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中
에 太子承乾
이 數虧禮度
注+ 太子承乾 數虧禮度:數, 音朔.하고 侈縱日甚
이어늘
是時
에 太子右庶子孔穎達
注+ 是時 太子右庶子孔穎達:孔穎達, 字仲達, 翼州人. 八歲就學, 日記千餘言, 隋世擧明經高第. 貞觀初, 數進忠言, 爲右庶子. 嘗撰五經義疏, 號爲詳博.이 每犯顔進諫
커늘
承乾乳母遂安夫人
이 謂穎達曰 太子長成
注+ 太子長成:長, 音掌.이어늘 何宜屢得面折
이리오
對曰 蒙國厚恩하여 死無所恨이라하고 諫諍愈切이러라
承乾
이 令撰
注+ 承乾 令撰:令, 平聲.孝經義疏
어늘 穎達
이 又因文見意
하여 愈廣規諫之道
러라
太宗
이 竝嘉納之
하여 二人
에 各賜帛五百匹
과 黃金一斤
하여 以勵承乾之意
注+ 以勵 承乾之意:按史傳, “.”하다
注
【集論】愚按 于志寧이 撰諫苑하여 以形匡救之益하고 孔頴達이 疏經義하여 以廣規諫之道하고
太宗이 又賜賚二臣하여 以寓激勵之意하니 君父師友之責이 盡矣라
是時에 承乾雖虧禮侈縱이나 而於文史規誨에 猶未咈拒하니
정관貞觀 연간에
태자太子 이승건李承乾이 예절과 법도를 자주 무너뜨리고
注+수數(자주)은 음音이 삭朔이다. 사치와 방종이 갈수록 심하자,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우지녕于志寧이 《간원諫苑》 20권을 지어 풍간諷諫했다.
당시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 공영달孔穎達이
注+공영달孔穎達은 자字가 중달仲達이며 익주翼州 사람이다. 8세 때 학문하기 시작하여 하루에 천여 글자의 내용을 외웠으며 수隋나라 때 명경과明經科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했다. 정관貞觀 초기에 충직한 말을 자주 진언하여 우서자右庶子가 되었고 일찍이 《오경의소五經義疏》를 찬술했는데 상세하고 해박하다고 호평하였다. 매번 얼굴에 맞대고 간언을 올리자,
이승건의 유모
수안부인遂安夫人이 공영달에게 이르기를 “태자가 다 자랐는데
注+장長(자라다)은 음音이 장掌이다. 어찌 자주 면전에서 비평해서야 되겠소.”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국가의 후한 은혜를 입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오.” 라고 하고, 더욱더 절실하게 간언을 올렸다.
이승건이 《
효경의소孝經義疏》을 찬술하게 하자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공영달이 그 문장을 통해 의견을 내보이며 올바른 도리로 간언하는 방법을 더욱더 넓혔다.
태종太宗이 모두 가상하게 받아들여 두 사람에게 각각 비단 500필과 황금 1근을 하사하여, 이승건의 뜻을 격려했다.
注+살펴보건대, 사서史書에서 “각자에게 비단 100필匹과 황금 10근斤을 하사했다.”고 하였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우지녕于志寧이 《간원諫苑》을 지어 바르게 구제하는 유익함을 나타내고, 공영달孔頴達이 《효경의소孝經義疏》를 지어 바른 도리로 간언하는 길을 넓히고,
태종太宗이 또 두 신하에게 하사품을 내려 격려의 뜻을 내보였으니 임금과 아버지, 스승과 벗의 책임이 극진한 것이다.
당시 이승건李承乾이 비록 예절을 무너뜨리고 사치 방종했지만, 글과 역사의 바른 일깨움에 대해 거역하지 못했으니,
또한 아는 것에 어려워한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에 어려워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