 願王早圖之하소서
子胥曰 嗟乎라 讒臣宰嚭爲亂이어늘 王顧反誅我로다
我令若父霸하고 又若立時에 諸弟子爭立이어늘 我以死爭之於先王하니 幾不得立이러니라
乃告
曰 必樹吾墓上以梓
하야 令可以爲器
어든 而抉吾眼
하야 著之吳東門
하야 以觀越寇之滅吳也
하라 乃自刺殺
하다
吳王聞之
하고 大怒
하야 乃取子胥屍
하야 盛以
하야 浮之江中
하다
吳人憐之하야 乃爲立祠於江上하고 因名曰胥山이라하다
後十餘年에 越襲吳하니 吳王還與戰이라가 不勝하니 使大夫行成於越호되 不許하다
令死者無知則已어니와 死者有知인댄 吾何面目으로 以見子胥也리오하고
오吳나라가 오자서伍子胥와 손무孫武의 계책을 써서 서쪽으로는 강력한 초楚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위협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월越나라를 토벌하였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맞아 싸워 고소姑蘇에서 오나라 군대를 패배시키고 합려闔閭의 엄지발가락에 부상을 입히자, 오나라 군대는 퇴각하였다.
합려가 태자太子 부차夫差에게 말했다. “너는 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일을 잊겠느냐?”
부차는 대답하였다. “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부차는 즉위하여 왕이 되고 나서, 백비伯嚭를 태재太宰로 삼아 전쟁과 사격훈련을 하였다.
3년 뒤에 오나라는 월나라를 토벌하여 부추夫湫에서 월越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월왕 구천은 곧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 위에서 머물렀다.
그러고는 대부大夫 문종文種을 보내어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강화講和하기를 요청하고, 나라의 통치권을 바치며 자신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시첩侍妾이 되기를 원하였다.
오왕 부차가 허락하려고 하자 오자서는 간諫하였다.
“월왕 구천은 사람됨이 어렵고 괴로움을 잘 참아내니, 지금 왕께서 없애지 않으면 후일 반드시 뉘우칠 것입니다.”
오왕吳王은 이 말을 따르지 않고 태재 백비의 계책을 채용하여 월나라와 화평和平하였다.
그 뒤 5년에 오왕은, 제 경공齊 景公이 죽고 대신大臣들은 총애받기를 다투며 새로 즉위한 임금은 어리다는 소문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북쪽을 향하여 제齊나라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구천이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고 죽은 이를 조문弔問하며 병든 이를 문병問病하고, 또 인재人才를 잘 임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오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월나라는 뱃속의 병이고, 제나라는 옴 같은 피부병과 같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월나라를 먼저 토벌하지 않으시고, 제나라 토벌하는 일에 힘쓰시니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왕은 오자서의 간언諫言을 따르지 않고 제나라를 토벌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키고, 마침내 추鄒‧노魯의 임금과 회맹會盟을 하고 돌아와 더욱 오자서의 말을 멀리하였다.
그 뒤 4년에 오나라는 다시 북쪽으로 제나라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월왕 구천은 자공子貢의 계책을 채용하여, 마침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돕고 많은 보물을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태재 백비는 이미 여러 차례 월나라의 뇌물을 받고는 월나라를 사랑하고 신임하는 마음이 매우 심하여 밤낮으로 월나라를 위해 오왕에게 좋게 말하니, 오왕은 백비의 계책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오자서는 간했다. “저 월나라는 뱃속의 병인데 지금 근거 없는 들뜬 말과 거짓된 계책을 믿고 제나라에 대한 이익을 추구하시니, 비유하면 돌밭과 같아서 쓸모가 없습니다.
《서경書經》 〈반경盤庚〉에 ‘교훈을 실추失墜하여 공손히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코를 베거나 죽여서 남겨두어 기름이 없게 하여 그 종자를 이 도읍에 옮겨 살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상商나라가 흥성興盛하게 된 원인이니, 왕께서는 제나라는 버려두고 월나라를 먼저 공격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오왕은 이 말도 따르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냈다.
