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十一年
에 以禮部尙書王珪
로 兼爲魏王師
注+ 兼爲魏王師:唐因隋制, 皇叔昆弟皇子爲親王者置師, 掌傅相訓導, 匡其過失.하고 太宗
이 謂尙書左僕射房玄齡曰
古來帝子는 生於深宮하여 及其成人하여는 無不驕逸이라
是以로 傾覆相踵하여 少能自濟하나니 我今嚴敎子弟하여 欲皆得安全이라
王珪는 我久驅使하여 甚知剛直하고 志存忠孝할새 選爲子師하노니
卿宜語泰하여 每對王珪에 如見我面하여 宜加尊敬이오 不得懈怠하라하다
珪亦以師道自處
注+ 珪亦以師道自處:處, 上聲.하니 時議善之也
러라
注
【集論】胡氏寅曰 爲人師者는 豈徒禮貌云乎哉아 必有道以授人하고 而道以人倫爲至라
魏王泰는 是時承寵偏厚於兄弟間하여 漸生異慮하니 防其微而革其心을 不於師而誰望이리오
而王珪告戒之方과 敎訓之道를 未之聞也하고 魏王卒以窺伺儲位라가 廢斥而死하니
注
愚按 太宗以王珪爲魏王師하고 且諭玄齡以嚴敎之意하니 可謂得人矣라
今泰는 諸王也어늘 使之置館하여 引賓客하여 私權勢하니 其毋乃與所謂嚴敎之意異歟아
정관貞觀 11년(637)에
예부상서禮部尙書 왕규王珪에게
위왕魏王(
이태李泰)의
사師를 겸하게 하고
注+당唐나라는 수隋나라의 제도를 따라 황숙皇叔‧곤제昆弟‧황자皇子로서 친왕親王이 된 자에게는 사師를 두어 보좌하고 훈도하여 과실을 바로잡는 일을 맡게 하였다., 태종이 상서좌복야
방현령房玄齡에게 말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의 아들은 구중궁궐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어서는 교만 방자하지 않은 자가 없었소.
이 때문에 계속해서 잘못되어 스스로 구제한 자가 적었으니, 나는 지금 자제들을 엄히 교육하여 모두가 안전해지기를 바라오.
왕규는 내가 등용한 지가 오래되어 그가 매우 강직하고 충성과 효성의 뜻이 있는 줄 알고 있기에 아들의 사師로 선발한 것이오.
경卿은 이태에게 ‘항상 왕규를 대할 때마다 나를 대면하듯이 하여 마땅히 존경하여 게을리하지 말라.’고 전하시오.”
왕규 역시
사師의 도리로 처신하자
注+처處(처하다)는 상성上聲이다. 당시 평판에 그를 칭찬하였다.
注
호인胡寅이 말하였다.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이 어찌 다만 예의 있는 모습만을 두고 말한 것이겠는가. 반드시 도道를 남에게 전수하고, 인륜人倫으로 인도함을 지극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위왕魏王 이태李泰는 이 당시에 다른 형제들보다 지나치게 총애를 받아 점점 딴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그 기미를 막고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스승이 아니면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왕규가 고하여 경계해준 방법과 가르치고 훈계해준 방도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위왕은 결국 저위儲位를 엿보다가 폐출되어 죽었으니,
어찌 이태에게만 잘못이 있겠는가. 왕규에게도 책임이 있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이 왕규를 위왕의 사師로 삼고 또 방현령에게 엄하게 가르치라는 뜻을 말하였으니, 사람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일찍이 보니 태종이 위왕 이태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것은 참으로 부자간의 정리情理였다.
마침내 명을 내려 위왕부魏王府에 문관文館을 설치하여 스스로 박사博士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소욱蘇勗이 이태에게 빈객들을 초빙하여 옛날의 현왕賢王들처럼 빈객을 초빙하여 책을 만들도록 권하고 《괄지지括地志》를 편찬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선비들 중에 문학文學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고, 귀족들이 이로 인해 그 문하에 의지하여 마치 시장처럼 붐볐다.
이태의 월봉月俸이 또 태자보다 월등히 많았는데, 저수량이 이를 간언하였다.
그 후에 결국 태자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죄를 지어 마침내 유폐 강등되는 죄를 받았다.
무릇 옛날 현왕賢王들이 책을 편찬하던 일을 본받으려면 반드시 하간왕‧동평왕과 같이 해야 옳을 것이다.
더구나 한 무제漢 武帝가 여태자戾太子를 위해 박망원博望苑을 세워주어 빈객들을 드나들게 한 일을 두고 식자들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태는 제왕諸王인데도 문관文館을 두게 하여 빈객을 불러들여 권세를 사사로이 농단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엄하게 교육하겠다’는 뜻과는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