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十五年
에 遣使詣西域
注+使, 去聲, 後同. 西域, 西夷之國也.하여 立葉護
한대 未還
注+葉, 音攝. 葉護, 突厥大臣之號也, 本曰葉護統. 葉護嗣其兄射匱可汗, 乃號葉護可汗. 是年, 葉護數遣使入貢. 秋七月, 左領軍將軍張大師持節, 即其所號, 立爲可汗, 賜以.에 又令人多齎金帛
注+令, 平聲, 後同.하여 歷諸國市馬
하니 魏徵諫曰
今發使以立可汗爲名
이어늘 可汗未定立
에 即詣諸國市馬
하시니 彼必以爲意在市馬
요 不爲專立可汗
注+不爲之爲, 去聲.이리이다
可汗得立이라도 則不甚懷恩이요 不得立이면 則生深怨이며 諸蕃聞之하면 且不重中國이리이다
但使彼國安寧
注+使, 如字.이면 則諸國之馬
가 不求自至
리이다
昔
에 漢文帝有獻千里馬者
어늘 曰 吾吉行日三十
注+吉行, 謂巡幸祭祀也.요 凶行日五十
注+凶, 漢書作師. 凶行, 謂出兵行師也.이라
鸞輿在前
注+輿, 漢書作旗.하고 屬車在後
注+屬, 音囑. 漢因秦制, 大車八十一乘相屬也.하니 吾獨乘千里馬
하여 將安之乎
注+乘, 平聲. 之, 猶往也.아하고 乃償其道里所費而返之
니이다
又光武注+名, 秀, 漢中興之君.有獻千里馬及寶劍者
어늘 馬以駕
하고 劍以賜騎士
니이다
今陛下凡所施爲
注+施, 平聲.는 皆邈過三王之上
注+邈, 音莫.이어늘 奈何至此欲爲孝文光武之下乎
잇가
又魏文帝注+姓曹, 名丕, 操之子也. 受漢禪, 國號魏.求市西域大珠
어늘 蘇則
注+蘇姓, 則名, 字文師, 扶風人. 仕魏爲侍中.曰 若陛下惠及四海
하면 則不求自至
어니와 求而得之
하면 不足貴也
라하니
陛下縱不能慕漢文之高行
注+去聲.이나 可不畏蘇則之正言耶
잇가
太宗
이 遽令止之
注+舊本, 此章之首曰貞觀中, 今按標年.하다
先王이 內中夏而外四夷하여 其待之固有其道矣나 後世不爲所亂이면 則爲所窺는 皆起於喜功貪利之故라
太宗은 聖明이로되 猶不免此하고 徵之所言은 切中其病이로되 而終唐之世토록 困於亂華하니 可不戒哉아
愚按 禹貢曰 織皮는 崑崙析支渠捜를 西戎即敍라하니 因其織皮之貢而即敍之니 此는 大禹之撫四夷也라
정관貞觀 15년(641)에 사신을
서역西域에 보내
注+사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서역西域은 서이西夷의 국가이다.섭호葉護를
가한可汗에 책립하게 했는데 채 돌아오기도 전에
注+섭葉은 음이 섭攝이다. 섭호葉護는 돌궐突厥 대신大臣의 호칭인데 원래는 섭호통葉護統이라 한다. 섭호葉護가 그의 형 사궤가한射匱可汗을 계승하여 섭호가한葉護可汗이라 불렀다. 이해에 섭호葉護가 몇 차례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보냈다. 가을 7월에 좌영군장군左領軍將軍 장대사張大師가 부절을 가지고 가서 그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가한可汗으로 책립한 뒤 고鼓와 독纛을 하사했다. 또다시 사람을 보내 황금과 비단을 많이 준비하여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뒤에도 같다. 각국을 다니며 말을 사오게 하자,
위징魏徵이 간언하였다.
“지금 사신을 보낸 것은 가한을 책립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는데 가한이 확정되기도 전에 바로 서역 각국에 사람을 보내 말을 사오도록 하시니, 저들은 반드시 서역에 사신을 보낸 목적이 말을 사려는 데 있고 가한을 책립하는 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注+불위不爲의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한이 책립된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은혜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책립되지 않으면 큰 원망을 자아낼 것이며, 여러 이민족異民族 나라들이 이 소문을 듣게 되면 장차 중국中國을 중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저들 나라를 안정시키기만 한다면
注+사使(하여금)는 본래 음의音義대로 독해한다. 저들 각국의 말은 구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게 될 것입니다.
