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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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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初 嘗謂公卿曰
人欲自照 必須明鏡하고 主欲知過 必藉忠臣이니
主若自賢하고 臣不匡正이면 欲不危敗 豈可得乎
故君失其國이면 臣亦不能獨全其家
至於隋煬帝暴虐하여는 臣下鉗口注+鉗, 巨淹切.하여 卒令不聞其過注+卒, 子聿切. 令, 平聲.하여 遂至滅亡하고 虞世基等 尋亦誅死
前事不遠하니 公等 每看事有不利於人이어든 必須極言規諫하라하다
【集論】愚按 太宗之求諫 可謂切矣 而其納諫 亦可以爲難矣
非惟能容人之諫이라 又導人而使之諫이요 非惟不怒人之諫이라 又賞人而使之諫이라
故一時之臣 非特大臣能諫이라 小臣如 無不諫也 非特內臣能諫이라 外臣如 無不諫也 非特文臣能諫이라 武臣如 亦無不諫也 非特廷臣能諫이라 宮妾如 亦無不諫也
賢臣而能諫 固也 佞臣如 亦諫焉하고 中國之臣 能諫 固也 夷狄之臣如 亦諫焉하니 蓋自三代而下 求諫之誠 納諫之美 未能或之先也
觀其貞觀之初하면 自以威容儼肅이라 故嘗假人以顔色하고 深鑑煬帝滅亡이라 故嘗求人使諫諍하다
夫能鑑隋之亡하니 則內有樂諫之實하고 假人以色하니 則外無拒諫之容이라
故能化及一時하여 大小咸諫하니 雖古昔之盛 無以加焉이니
蓋由初年二者 實有以感召之也
史臣 置此於求諫之首 其有深意哉인저


정관貞觀 초기(626)에 일찍이 공경들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자신을 비추려면 반드시 밝은 거울을 필요로 하고, 군주가 과오를 알려면 반드시 충신에게 의지해야 하오.
군주가 만약 스스로 잘난 체하고 신하가 바로잡아주지 않는다면 위태롭고 실패하지 않으려 해도 어찌 가능하겠소.
그래서 군주가 국가를 잃으면 신하 또한 혼자 자신의 집안을 보전할 수 없소.
나라 양제煬帝가 포학할 때에는 신하들이 입을 다물어서注+(다물게 하다)은 의 반절이다. 결국 자신의 과오를 듣지 못하게 되어注+(마침내)은 의 반절이다. (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고 우세기虞世基 등도 곧이어 죽임을 당했소.
지난 일이 오래되지 않았으니 공들은 늘 백성들에게 이롭지 않은 일을 볼 때마다 반드시 극구 간언하시오.”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간언을 구하는 태도는 절실하다고 할 수 있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 그들을 유도해서 간언하도록 하고, 사람들의 간언에 노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그들에게 상을 주어 간언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당시 신하들은 대신만 간언을 할 뿐만 아니라 황보덕참皇甫德參 같은 소신小臣도 모두 간언을 하고, 내직의 신하만 간언을 할 뿐만 아니라 이대량李大亮 같은 외직의 신하도 모두 간언을 하고, 문신만 간언을 할 뿐만 아니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무신도 모두 간언을 하고, 조정의 신하만 간언을 할 뿐만 아니라 충용充容 서혜徐惠 같은 후궁도 모두 간언을 하였다.
어진 신하가 간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배구裴矩 같이 아첨하는 신하도 간언을 하였고, 중국의 신하가 간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걸필하력契苾何力 같은 오랑캐 신하도 간언을 했으니, 삼대三代 이후로 간언을 구하는 정성과 간언을 받아들이는 미덕이 아마 이보다 앞선 경우는 없을 것이다.
정관貞觀 초기의 모습을 살펴보면, 스스로 위용이 엄숙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얼굴로 대하고, 양제煬帝의 멸망을 크게 거울로 삼았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들에게 간쟁하기를 구했다.
나라의 멸망을 거울로 삼았으니 마음속에 간언을 즐거워하는 진실이 있고,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얼굴로 대하였으니 겉모습에 간언을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교화가 그 시대에 미쳐서 크고 작은 신하들이 모두 간언을 했으니, 비록 옛날 비방목誹謗木진선정進善旌을 세우는 성대함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초년初年의 두 가지(求諫과 납간納諫)가 실로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일 것이다.
사신史臣이 이를 〈논구간論求諫〉의 맨 앞에 배치한 것은 아마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皇甫德參 : 貞觀 초기에 中牟縣丞을 역임한 말단 관리이다. 唐 太宗이 洛陽宮을 건립하기 위해 수만 명을 동원하려 하자, 이를 적극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太宗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처벌의 위기에 몰렸으나 정직한 신하의 간언이라는 魏徵의 건의를 받아들여 풀려났다. 《新唐書 魏徵列傳》
역주2 李大亮 : 586~644. 京兆 涇陽 출신이다. 唐나라의 개국공신으로, 唐나라 초기에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唐 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땐 長安에 주둔하여 房玄齡을 돕도록 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당 태종이 통곡해 마지않았다. 《舊唐書 李大亮列傳》
역주3 尉遲敬德 : 585~658. 이름은 恭, 敬德은 字이다. 唐나라의 명장으로 右武侯大將軍을 역임하고 鄂國公에 책봉됐다. 凌煙閣 24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역주4 充容 : 唐宋시대 후궁의 명칭이다. 제12의 지위로 재상과 동급이며 九嬪에 속한다. 九嬪은 順儀‧順容‧順華‧修儀‧修容‧修華‧充儀‧充容‧充華이다.
역주5 徐惠 : 627~650. 唐 太宗의 妃嬪이다. 貞觀 말기에 당 태종이 곧잘 정벌에 나서고 궁궐 확장에 힘을 쏟는 것을 보고 그 폐해를 지적하자 태종에게 바른말을 한다는 호평과 함께 후한 상을 받았다. 태종이 죽자 식음을 전폐한 채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新唐書 后妃列傳 上》
역주6 裴矩 : 547~627. 字는 弘大이며 河東(山西) 聞喜 출신이다. 隋나라와 唐나라에서 모두 신임을 받아 높은 관직을 역임한 사람으로, 뛰어난 정치가이자 전략가이다. 《舊唐書 裴矩列傳》
역주7 契苾何力 : ?~677. 본래 鐵勒族 契苾部 출신인데 뒤에 唐나라에 귀의하여 고구려 정벌에도 참여하는 등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新唐書 契苾何力列傳》
역주8 謗木諫旌 : 誹謗木과 進善旌이다. 堯舜 시대에 정사의 잘잘못을 비판하기 위해 세운 나무와 기이다. 《大戴禮記》 〈保傅〉에 “進善旍과 誹謗木이 있었다.[有進善之旍 有誹謗之木]”라고 하였고, 盧辯의 注에 “진선정은 堯임금이 설치하여 선행을 진어하려는 자를 그 기 아래에 서게 하였고, 비방목은 요임금이 설치하여 정무의 잘못을 기록하게 하였다.[旍堯置之 令進善者立於旍下也 木堯置之 使書政之愆失也]”라고 하였다.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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