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德九年冬
에 突厥頡利突利二可汗
注+① 汗:音韓, 凡言可汗, 竝同.이 以其衆二十萬
으로 至渭水便橋之北
注+② 至渭水便橋之北:漢武帝初作便門橋, 長安城北面西頭門卽平門也. 古者平便字同. 於此道作橋, 跨渡渭水, 以趨茂陵, 此便橋是也.하여 遣酋帥執失思力
注+③ 遣酋帥執失思力:酋帥, 長帥也. 執失, 虜姓, 思力, 其名.하여 入朝爲覘
하니 自張聲勢云 二可汗總兵百萬
하여 今已至矣
라하고 乃請返命
이어늘
太宗謂曰 我與突厥面自和親
이어늘 汝則背之
注+④ 汝則背之:音倍.하니 我無所愧
라 何輙將兵
注+⑤ 何輙將兵:將, 去聲.入我
하여 自夸彊盛
고 我當先戮爾矣
리라하니 思力懼而請命
이라
蕭瑀封德彛等請禮而遣之한대 太宗曰 不然하다 今若放還하면 必謂我懼라하고 乃遣囚之하다
太宗曰 頡利聞我國家新有
注+⑥ 難:去聲하고 又聞朕初卽位
하니 所以率其兵衆
하여 直至於此
는 謂我不敢拒之
라
朕若閉門自守면 虜必縱兵大掠하리니 彊弱之勢가 在今一策이라
朕將獨出
하여 以示輕之
하고 且耀軍容
하여 使知必戰
하면 事出不意
라 乖其本圖
리니 制服
가 在玆擧矣
라하고
遂單馬而進
하여 隔津與語
하니 頡利莫能測
이어늘 俄而
繼至
하니 頡利見軍容大盛
하고 又知思力就拘
라 由是大懼
하여 請盟而退
注+⑦ 武德九年冬……請盟而退:按通鑑, 載此事甚詳, 辭多不錄.하다
注
故弼成
之制
하니 하며 니 內外之限
을 截乎其不可紊也
어늘
降及後世하여는 德不足以懷柔하여 而藉乎威하고 威不足以讋服하여 而至于亂이라
太宗內定中國하고 外綏四夷하여 以漢武窮征遠討而不能服者를 咸歸版圖라
若突厥은 爲患久矣로되 唐有天下之初에 已憑陵上國이러니 至于斯時하여 率騎二十萬하여 直至渭水하니 亦云肆矣라
太宗一時輕騎示威하니 其氣槪直可以寒氊裘之膽而奪之氣하고 不以一矢相加遺而中國尊安하여 裔夷退抑이라
雖不可與帝者明刑惇德竝論이나 其不戰屈人은 亦足偉也니 謂之英武가 不亦宜乎아
무덕武德 9년(626) 겨울에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과
돌리가한突利可汗이
注+〈한汗(이민족 추장 호칭)은〉 음音이 한韓으로, 가한可汗이라고 말한 곳은 모두 같다. 병력 20만을 이끌고
위수渭水의
편교便橋 북쪽에 이르러
注+한 무제漢 武帝 재위 초기에 편문교便門橋를 만들었는데, 장안성長安城 북면 서쪽 모퉁이에 있는 문이 바로 평문平門이다. 옛날에는 평平자와 편便자를 동일하게 썼다. 이 길에 다리를 놓아 위수渭水를 건너서 무릉茂陵으로 나아갔는데, 이 편교便橋가 바로 그것이다. 추수酋帥 집실사력執失思力을 보내
注+추수酋帥는 우두머리 장수이다. 집실執失은 오랑캐의 성姓이고, 사력思力은 이름이다. 당唐나라 조정에 들어가 정세를 엿보게 하자, 〈집실사력이〉 자신의
군세軍勢를 과장하여 “두 가한께서 백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미 도착하였습니다.” 라고 하고, 회답하기를 청하였다.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나는
돌궐突厥과 직접 화친을 맺었는데, 너희들이 배반을 하였으니
注+〈배背(배반하다)는〉 음音이 배倍이다.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어찌 번번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注+장將(거느리다)은 거성去聲이다. 우리
기현畿縣에 침입하여 강성함을 스스로 과시하는가? 나는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 하니, 집실사력이 두려워서 목숨을 구걸하였다.
소우蕭瑀와 봉덕이封德彛 등이 예우하여 돌려보내기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지금 만약 풀어주어 돌려보낸다면 반드시 내가 그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것이오.” 하고, 이에 집실사력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
힐리頡利는 우리나라에 근래
내변內變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注+〈난難(환난)은〉 거성去聲이다., 또 짐이 새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많은 병력을 이끌고 곧바로 여기에 이른 것은 내가 감히 대항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오.
짐이 만일 성문을 닫고 수비를 한다면 적들은 필시 병력을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할 것이니, 강약의 형세는 지금 어떤 계책을 내는가에 달려 있소.
짐이 홀로 나아가 적들을 얕잡아 보는 모습을 보이고, 또 군대의 위용을 드러내어 반드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일이 예측하지 못한 데에서 나와서 그들의 본래 의도를 어그러트릴 것이니, 흉노匈奴(돌궐)를 제압하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려 있소. ”
드디어 필마로 나아가서 나루터를 사이에 두고 적에게 말을 건넸다. 힐리가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당나라의 6
군軍이 연이어 도착하니, 힐리가 성대한 군대의 위용을 보고, 또 집실사력이 구금된 사실을 알았다. 이 때문에 크게 두려워하여 맹약을 청하고 물러갔다.
注+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 무덕武德 9년 조에 이 일이 아주 상세히 실려 있는데, 내용이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오랑캐가 중원을 혼란스럽게 했을 때, 순舜임금은 형벌을 분명하게 시행하는 가르침을 엄정히 하였고, 오랑캐가 거느리고 와서 복종했을 때, 순임금은 덕이 있는 사람을 후대하는 마음을 신중히 하였다.
그러므로 오복五服의 제도를 도와 이루었으니, 요복要服은 가까운 곳에 문교文敎를 헤아리고 먼 곳에 무위武衛를 떨쳤으며, 황복荒服은 유배지로 삼았으니, 내외內外의 구분을 엄중히 하여 어지럽힐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와서는 덕이 오랑캐를 회유하기에 부족하여 위엄을 빌리고, 위엄이 오랑캐를 복종시키기에 부족하여 혼란에 이르렀다.
태종太宗이 안으로 중원을 평정하고 밖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안정시켜서 한 무제漢 武帝가 끝까지 정벌하여 먼 지역까지 토벌하고서도 복종시키지 못한 자들을 모두 당唐나라 판도 안으로 귀속하게 하였다.
돌궐突厥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근심거리였는데,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초기에 이미 상국上國을 침범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기병 20만을 이끌고서 곧바로 위수渭水에 이르렀으니 방자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태종이 일시에 필마로 위엄을 보이니 그 기개는 곧바로 오랑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기운을 빼앗고, 한 발의 화살도 낭비하지 않고서도 중국이 존귀해지고 안정되자 오랑캐들이 물러갔다.
비록 형벌을 분명히 시행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후대한 순임금과 나란히 논할 수는 없으나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 적을 굴복시킨 점은 또한 위대하니, 뛰어나고 용맹하다고 일컫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