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령房玄齡은 스스로注+순舜임금이 우禹를 백규百揆의 자리에 앉혔으니, 단규端揆는 재상의 직위이다. 15년 동안 계속 재상의 지위에 있었다고 하여 여러 차례 표문表文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태종은 그를 우대하는 조서를 내리고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관貞觀 16년(642)에 승진해서 사공司空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司空이 삼공三公이니, 천자天子를 보좌하여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여 총괄하지 않는 것이 없다.에 임명되어 그대로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였고, 예전처럼 감수국사監修國史를 맡았다.
방현령이 다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태종太宗이 사람을 보내어注+〈사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말하기를 “나라에서 오랫동안 재상으로 임용하였는데注+상相(재상)은 본래 음의音義대로 독해한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훌륭한 재상이 없게 된다면注+조朝(아침)는 음이 소昭이다. 마치 두 손을 잃는 것과 같소.
만일 그대의 근력이 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양하는 일로 번거롭게 하지 말고, 스스로 쇠약해짐을 느끼면 다시 주청을 하시오.”라고 하니, 방현령이 마침내 중지하였다.注+사전史傳을 살펴보건대 “방현령房玄齡이 표문表文을 올려 사직을 아뢰니 태종太宗이 사신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유후留侯(張良)가 지위를 사양하고 두융竇融이 영화로움을 사양한 것은 스스로 분수에 넘치게 될까 두려워한 것이니, 나아가면 물러날 줄을 알고 잘한 일에는 스스로 그쳐 만족한 것을 이전 시대에서 아름답게 여겼소. 공 역시 과거 현인들과 자취를 동일하게 하려고 하니 참으로 가상하오. 그러나 국가에서 오랫동안 재상으로 임용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훌륭한 재상이 없게 된다면 마치 두 손을 잃는 것과 같소.’라고 하니, 방현령이 마침내 중지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2留侯 :
漢 高祖의 공신 張良의 봉호이다. 字는 子房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韓나라의 大臣이었는데, 秦나라에 의해 漢나라가 망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力士를 시켜 철퇴로 秦 始皇을 저격했으나 실패하였다. 뒤에 한 고조를 도와 끝내 秦나라를 멸망시키고 漢나라를 건국하게 한 후 은퇴하였다.
역주3竇融 :
漢나라 말기 서북 변경 지역의 장수이다. 字는 周公이다. 王莽이 망하자 後漢 光武帝에게 귀순하여 安豊侯에 봉해졌다. 그 후 벼슬이 大司空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