突厥
可汗弟中郞將阿史那結社率
이 陰結所部
注+㉔ 突厥[突利]可汗……陰結所部:將, 去聲. 阿史那, 突厥姓, 名結社率, 突利可汗之弟, 時爲中郞將.하고
幷擁突利子
하여 夜犯御營
이라가 事敗
어늘 皆捕斬之
하다
太宗이 自是로 不直突厥하여 悔處其部衆於中國하여 還其舊部於河北하다
建牙於故定襄城하고 立李思摩爲乙彌泥熟俟利苾可汗하여 以主之하고
因謂侍臣曰 中國百姓은 實天下之根本이오 四夷之人은 乃同枝葉이어늘
擾其根本하여 以厚枝葉하고 而求久安은 未之有也니
初不納魏徵言
하여 遂覺勞費日甚
하여 幾失久安之道
注+㉕ 幾失久安之道:幾, 平聲. 舊本李大亮疏以下, 至太宗不納, 另爲一章. 十三年以下, 接前段爲一章. 今按其是一事, 因次第其辭, 合爲一章. 又按通鑑載此事, 衆議甚詳, 辭多不錄.로다
注
【集論】胡氏寅曰 獻言之道는 惟理是憑하면 則言必忠하고
太宗이 處降突厥할새 徧詢在廷이어늘 未若魏徵之言盡善也나
彦博之策이 太宗之所欲爲者로 其偶同歟아 未可知也라
如所見偶同하면 則不應言之再三이요 如先意承志하면 則不得爲忠矣라
如此而欲功加外荒하여 冠帶百蠻者는 非聖主之盛節也라
注
溫彦博이 勸居突厥塞內러니 突厥反에 太宗不怒彦博하고 而追思魏徵之言이라
以見留突厥塞內하고 使充宿衛如一家者는 本太宗雄夸之心이요
太宗慕冠帶百蠻之名하여 推心不疑하여 幾至危殆하니 豈非後世之永戒哉리오
注
突厥旣破하고 頡利旣擒에 若用魏公之言하여 使處河北하면
乃卒用彦博之策하니 若不因結社之亂하여 悉徙故地하고 假之世數蕃孶하면 爲唐之費가 不亦重乎아
大抵處置降人最難하니 內之中國하면 亂華俗하고 置諸塞內하면 生後患이라
注
愚按 昔成周盛時
에 四夷來朝
하여 坐之國門之外
는 蓋亦如
之制
하니 蠻夷鎭藩在所外也
라
天下旣平에 窮荒悉服하고 突厥之委命闕庭하니 尤漢以下之所無者라
當是時하여 魏徵以忠直得上心하여 屢有回天之力이나 而竟莫之回라
溫彦博以儒臣遇合하여 處置部落之議에 胡爲乎獨異衆正之見邪아
遂使蕃酋列在禁衛하여 有因而入居長安者가 近萬家하니
정관貞觀 13년(639)에 태종太宗이 구성궁九成宮에 행차하였다.
돌궐突厥 돌리가한突利可汗의 동생
중랑장中郞將 아사나결사솔阿史那結社率이 그 부락민들과 은밀히 결탁하고서
注+장將(장수)은 거성去聲이다. 아사나阿史那는 돌궐突厥의 성姓이고, 이름은 결사솔結社率인데 돌리가한突利可汗의 동생이며 당시에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아울러 돌리가한突利可汗의 아들 하라골賀羅鶻을 옹립하고 밤에 어영御營(구성궁九成宮)을 침범하였다가 일이 실패하자 모두 잡혀 참수되었다.
태종은 이로부터 돌궐을 〈금위禁衛에〉 숙직하지 못하게 하고, 돌궐의 부락 사람들을 중국에 살게 한 것을 후회하여, 그 옛 부락민들을 하북河北(하수河水 북쪽)으로 돌려보냈다.
아기牙旗를 옛 정양성定襄城에 세우게 하고 이사마李思摩를 을미니숙사리필가한乙彌泥熟俟利苾可汗으로 삼아 이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태종은 근신近臣에게 말하였다. “중국의 백성은 진실로 천하의 뿌리이고 사방의 오랑캐들은 가지나 잎인데,
뿌리를 흔들어 가지와 잎을 무성하게 하고 오래도록 안정을 구하는 법은 없었소.
처음에
위징魏徵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마침내 노고와 비용이 날로 심하게 되어 거의 오래도록 안정을 구하는 방도를 잃을 뻔한 것을
注+기幾(거의)는 평성平聲이다. 구본舊本에 ‘이대량소李大亮疏’ 이하로부터 ‘태종불납太宗不納’까지는 별도로 한 장이 되었고, ‘십삼년十三年’ 이하는 앞 단락에 붙여 한 장이 되었다. 지금 살펴보면 이것은 하나의 일이므로 그 말을 차례대로 놓고 합하여 한 장으로 만들었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 정관貞觀 13년에 이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의논들이 매우 상세하여 대부분의 말을 기록하지 않는다. 깨달았소.”
注
호인胡寅이 말하였다. “말을 올리는 방법은 오직 이치에 의거하면 말할 적에 반드시 충성스럽고,
말을 듣는 방법은 자기의 말과 같다고 하여 옳다고 여기지 않으면 들을 적에 반드시 잘 알게 된다.