옛날
한漢 문제文帝 때에
천리마千里馬를 헌상한 자가 있자, 한 문제가 이르기를 ‘나는
길행吉行일 때는 하루에 30리를 가고
注+길행吉行은 순행巡幸하며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흉행凶行일 때는 하루에 50리를 간다
注+흉凶은 《한서漢書》 〈가연지열전賈捐之列傳〉에 사師로 되어 있다. 흉행凶行은 싸우기 위해 출병出兵하는 것을 말한다..
난여鸞輿(천자 수레)가 앞에 있고
注+여輿는 《한서漢書》 〈가연지열전賈捐之列傳〉에 기旗로 되어 있다.촉거屬車(뒤따르는 수레)가 뒤에 있으니
注+촉屬(잇다)은 음이 촉囑이다. 한漢나라가 진秦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대거大車 81승乘을 뒤따르게 하였다. 내가 홀로 천리마를 타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注+승乘(타다)은 평성平聲이다. 지之(가다)는 왕往과 같다.라 하고, 오는 길에 든 비용을 배상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광무제光武帝注+광무光武는 이름이 수秀이니, 한漢나라 중흥中興의 군주이다. 때에 천리마와
보검寶劍을 헌상한 자가 있자 말은
고거鼓車를 끌게 하고 검은
기사騎士에게 하사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은
注+시施(은혜를 베풀다)는 평성平聲이다. 모두
삼왕三王 위에 저 멀리 앞서 있거늘
注+막邈(아득하다)은 음이 막莫이다., 어찌하여 이 점에 있어서는
효문제孝文帝와
광무제光武帝의 아래가 되려 하십니까.
그리고
위魏 문제文帝가
注+〈위魏 문제文帝는〉 성姓이 조曹이고 이름이 비丕이니, 조조曹操의 아들이다. 한漢나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국호國號를 위魏라 하였다.서역西域의
대주大珠를 사오려 하자
소칙蘇則이
注+소蘇는 성姓, 칙則은 이름이고, 자字는 문사文師이니, 부풍扶風 사람이다. 위魏나라에 벼슬하여 시중侍中을 역임했다. 말하기를 ‘만일 폐하께서 은혜가 천하에 미치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겠지만 일부러 구해서 얻게 되면 귀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폐하께서 비록 한 문제의 숭고한 덕행을 우러러보지 못한다 해도
注+〈행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다. 소칙의 바른말을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태종이 바로 멈추게 하였다.
注+구본舊本에는 이 장의 첫머리에 ‘정관중貞觀中’이라고 했으나, 지금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거하여 연도를 표기했다.
“위징魏徵의 간언은 만이蠻夷가 중국을 엿보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선왕先王이 중하中夏(中華)를 가깝게 여기고 사이四夷를 소원하게 여겨 그들을 대하는 것에 본디 원칙이 있었으나, 후세에 와서 사이四夷가 중국을 어지럽히지 않으면 사이四夷가 중국을 넘본 것은 모두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이익을 탐한 데에 기인한 것이다.
태종太宗은 성스럽고 현명한 임금임에도 여전히 이를 면치 못하였고 위징이 말한 것은 그 병폐를 정확히 지적한 것임에도 당唐나라가 끝날 때까지 그들로부터 중화를 혼란에 빠뜨리는 곤란을 겪었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서경書經》 〈하서夏書 우공禹貢〉에서, “모직과 가죽은 곤륜산崑崙山, 석지析支, 거수渠捜에서 공물로 바쳤으니, 이들 서융西戎에 우禹임금의 공효가 미쳐갔다.”라고 하였는데, 모직과 가죽을 공물로 바침으로 인해 멀리 공효가 미쳐 나아갔으니 이것은 위대한 우禹임금이 사이四夷를 감싸 안은 방법이다.
한漢 무제武帝는 명마名馬를 이용하여 대완大宛과 통하였으나 해마다 군사를 동원하는 일을 야기했고, 광무제光武帝는 명마를 물리치고 옥문관玉門關을 걸어 잠궈 서역西域의 사신을 끊었으니 두 임금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연히 위징魏徵이 간언을 올렸어야 하는 것인데 다행히 태종太宗이 잘 받아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