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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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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七年齊州都督하고 太宗謂侍臣曰
父子之情 豈不欲常相見耶리오마는 但家國事殊하니 須出作藩屛이요
且令其早有定分注+ 且令其早有定分:令, 平聲. 分, 去聲, 凡言定分竝同.하여 絶覬覦之心하여 我百年後 使其兄弟 無危亡之患也注+ 我百年後……無危亡之患也:按 “恪初王欝林, 貞觀十年始改王吳, 授安州都督, 帝賜書曰 ‘汝惟茂親, 勉思所以藩王室, 以義制事, 以禮制心. 外爲之君臣, 內爲之父子. 今當去膝下, 不遺汝珍, 而遺汝以言, 其念之哉.’ 帝後以晉王爲太子, 又欲立恪, 長孫無忌固爭. 帝曰 ‘公豈以非己甥耶. 且恪英果類我.’ 無忌曰 ‘晉王仁厚, 守文之良主, 且擧棊不定則敗, 況儲位乎.’ 帝乃止.”하노라
【集論】愚按 是時 方處東宮하여 凶德未著 太宗出吳王하여 使居藩屛하여 欲其早有定分하니 可謂處之盡其道矣
其後旣立晉王하고 又欲立恪하여 卒陷恪於死地하니 何始終之矛盾耶
竊嘗論之컨대 唐太宗之欲易高宗 皆爲宗廟社稷之遠圖 初不可以尋常嫡庶之禮槩論之也
合二君之事而觀之 則太宗之事 近正하니 何也
漢高祖之欲易太子 是也
其欲立趙王 則出於溺愛之私矣 子房之不立如意 是也
然遂引致四皓하여 擁護太子하여 以成하니
杜牧所謂라하니 其可不寒心哉
若吳王恪之在當時 內不聞其母有戚姬嬖愛之私하고
外不聞恪有奪嫡之計
太宗深知高宗之懦弱하여 不足以承宗廟之重이라
故以社稷大計問之無忌어늘 無忌外雖爲正大之論이나 內實懷外家之私하여
其後卒以無辜陷恪死地하니 無忌之罪上通於天矣
夫以恪之英才 幸而嗣聖之際 尙存庶幾匡正唐室이런들 如此其烈也 豈不悲哉
然則太宗之事 賢於高祖이요 無忌之心 則眞子房之罪人矣


정관貞觀 7년(633)에 오왕吳王 이각李恪제주도독齊州都督에 제수하고 태종은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부자간의 정이 어찌 항상 서로 보기를 원하지 않겠소. 다만 집과 나라의 일은 별개일 뿐이니, 그에게 변방을 지키게 하는 것이고,
또 일찍부터 분수를 정해주어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분수)은 거성去聲이니, 정분定分이라 말한 곳은 모두 같다. 자리를 넘보려는 마음을 끊도록 하여, 내가 죽은 뒤에 그 형제들이 위태롭고 망하게 되는 근심을 없게 하려는 것이오.”注+사전史傳을 살펴보건대 “이각李恪은 과거에 울림왕欝林王이었다가 정관貞觀 10년(636)에 처음 오왕吳王으로 봉호가 바뀌었고, 안주도독安州都督에 임명되었는데, 태종太宗이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아름다운 종친이니 왕실을 번성하게 할 방법을 힘써 생각하여 로 일을 다스리고, 로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밖으로는 군신君臣 관계가 되고 안으로는 부자父子 관계가 되는데, 지금 내 품을 떠나게 되어 너에게 보배를 주지 않고 이 말을 너에게 내려주니 명심해야 할 것이다.’ 태종이 뒤에 진왕晉王(이치李治, 후일 고종高宗)을 태자로 삼을 적에 또 이각李恪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는데, 장손무기長孫無忌가 극력 반대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은 어찌 자신의 생질이 아닌 자로 하려 하오? 또 이각李恪은 영민함과 과단성이 나를 닮았소.’라고 하자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진왕晉王은 인자하고 온후하여 문치文治를 지키는 어진 군주입니다. 또 바둑돌을 들고 갈팡질팡하면 패배하는 법인데, 하물며 태자를 정하는 일이겠습니까?’라고 하니, 태종이 중지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때 이승건李承乾이 막 동궁東宮에 거처하여 흉악한 덕이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 태종이 오왕吳王을 내보내 번병藩屛에 거처하게 하여 일찍 분수를 정해주려 하였으니, 일을 다스리는 데 그 를 다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 후에 진왕晉王을 태자로 세우고 나서 또 이각李恪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결국 이각李恪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도 시종始終이 그리 모순되는가.
일찍이 논해보건대 한 고조漢 高祖혜제惠帝를 바꾸어 세우려고 한 일과 당 태종唐 太宗고종高宗을 바꾸어 세우려고 한 일은 모두 종묘사직을 위한 원대한 계획이었으니, 애초에 일상적인 적서嫡庶로 대략 논할 수가 없다.
두 군주의 일을 함께 보자면 태종의 일이 정도正道에 가까우니 어째서인가.