태종太宗이 돌궐突厥의 항복해온 자들을 처리할 때 조정에서 두루 물었는데, 위징魏徵의 훌륭한 말보다 나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태종이 따르지 않고 도리어 온언박溫彦博의 계책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온언박의 계책이 태종이 하고자 하는 것과 우연히 같았는지 모르겠다.
온언박이 태종이 뜻을 말하기에 앞서서 그 뜻을 받들어 말했는지 모르겠다.
만약 생각이 우연히 같았다면 그것을 두세 번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태종이 뜻을 말하기에 앞서서 그 뜻을 받들어 말하였다면 충성스럽지 못하다.
태종太宗이 그의 말을 받아들여 얼마 뒤에 어영御營(구성궁九成宮)의 휘장에 화살이 날아오는 변고가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을 외황外荒(변경의 먼 지역)에 더하여 모든 오랑캐들에게 관대冠帶(문명 교화)를 하게 하려는 것은 성스러운 임금의 성대한 일이 아니다.”
注
또 말하였다. “위공魏公(위징魏徵)이 일찍이 후군집侯君集을 등용하여 재상宰相으로 삼은 것을 권하였는데,
후군집이 배반하자 태종太宗은 위징이 편당했다고 의심하여 혼인 관계를 단절하고 비석을 엎어버렸다.
온언박溫彦博이 돌궐突厥을 변경 안에 살게 하기를 권하였는데, 돌궐이 배반하자 태종은 온언박에게 노여워하지 않고 위징의 말을 추후에 생각하였다.
일은 같지만 일의 처리가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돌궐을 변경 안에 머물게 하고 그들의 추장을 숙위에 충당시켜 당唐나라와 한 집안처럼 보인 것은 영웅심을 과시하려는 태종의 마음에서 근본한 것이고,
온언박이 태종의 은미한 마음을 헤아리고서 이를 부추겼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온언박을 허물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러나 행궁行宮의 휘장에 화살이 날아온 변고는 또한 매우 위태로웠다.
태종이 모든 오랑캐들에게 관대冠帶를 하게 하였다는 명성을 바라고 자기 마음을 미루어 의심하지 않아 거의 위태로움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후세에 길이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순경荀卿이 말하기를 ‘덕으로 남을 아우르는 자는 왕이 되고, 부유함으로 남을 아우르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돌궐突厥을 격파하고 힐리頡利를 사로잡고 나서 만약 위공魏公(위징魏徵)의 말을 채택하여 돌궐을 하북河北(하수河水 북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면
변방에 소란이 없을 것이며 국가에 재용을 낭비함이 없었을 것이니, 또한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온언박의 계책을 채택하였으니, 만약 아사나결사솔阿史那結社率의 난리로 인하여 다 옛날 땅으로 보내지 않고 몇 대가 지나 번식하게 하였다면 당나라의 재력 낭비가 또한 심하지 않겠는가.
대개 항복한 사람을 안치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 중국에 받아들이면 중화의 풍속을 어지럽게 하고, 변경 안에 두면 후환이 생긴다.
오직 옛날 땅으로 돌려보내서 군장을 세우게 하고 그들의 옛 풍속을 따르게 해야 하니,
복종하면 번국藩國이 되고 떠나도 배반한 신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장구한 계책이다.”
注
내(과직戈直)가 살펴보건대 옛날 성주成周가 성대할 때 사방의 오랑캐가 입조하여 국문의 밖에 앉아 있었던 것은 또한 구복九服의 제도와 같게 한 것이니, 만복蠻服과 이복夷服, 진복鎭服과 번복藩服의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육혼陸渾의 융족戎族을 이천伊川에 이주시켰는데,
그 후에 양거읍揚拒邑‧천고읍泉皐邑과 이수伊水‧낙수雒水의 융족戎族들이 왕성王城을 침입하고 경사京師를 공격한 것은 비록 왕자王子 대帶가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지만 또한 애초에 그들을 이주시킨 것이 잘못이다.
진晉나라 강통江統의 〈사융론徙戎論〉이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당唐나라가 흥성하여 태종太宗이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였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자 먼 변방 나라들이 다 항복하고 돌궐突厥이 당나라 조정에서 목숨을 빌었으니 더욱이 한漢나라 이래로 없던 일이었다.
진실로 중국에 두어서 원근에 과시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이때에 위징魏徵이 충직忠直함으로 태종의 마음을 얻어서 여러 번 태종의 마음을 되돌리는 힘을 발휘하였는데, 이번에는 끝내 태종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온언박溫彦博이 유신儒臣들과 서로 영합하여 부락部落을 안치하는 논의를 처리할 적에 위징만이 홀로 어찌 여러 사람들의 정견에 대해 달리할 수 있었겠는가.
마침내 번추蕃酋(변방 추장)들을 금위禁衛에 끼어들게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장안長安에 들어와 사는 자가 1만 가구에 가까웠으니,
이는 육혼의 융족을 이수‧낙수에 살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앞의 일은 성주成周의 쇠퇴한 때이고, 뒤의 일은 당唐나라의 성대한 때였다.
태종이 위징의 말을 따르기에 즐거워했는데, 어찌 유독 이것만은 따르지 않았던 것인가.
뒷날 안녹산安祿山이 궁궐을 어지럽혔으니, 어찌 태종의 남긴 계책이 열어준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