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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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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中 太子承乾 數虧禮度注+ 太子承乾 數虧禮度:數, 音朔.하고 侈縱日甚이어늘
太子左庶子于志寧 撰諫苑二十卷하여 諷之러라
是時 太子右庶子孔穎達注+ 是時 太子右庶子孔穎達:孔穎達, 字仲達, 翼州人. 八歲就學, 日記千餘言, 隋世擧明經高第. 貞觀初, 數進忠言, 爲右庶子. 嘗撰五經義疏, 號爲詳博. 每犯顔進諫커늘
承乾乳母遂安夫人 謂穎達曰 太子長成注+ 太子長成:長, 音掌.이어늘 何宜屢得面折이리오
對曰 蒙國厚恩하여 死無所恨이라하고 諫諍愈切이러라
承乾 令撰注+ 承乾 令撰:令, 平聲.孝經義疏어늘 穎達 又因文見意하여 愈廣規諫之道러라
太宗 竝嘉納之하여 二人 各賜帛五百匹 黃金一斤하여 以勵承乾之意注+ 以勵 承乾之意:按史傳, “.”하다
【集論】愚按 于志寧 撰諫苑하여 以形匡救之益하고 孔頴達 疏經義하여 以廣規諫之道하고
太宗 又賜賚二臣하여 以寓激勵之意하니 君父師友之責 盡矣
是時 承乾雖虧禮侈縱이나 而於文史規誨 猶未咈拒하니
毋亦不難於知而難於行耶


정관貞觀 연간에 태자太子 이승건李承乾이 예절과 법도를 자주 무너뜨리고注+(자주)은 이다. 사치와 방종이 갈수록 심하자,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우지녕于志寧이 《간원諫苑》 20권을 지어 풍간諷諫했다.
당시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 공영달孔穎達注+공영달孔穎達중달仲達이며 익주翼州 사람이다. 8세 때 학문하기 시작하여 하루에 천여 글자의 내용을 외웠으며 나라 때 명경과明經科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다. 정관貞觀 초기에 충직한 말을 자주 진언하여 우서자右庶子가 되었고 일찍이 《오경의소五經義疏》를 찬술했는데 상세하고 해박하다고 호평하였다. 매번 얼굴에 맞대고 간언을 올리자,
이승건의 유모 수안부인遂安夫人이 공영달에게 이르기를 “태자가 다 자랐는데注+(자라다)은 이다. 어찌 자주 면전에서 비평해서야 되겠소.”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국가의 후한 은혜를 입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오.” 라고 하고, 더욱더 절실하게 간언을 올렸다.
이승건이 《효경의소孝經義疏》을 찬술하게 하자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공영달이 그 문장을 통해 의견을 내보이며 올바른 도리로 간언하는 방법을 더욱더 넓혔다.
태종太宗이 모두 가상하게 받아들여 두 사람에게 각각 비단 500필과 황금 1근을 하사하여, 이승건의 뜻을 격려했다.注+살펴보건대, 사서史書에서 “각자에게 비단 100과 황금 10을 하사했다.”고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우지녕于志寧이 《간원諫苑》을 지어 바르게 구제하는 유익함을 나타내고, 공영달孔頴達이 《효경의소孝經義疏》를 지어 바른 도리로 간언하는 길을 넓히고,
태종太宗이 또 두 신하에게 하사품을 내려 격려의 뜻을 내보였으니 임금과 아버지, 스승과 벗의 책임이 극진한 것이다.
당시 이승건李承乾이 비록 예절을 무너뜨리고 사치 방종했지만, 글과 역사의 바른 일깨움에 대해 거역하지 못했으니,
또한 아는 것에 어려워한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에 어려워한 것이 아닌가.


역주
역주1 各賜帛百匹黃金十斤 : 《舊唐書》 권76 〈太宗諸子 恒山王承乾列傳〉에 이 구절이 보인다.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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