한 고조가 태자를 바꾸려고 한 일이 옳으나
조왕趙王을 세우고자 한 것은 편애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자방子房(장량張良)이 여의如意를 세우지 않은 것이 옳다.
그러나 이윽고 사호四皓를 초빙하여 태자를 옹호하여 여씨呂氏의 화를 초래하였다.
두목杜牧이 “사로四老유씨劉氏를 평안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유씨劉氏를 멸망하게 하였다.” 고 하였으니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고조가 만약 천하를 크게 경영할 마음을 먹었다면 일찍 장량張良, 진평陳平, 왕릉王陵, 주발周勃과 계획하여 유항劉恒(문제文帝)을 유영劉盈(혜제惠帝)으로 바꾸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오왕吳王 이각李恪이 살아 있을 당시에 안으로는 자신의 어머니가 척희戚姬(한 고조의 총희寵姬)만큼 사사로이 총애받는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이각이 위왕魏王 적통嫡統을 빼앗으려는 계획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則天武后則天武后
태종은 고종이 나약하여 종묘의 중대한 일을 받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므로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장손무기에 물은 것인데, 장손무기는 겉으로 비록 정대正大한 논의를 폈지만 실제 속으로는 태자의 외가外家로서 사심을 두어
그 후에 결국 무고로 이각을 죽음에 몰아넣었으니, 장손무기의 죄는 위로 하늘까지 통한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이각이 제위를 계승할 즈음에 여전히 살아남아서 행여 당나라 왕실을 바로잡았다면 암탉이 우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재앙이 이처럼 혹독하게 초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그렇다면 태종의 일이 고조의 일보다는 나은 것이고, 장손무기의 마음은 참으로 자방의 죄인이라 하겠다.


역주
역주1 吳王恪 : 唐 太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隋 煬帝의 딸 楊妃이다. 文武에 재주가 있었고 처세가 친밀하고 인망이 높아 中外에서 嚮慕하였다. 태종이 당초에 晉王으로 태자를 삼아놓고 이어 李恪으로 바꾸려 하다가, 長孫無忌가 굳이 간하므로 그만두었다. 永徽(당 高宗 연호) 무렵(650~655) 房遺愛의 모반 문서에 이름이 들어 있어 장손무기의 모함을 받아 죽었다. 《新唐書 권80》
역주2 史傳 : 《新唐書》 권80 〈鬱林王恪傳〉에 보인다.
역주3 承乾 : 619~645. 唐 太宗의 아들로, 太子가 되었으나 형제간의 불화로 모반을 일으켰다가 죽었다.
역주4 漢高祖之欲易惠帝 : 漢 高祖가 당시 太子로 있던 惠帝 대신에 戚夫人의 소생인 趙王 劉如意를 태자로 삼으려 하자, 당시에 80여 세의 나이로 商山에 숨어 살던 네 명의 은자, 즉 四皓가 張良의 권유를 받고 조정에 나와서 태자를 보필하며 고조의 계획을 무산시킨 결과 혜제가 태자로 계속 있다가 등극하였다. 四皓는 東園公‧綺里季‧甪里先生‧夏黃公으로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어 四皓라 한다. 《史記 권55 留侯世家》
역주5 呂氏之禍 : 漢 高祖가 죽은 뒤에 고조의 황후인 呂雉 친정 가족들이 일망타진된 재앙을 말한다. 漢 高祖 이후 呂雉가 국정을 다스리고 그녀의 조카인 呂産‧呂祿 등 여씨를 대대적으로 끌어들여 그 세력이 강대하였으나 여후가 죽고 난 뒤 周勃 등이 여씨 일파를 대부분 주살하였다. 《史記 권9 呂太后本紀》
역주6 四老安劉 反爲滅劉 : 《御定全唐詩》 권523 杜牧의 〈題商山四皓廟一絶〉에 “四老安劉是滅劉”라고 하였다.
역주7 若能以天下大計爲心……可也 : 《楚詞後語》 권1 〈鴻鵠歌〉에 보인다. 恒은 漢나라의 3대 황제인 孝文帝 劉恒이고, 盈은 한나라의 2대 황제인 惠帝 劉盈이다.
역주8 魏王 : 唐 太宗의 넷째 아들 李泰의 封王號이다. 貞觀 17년(643)에 太子 李承乾이 謀反하자 李泰는 嫡統을 빼앗으려 한다는 혐의를 받아 외방 均州로 내쫓겼고 濮王으로 바뀌어 永徽 3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舊唐書 권76 濮王泰傳》
역주9 不致牝晨之禍 : 牝晨은 牝鷄之晨의 생략인데 암탉이 새벽에 운다는 뜻으로, 이는 여자가 바깥일을 간섭함을 비유한 것으로 상서롭지 못한 징조를 말한다. 본문에서는 高宗이 무능하여 則天武后가 권력을 장악하여 황제가 된 일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에 대해 음양이 도치된 것이어서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였다. 《書經》 〈周書 牧誓〉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말아야 한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雞無晨 牝雞之晨 惟家之索]”에 의거한 것이다.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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