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欲自照면 必須明鏡하고 主欲知過면 必藉忠臣이니
主若自賢하고 臣不匡正이면 欲不危敗나 豈可得乎아
至於隋煬帝暴虐
하여는 臣下鉗口
注+鉗, 巨淹切.하여 卒令不聞其過
注+卒, 子聿切. 令, 平聲.하여 遂至滅亡
하고 虞世基等
도 尋亦誅死
라
前事不遠하니 公等은 每看事有不利於人이어든 必須極言規諫하라하다
【集論】愚按 太宗之求諫이 可謂切矣요 而其納諫도 亦可以爲難矣라
非惟能容人之諫이라 又導人而使之諫이요 非惟不怒人之諫이라 又賞人而使之諫이라
故一時之臣
이 非特大臣能諫
이라 小臣如
도 無不諫也
요 非特內臣能諫
이라 外臣如
도 無不諫也
며 非特文臣能諫
이라 武臣如
도 亦無不諫也
며 非特廷臣能諫
이라 宮妾如
도 亦無不諫也
라
賢臣而能諫
은 固也
나 佞臣如
도 亦諫焉
하고 中國之臣
이 能諫
은 固也
나 夷狄之臣如
도 亦諫焉
하니 蓋自三代而下
로 求諫之誠
과 納諫之美
가 未能或之先也
라
觀其貞觀之初하면 自以威容儼肅이라 故嘗假人以顔色하고 深鑑煬帝滅亡이라 故嘗求人使諫諍하다
夫能鑑隋之亡하니 則內有樂諫之實하고 假人以色하니 則外無拒諫之容이라
故能化及一時
하여 大小咸諫
하니 雖古昔
之盛
도 無以加焉
이니
정관貞觀 초기(626)에 일찍이 공경들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자신을 비추려면 반드시 밝은 거울을 필요로 하고, 군주가 과오를 알려면 반드시 충신에게 의지해야 하오.
군주가 만약 스스로 잘난 체하고 신하가 바로잡아주지 않는다면 위태롭고 실패하지 않으려 해도 어찌 가능하겠소.
그래서 군주가 국가를 잃으면 신하 또한 혼자 자신의 집안을 보전할 수 없소.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포학할 때에는 신하들이 입을 다물어서
注+겸鉗(다물게 하다)은 거巨와 엄淹의 반절이다. 결국 자신의 과오를 듣지 못하게 되어
注+졸卒(마침내)은 자子와 율聿의 반절이다. 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고
우세기虞世基 등도 곧이어 죽임을 당했소.
지난 일이 오래되지 않았으니 공들은 늘 백성들에게 이롭지 않은 일을 볼 때마다 반드시 극구 간언하시오.”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간언을 구하는 태도는 절실하다고 할 수 있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 그들을 유도해서 간언하도록 하고, 사람들의 간언에 노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그들에게 상을 주어 간언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당시 신하들은 대신만 간언을 할 뿐만 아니라 황보덕참皇甫德參 같은 소신小臣도 모두 간언을 하고, 내직의 신하만 간언을 할 뿐만 아니라 이대량李大亮 같은 외직의 신하도 모두 간언을 하고, 문신만 간언을 할 뿐만 아니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무신도 모두 간언을 하고, 조정의 신하만 간언을 할 뿐만 아니라 충용充容 서혜徐惠 같은 후궁도 모두 간언을 하였다.
어진 신하가 간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배구裴矩 같이 아첨하는 신하도 간언을 하였고, 중국의 신하가 간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걸필하력契苾何力 같은 오랑캐 신하도 간언을 했으니, 삼대三代 이후로 간언을 구하는 정성과 간언을 받아들이는 미덕이 아마 이보다 앞선 경우는 없을 것이다.
정관貞觀 초기의 모습을 살펴보면, 스스로 위용이 엄숙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얼굴로 대하고, 수隋 양제煬帝의 멸망을 크게 거울로 삼았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들에게 간쟁하기를 구했다.
수隋나라의 멸망을 거울로 삼았으니 마음속에 간언을 즐거워하는 진실이 있고,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얼굴로 대하였으니 겉모습에 간언을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교화가 그 시대에 미쳐서 크고 작은 신하들이 모두 간언을 했으니, 비록 옛날 비방목誹謗木과 진선정進善旌을 세우는 성대함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초년初年의 두 가지(求諫과 납간納諫)가 실로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일 것이다.
사신史臣이 이를 〈논구간論求諫〉의 맨 앞에 배치한 것은 아마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