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三年
에 太子少師
注+ 太子少師:少, 去聲.李綱
注+ 太子少師李綱:李綱, 字文紀, 觀州人. 始名瑗, 慕爲人改焉. 仕隋爲太子洗馬, 擢尙書右丞. 隋末, 賊帥何潘仁劫爲長史, 高祖平京師, 綱上謁. 旣受禪, 拜禮部尙書太子詹事, 諫建成不聽, 遂乞骸骨. 貞觀初拜是職, 五年卒, 諡曰貞.이 有脚疾
하여 不堪踐履
어늘
太宗
이 賜步輿
하여 令三衛
로 擧入東宮
注+ 令三衛擧入東宮:令, 平聲. 唐制東宮, 分爲上中下三等, 掌宿衛之事, 是爲三衛.하고 詔皇太子
하여 引上殿親拜之
하여 大見崇重
이라
綱爲太子
注+ 綱爲太子:爲, 去聲.陳君臣父子之道
와 之方
注+ 問寢侍膳之方:見封建篇註.할새 理順辭直
하니 聽者忘倦
이러라
綱懍然曰
注+ 綱懍然曰:懍, 音凜, 嚴毅貌.託六尺之孤
하며 寄百里之命
注+ 託六尺之孤寄百里之命:論語曾子之言, 謂輔幼君, 攝國政也.을 古人以爲難
이로되 綱以爲易
注+ 綱以爲易:易, 以豉切.하노이다
每吐論發言에 皆辭色慷慨하여 有不可奪之志하니 太子未嘗不聳然禮敬하다
注
太宗卽位之後에 蚤建太子하여 以固天下之本하고 而嚴太子尊敬師傅之禮하여 稽之古典하니 允合其宜라
李綱少慷慨하고 有風節이라 故其發言吐論에 辭色毅然하니 宜皇儲之所禮敬也라
정관貞觀 3년(629)에
태자소사太子少師注+소少는 거성去聲(적다)이다. 이강李綱注+이강李綱은 자字가 문기文紀이며 관주觀州 사람이다. 처음 이름은 원瑗이었는데, 장강張綱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수隋나라에서 벼슬하여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었고, 상서우승尙書右丞에 발탁되었다. 수隋나라 말기에 적의 장군 하반인何潘仁이 겁박하여 장사長史가 되었다가 당 고조唐 高祖가 경사京師를 평정하자 이강이 찾아가 뵈었다. 고조가 선양을 받고 나서는 예부상서禮部尙書와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제수되었는데, 이건성李建成에게 간언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결국 벼슬에서 물러났다. 정관 초년에 이 직위에 제수되었고, 5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정貞이다.이 다리에 병이 생겨 걷기가 힘들게 되었는데,
태종이
보여步輿(가마)를 하사하여
삼위三衛에게 들어서
동궁東宮으로 들이도록 하고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당唐 제도에 동궁육솔부東宮六率府가 있어 상上‧중中‧하下 3등等으로 나누고 숙위宿衛의 일을 담당하였는데 이것이 삼위三衛이다.,
황태자皇太子에게 명하여
소사少師를 부축하여 전각에 오르도록 하여 직접 배알하게 하였으니, 매우 존숭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강은 태자를 위하여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군신과 부자의 도리와 부황의 취침 문안과 음식을 맛보는 방법에 대해
注+〈봉건封建〉편의 주註에 보인다. 설명하였는데, 이치에 맞고 올바른 말이라서 듣는 사람이 피로함을 잊었다.
태자는 일찍이 옛날부터 전해오는 군신간의 명교名敎와 충절忠節을 다하는 것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이강이 엄정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注+름懍은 음이 늠凜이니, 엄하고 굳센 모습니다. “어린 군주를 맡기며 국정을 위임하는 것을
注+《논어論語》 〈태백泰伯〉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로 어린 군주를 보좌하고 국정國政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들은 어려운 일이라 여겼지만 저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注+역易(쉽다)는 이以와 시豉의 반절이다.
항상 논의를 하거나 말할 때에는 모두 말투와 표정이 격앙되어 있어 굳은 의지를 빼앗을 수 없었으니, 태자가 예의와 공경을 경건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세자世子는 왕에 다음가는 사람으로, 천하의 근본이니,
태종이 즉위한 뒤에 일찍 태자太子를 세워 천하의 근본을 굳건히 하고 태자가 사부를 존경하는 예를 엄하게 하여 고전古典에 상고하였으니, 진실로 도리에 합당한 일이다.
이강이 젊어서부터 강개하고 절조節操의 풍모가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하고 논의를 할 적에 말투와 기색이 엄정하였으니, 황태자가 예의를 갖추고 존경한 것이 마땅하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마음으로 백 명의 군주를 섬길 수 있다.” 라고 하였으니, 이강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