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二年에 將葬故息隱王建成과 海陵王元吉할새 尙書右丞魏徵與黃門侍郎王珪가 請預陪送하고 上表曰
臣等
이 昔受命太上
하여 東宮
하여 出入龍樓
가 垂將一紀
니이다
臣等
이 不能死亡
하니 甘從夷戮
하고 負其罪戾
로되 注+ 寘錄周行:行, 音杭.하니 徒竭生涯
注+ 徒竭生涯:涯, 音牙.나 將何上報
리잇가
陛下德光四海
하시고 道冠前王
注+ 道冠前王:冠, 去聲.하사
하시고 하사 明社稷之大義
하시고 申骨肉之深恩
하사 卜葬二王
하사 이시니이다
臣等
이 永惟疇昔
컨대 忝曰舊臣
이니 喪君有君
하여 雖展事君之禮
나 하되 未申送往之哀
니이다
瞻望九原컨대 義深凡百하니 望於葬日에 送至墓所하소서
太宗
이 義而許之
라 於是
에 宮府舊僚吏
가 盡令送葬
注+ 於是……盡令送葬:令, 平聲.하다
注
【集論】愚按 王珪魏徵이 請送息隱海陵之喪할새 太宗이 義而許之하니 二子는 可謂篤於義矣라
珪徵은 名臣也어늘 詎容輕議哉리오마는 自有文公朱子之論斷在焉이라
昔에 管仲이 不死於子糾하고 而相桓公이러니 子貢子路가 以問夫子한대 夫子稱其功이라
引程子之言
하여 因論管仲
하고 而及於王珪魏徵之事
하니
朱子謂管仲은 有功而無罪라 故聖人獨稱其功이요 王魏는 先有罪而後有功하니 則不以相掩이 可也라하니
정관貞觀 2년(628)에 고故 식은왕息隱王 이건성李建成과 해릉왕海陵王 이원길李元吉을 장례 치르려 할 때 상서우승尙書右丞 위징魏徵이 황문시랑黃門侍郎 왕규王珪와 함께 장례 전송행사에 참석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고 표문表文을 올렸다.
“신들이 지난날 태상왕太上王(이연李淵)께 명을 받아 동궁東宮에서 임무를 집행하며 용루龍樓(동궁東宮)를 드나든 지가 거의 12년에 가깝습니다.
전궁前宮(이건성李建成)이 종사宗社에 반란을 꾀하여 백성과 신령께 죄를 얻었을 때
신들이 함께 죽지 못했으니, 죽임당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그 죄과를 짊어져야 함에도 조정 벼슬에 두어 녹용하셨으니
注+행行은 음이 항杭이다., 일생을 다 바친다 해도
注+애涯는 음音이 아牙이다. 무엇으로 이를 다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덕이
사해四海에 빛나고
도道가 지난 왕들보다 높으셔서
注+관冠(으뜸가다)은 거성去聲이다.
언덕에 올라 형님을 그리워하시고 당체棠棣의 형제 생각을 다시 떠올리시며 사직社稷의 대의大義를 밝히고 골육骨肉의 깊은 은혜를 펼치시어 두 분의 왕을 장례 치를 날을 멀리 잡아 정하셨습니다.
신들은 지난날을 떠올리면 구신舊臣이라 할 수 있는데, 군주를 잃었다가 다시 새 군주를 모셔 비록 군주를 섬기는 예를 거행했으나, 무덤에 묵은 풀이 자랐음에도 장송葬送의 슬픔을 펴지 못했습니다.
장지를 우러러보면 그 의리가 한없이 깊사오니 장례 치르는 날에 묘소까지 전송할 수 있게 하소서.”
태종이 이를 의롭게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궁부宮府의 옛 관리들이 모두 장례 전송행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이 식은왕息隱王과 해릉왕海陵王의 장례 행사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태종太宗이 의롭게 여겨 허락했으니, 두 사람은 의리가 돈독하다 할 만하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리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해야 한다.” 라고 했으니,
왕규와 위징은 명신名臣인데 어떻게 가볍게 논할 수 있으랴만, 여기엔 문공文公 주자朱子(주희朱熹)의 논단論斷이 있다.
옛날 관중管仲이 자규子糾를 위해 죽지 않고 환공桓公을 도운 일이 있는데, 자공子貢과 자로子路가 관중에 대해 공자孔子에게 묻자 부자가 그 공로만을 칭찬했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며 관중을 논하고 왕규와 위징의 일까지 언급했는데,
주자가 “관중은 공이 있으면서 죄가 없었으므로 성인聖人이 다만 그 공로를 칭찬한 것이며, 왕규와 위징은 앞서 죄가 있고 뒤에 공로가 있었으니 엄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