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三年
에 太宗謂司空裴寂
注+字玄眞, 蒲州人. 仕隋爲晉陽宮副監. 秦王方建大計, 未敢白高祖, 以寂最善, 遂以情告之, 寂乃以宮人私侍高祖脅從之. 武德初, 拜僕射, 呼裴監, 不名. 貞觀初, 進拜司空, 後坐罪放靜州. 會羌反, 或言寂爲主, 旣而寂率家僮破羌. 帝念寂, 詔入朝會. 卒, 封河東公.曰
比有
注+比, 音鼻.上書奏事
가 條數甚多
하여 朕總黏之屋壁
하고 出入觀省
注+省, 悉井切.하니 所以孜孜不倦者
는 欲盡臣下之情
이라
每一思政理
에 或三更方寢
注+更, 平聲.하니 亦望公輩用心不倦
하여 以副朕懷也
로다
【集論】愚按 成湯之聖
은 하고 周公之聖
은 하니 經綸萬化
가 皆是心也
라
太宗이 每思政理에 或至三更하여 猶望群臣同心不倦하니 是心也는 坐以待旦之心乎며 夜以繼日之心乎인저
정관貞觀 3년(629)에
태종太宗이
사공司空 배적裴寂注+〈배적裴寂〉은 자字가 현진玄眞이고 포주蒲州 사람이다. 수隋나라에 벼슬하여 진양궁부감晉陽宮副監을 역임했다. 진왕秦王(李世民)이 큰 계책을 세우려 할 때 고조高祖(李淵)에게 감히 아뢰지 못하고 배적이 고조와 가장 친하다는 이유로 사실을 이야기하자, 배적이 진양궁인晉陽宮人에게 사적으로 고조를 모시게 하고 이것으로 고조를 위협하여 진왕의 계책을 따르게 했다. 무덕武德(418~626) 초기에 복야僕射에 임명됐는데 배감裴監이라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정관貞觀 초기에 사공司空에 승진 임명되었는데, 뒤에 범죄에 연루되어 정주靜州로 추방되었다. 그때 강羌이 반란을 일으켜 배적이 주도했다는 말이 돌았는데, 얼마 뒤에 배적이 집안에 딸린 무리들을 이끌고 강羌을 격파했다. 태종太宗이 배적을 생각하여 조칙을 내려 조회에 들어오도록 했다. 세상을 떠난 뒤 하동공河東公에 봉해졌다.에게 말하였다.
“근래
注+비比(근래)는 음이 비鼻이다. 국사를 논하는
상서上書에 조항들이 매우 많아서 짐이 벽에다 모두 붙여놓고 드나들 때마다 살펴보니,
注+성省(살피다)은 실悉과 정井의 반절이다. 이처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하는 이유는 신하들의 마음을 남김없이 알기를 원해서요.
한번 정사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3
경更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기도 하니,
注+경更(밤 시각)은 평성平聲이다. 이 또한 공들이 마음을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짐의 마음에 부응해주기를 바라서요.”
太宗이 상서上書를 벽에 붙이고 드나들며 살피다
【集論】내가 살펴보건대, 성탕成湯 같은 성인聖人은 동이 트면 크게 덕을 밝혀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고, 주공周公 같은 성인은 삼왕三王이 했던 것을 모두 겸하기를 생각하여 밤과 낮을 이어 쉬지 않았으니, 국가의 수많은 일을 경륜하는 것이 모두 이런 마음이었다.
성스럽고 명철하신 왕도 이러했거늘 현명한 제왕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태종太宗이 정사에 대해 생각을 할 때에 혹은 3경까지도 잠을 자지 않아 여러 신하들이 이에 동감을 하여 게으름 피우지 않기를 바랐으니, 이 마음은 〈속히 시행하고 싶어〉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 마음이며,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기를〉 밤낮없이 하는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