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之情이 豈不欲常相見耶리오마는 但家國事殊하니 須出作藩屛이요
且令其早有定分
注+ 且令其早有定分:令, 平聲. 分, 去聲, 凡言定分竝同.하여 絶覬覦之心
하여 我百年後
에 使其兄弟
로 無危亡之患也
注+ 我百年後……無危亡之患也:按 “恪初王欝林, 貞觀十年始改王吳, 授安州都督, 帝賜書曰 ‘汝惟茂親, 勉思所以藩王室, 以義制事, 以禮制心. 外爲之君臣, 內爲之父子. 今當去膝下, 不遺汝珍, 而遺汝以言, 其念之哉.’ 帝後以晉王爲太子, 又欲立恪, 長孫無忌固爭. 帝曰 ‘公豈以非己甥耶. 且恪英果類我.’ 無忌曰 ‘晉王仁厚, 守文之良主, 且擧棊不定則敗, 況儲位乎.’ 帝乃止.”하노라
注
【集論】愚按 是時
에 方處東宮
하여 凶德未著
에 太宗出吳王
하여 使居藩屛
하여 欲其早有定分
하니 可謂處之盡其道矣
라
其後旣立晉王하고 又欲立恪하여 卒陷恪於死地하니 何始終之矛盾耶아
竊嘗論之
컨대 와 唐太宗之欲易高宗
은 皆爲宗廟社稷之遠圖
니 初不可以尋常嫡庶之禮槩論之也
라
合二君之事而觀之면 則太宗之事가 近正하니 何也오
其欲立趙王은 則出於溺愛之私矣라 子房之不立如意가 是也라
故以社稷大計問之無忌어늘 無忌外雖爲正大之論이나 內實懷外家之私하여
夫以恪之英才
로 幸而嗣聖之際
에 尙存庶幾匡正唐室
이런들 가 如此其烈也
니 豈不悲哉
아
然則太宗之事가 賢於高祖이요 無忌之心은 則眞子房之罪人矣라
정관貞觀 7년(633)에 오왕吳王 이각李恪을 제주도독齊州都督에 제수하고 태종은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부자간의 정이 어찌 항상 서로 보기를 원하지 않겠소. 다만 집과 나라의 일은 별개일 뿐이니, 그에게 변방을 지키게 하는 것이고,
또 일찍부터 분수를 정해주어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분分(분수)은 거성去聲이니, 정분定分이라 말한 곳은 모두 같다. 자리를 넘보려는 마음을 끊도록 하여, 내가 죽은 뒤에 그 형제들이 위태롭고 망하게 되는 근심을 없게 하려는 것이오.”
注+사전史傳을 살펴보건대 “이각李恪은 과거에 울림왕欝林王이었다가 정관貞觀 10년(636)에 처음 오왕吳王으로 봉호가 바뀌었고, 안주도독安州都督에 임명되었는데, 태종太宗이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아름다운 종친이니 왕실을 번성하게 할 방법을 힘써 생각하여 의義로 일을 다스리고, 예禮로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밖으로는 군신君臣 관계가 되고 안으로는 부자父子 관계가 되는데, 지금 내 품을 떠나게 되어 너에게 보배를 주지 않고 이 말을 너에게 내려주니 명심해야 할 것이다.’ 태종이 뒤에 진왕晉王(이치李治, 후일 고종高宗)을 태자로 삼을 적에 또 이각李恪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는데, 장손무기長孫無忌가 극력 반대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공公은 어찌 자신의 생질이 아닌 자로 하려 하오? 또 이각李恪은 영민함과 과단성이 나를 닮았소.’라고 하자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진왕晉王은 인자하고 온후하여 문치文治를 지키는 어진 군주입니다. 또 바둑돌을 들고 갈팡질팡하면 패배하는 법인데, 하물며 태자를 정하는 일이겠습니까?’라고 하니, 태종이 중지하였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이때 이승건李承乾이 막 동궁東宮에 거처하여 흉악한 덕이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 태종이 오왕吳王을 내보내 번병藩屛에 거처하게 하여 일찍 분수를 정해주려 하였으니, 일을 다스리는 데 그 도道를 다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 후에 진왕晉王을 태자로 세우고 나서 또 이각李恪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결국 이각李恪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도 시종始終이 그리 모순되는가.
일찍이 논해보건대 한 고조漢 高祖가 혜제惠帝를 바꾸어 세우려고 한 일과 당 태종唐 太宗이 고종高宗을 바꾸어 세우려고 한 일은 모두 종묘사직을 위한 원대한 계획이었으니, 애초에 일상적인 적서嫡庶의 예禮로 대략 논할 수가 없다.
두 군주의 일을 함께 보자면 태종의 일이 정도正道에 가까우니 어째서인가.
조왕趙王을 세우고자 한 것은 편애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자방子房(장량張良)이 여의如意를 세우지 않은 것이 옳다.
그러나 이윽고 사호四皓를 초빙하여 태자를 옹호하여 여씨呂氏의 화를 초래하였다.
두목杜牧이 “사로四老가 유씨劉氏를 평안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유씨劉氏를 멸망하게 하였다.” 고 하였으니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고조가 만약 천하를 크게 경영할 마음을 먹었다면 일찍 장량張良, 진평陳平, 왕릉王陵, 주발周勃과 계획하여 유항劉恒(문제文帝)을 유영劉盈(혜제惠帝)으로 바꾸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오왕吳王 이각李恪이 살아 있을 당시에 안으로는 자신의 어머니가 척희戚姬(한 고조의 총희寵姬)만큼 사사로이 총애받는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이각이
위왕魏王 태泰의
적통嫡統을 빼앗으려는 계획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則天武后
태종은 고종이 나약하여 종묘의 중대한 일을 받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므로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장손무기에 물은 것인데, 장손무기는 겉으로 비록 정대正大한 논의를 폈지만 실제 속으로는 태자의 외가外家로서 사심을 두어
그 후에 결국 무고로 이각을 죽음에 몰아넣었으니, 장손무기의 죄는 위로 하늘까지 통한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이각이 제위를 계승할 즈음에 여전히 살아남아서 행여 당나라 왕실을 바로잡았다면 암탉이 우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재앙이 이처럼 혹독하게 초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그렇다면 태종의 일이 고조의 일보다는 나은 것이고, 장손무기의 마음은 참으로 자방의 죄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