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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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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太宗 嘗怒苑西監注+掌宮苑之官.穆裕注+穆姓, 裕名.하여 命於朝堂斬之어늘 時高宗爲皇太子注+高宗, 名治. 初封晉王, 十七年, 立爲皇太子.하여 遽犯顔進諫하니 太宗 意乃解
司徒長孫無忌曰
自古太子之諫 或乘間從容而言注+乘, 平聲, 間, 去聲. 從, 即容切.이어늘 今陛下發天威之怒한대 太子申犯顔之諫하니 誠古今未有라한대
太宗曰
夫人久相與處注+夫, 音扶. 處, 上聲.하면 自然染習이라
自朕御天下 虛心正直하여 即有魏徵朝夕進諫하고 自徵云亡으론 劉洎岑文本注+字景仁, 鄧州人. 貞觀初, 除秘書郞, 奏籍田頌, 擢中書舍人, 號善職, 遷侍郞. 十七年, 文本不欲兼東宮官, 乃詔五日一參東宮. 後遷中書令, 卒.馬周褚遂良等 繼之하니
皇太子 幼在朕膝前하여 每見朕心說諫者하고 因染以成性이라 故有今日之諫注+舊本, 此章與前章通爲一章, 今按不同, 分爲二章.이라하다
【集論】愚按 高宗之處東宮也 不惟己能納諫이라 又能諫於其父하니 何其賢哉
及其在位旣久하얀 艶后擅權하고 諫臣結舌한대 하니 其不能納諫 可知矣
夫以一人之身으로 始則能諫이라가 終則拒諫하니 其故何哉
蓋嘗以唐史觀之컨대 高宗以久不聞諫으로 問於李勣한대 勣對曰 陛下所爲盡善하사 無事可諫이니이다하니
嗚呼 高宗 始之能諫 蓋由太宗之德 有以化之 終之拒諫 豈非李勣輩實逢君之惡哉


태종太宗이 일찍이 원서감苑西監注+원서감苑西監은〉 궁원宮苑을 관장하는 관직이다.목유穆裕에게 분노하여注+목유穆裕는〉 이고 가 이름이다.조당朝堂(조정)에서 참수할 것을 명하였는데, 당시 황태자皇太子로 있던 고종高宗注+고종高宗은 이름이 이다. 처음엔 진왕晉王에 책봉되었다가 정관貞觀 17년(643)에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다. 별안간 면전에서 대들며 간언을 올리자, 태종의 마음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사도司徒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말하였다.
“예로부터 태자太子는 이따금 빈틈을 타서 조용하게 간언하였는데注+(틈타다)은 평성平聲이고, (빈틈)은 거성去聲이다. (조용히)은 의 반절이다. 지금 폐하께서 천둥 벼락처럼 진노하셨는데 태자가 면전에서 대들며 간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고금에 없는 일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면注+(대저)는 음이 이고, (처하다)는 상성上聲이다. 저절로 젖어들게 마련이오.
짐이 천하를 다스리면서부터 마음을 비우고 정직한 자세를 보여 위징魏徵이 아침저녁으로 간언을 올렸고, 위징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유계劉洎잠문본岑文本注+잠문본岑文本은〉 경인景仁이니, 등주鄧州 사람이다. 정관貞觀 초기에 비서랑秘書郞에 임명된 뒤 〈적전송籍田頌〉을 상주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에 발탁되었는데, 관직을 잘 수행한다고 이름이 났고, 뒤에 시랑侍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관 17년(643)에 잠문본岑文本동궁東宮의 관직을 겸하고 싶어하지 않자, 조칙을 내려 5일에 한 번 동궁東宮에 참석하라고 했다. 뒤에 중서령中書令으로 자리를 옮긴 뒤 세상을 떠났다.마주馬周저수량褚遂良 등이 이를 계승했소.
황태자가 어려서부터 짐의 무릎 앞에서 짐이 간언한 자를 마음속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에 젖어들어 자신의 습성이 되었으므로 오늘과 같은 간언을 하게 된 것이오.”注+구본舊本에는 이 장이 앞 장과 통틀어 한 장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 살펴보니 내용이 같지 않아 두 장으로 나눴다.
【集論】 내가 살펴보건대, 고종高宗동궁東宮에 있을 때 스스로 간언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 부친에게도 간언을 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가.
그런데 재위한 지 오래되자 염후艶后(則天武后)가 권력을 멋대로 부렸고, 간언하는 신하가 입을 닫자 이선감李善感의 한 마디 말에 ‘봉황새가 조양朝陽해서 울었다.’는 비유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처음에는 간언을 잘하다가 나중에는 간언을 거부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일찍이 나라 역사를 살펴보니, 고종이 오랫동안 간언을 듣지 못한 것을 가지고 이적李勣에게 묻자, 이적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하시는 일마다 모두 훌륭하여 간언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아, 고종이 처음에 간언을 잘한 것은 태종太宗의 덕이 교화시킨 데에 따른 것이나, 나중에 간언을 거부한 것은 어찌 이적 등의 무리가 실로 임금의 악을 유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역주
역주1 李善感一言 至比之鳳鳴朝陽 : 李善感의 과감한 직언이 봉황이 울 듯 빛남을 말한다. 唐나라 韓瑗‧褚遂良이 억울하게 죽었으나, 두려워서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 후 高宗이 奉天宮으로 거둥하였을 때 이선감이 처음으로 상소하여 극언하니, 당시 사람들이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라고 하였다. 조양은 봉황이 깃드는 곳을 가리킨다. 《新唐書 권105 韓瑗列傳》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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