오자서는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왕에게 간하였으나 왕이 나의 말을 채용치 않으니, 나는 이제 오나라가 멸망할 것을 보았다.
네가 오나라와 함께 멸망하는 것은 아무 의의가 없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의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鮑氏에게 맡기고 돌아와서 오왕에게 사신으로 갔다온 일을 보고하였다.
태재 백비는 이미 오자서와 서로 꺼리는 틈이 있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자서를 참소하였다.
“오자서의 사람됨은 강퍅하고 사나우며 은정恩情이 적으니, 그가 원망하고 음험陰險한 적의敵意를 품으면 깊은 화란禍亂이 될 것입니다.
지난날 왕께서 제나라를 토벌하려 하실 때 오자서가 안 된다고 하였으나 왕께서 끝내 제나라를 토벌하여 큰 공을 거두셨는데, 오자서는 자기의 계책이 채용되지 않으니 도리어 원망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또다시 제나라를 토벌하려 하시는데 오자서는 제멋대로 강퍅하게 간하며, 왕께서 하시는 일을 저지하고 훼방하면서 오나라가 실패하여 스스로 자기의 계책이 우월했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 직접 출정하시어 나라 안의 모든 무력을 징발하여 제나라를 토벌하려 하시는데, 오자서는 자기의 간언이 채용되지 않자 그대로 나오지 않고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대비하지 않으시면 안 되니, 이 사람은 왕에게 화란禍亂을 일으키는 일을 어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 신臣이 사람을 보내 몰래 엿보게 했더니, 그가 제나라에 사신 갔을 때 마침내 그의 아들을 포씨鮑氏에게 맡겼습니다.
신하가 되어 국내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여 밖에서 제후와 교제하고, 자신은 선왕先王의 모신謀臣으로서 지금 자기의 건의가 채용되지 않는다 하여 언제나 야속하게 여기고 있으니, 왕께서는 일찌감치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오왕은 말하였다. “그대가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나 역시 의심하고 있었소.”
그러고는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촉루검屬鏤劍을 주면서 말하였다. “그대는 이 검劍으로 자결하시오.”
그러자 오자서는 말했다. “아, 참소하는 신하 태재 백비가 화란禍亂을 조장하고 있는데 왕은 도리어 나를 주살誅殺하는구나.
나는 너의 아버지를 패자霸者가 되게 하였고, 또 네가 태자太子가 될 때 여러 자제子弟들이 태자가 되려고 다투었는데 나는 선왕께 죽음을 무릅쓰고 너를 위해 간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너는 하마터면 태자가 되지 못할 뻔했었다.
네가 이미 태자가 되어 오나라를 나누어 나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나는 도리어 감히 받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참소하는 신하의 말을 듣고 이 어른을 죽이는가?”
마침내 사인舍人에게 당부하였다. “나의 무덤가에는 반드시 가래나무[재梓]를 심어 그 나무가 커서 기물을 만들 만하게 되거든, 나의 눈알을 파내 오나라 도성都城 동문東門에 걸어두어 월나라의 침략군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해다오.” 그러고는 마침내 스스로 찔러 죽었다.
오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바로 오자서의 시체를 가져다가 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담아 강물에 띄워버렸다.
오나라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바로 강가에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서산胥山이라 하였다.
그 뒤 10여 년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습격하니 오왕은 〈북방北方에 가서 제후들과 회맹하던 중에〉 군대를 돌이켜 돌아와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자, 대부大夫를 월나라에 보내 강화講和를 요구하였으나 월나라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왕은 자살하려고 하면서 말했다. “내가 오자서의 말을 채용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죽은 자가 지각이 없다면 그뿐이지만,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오자서를 만나랴!”
그러고는 마침내 솜을 얼굴에 덮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