且
라 不得已而用之
하나니 向使高麗
가 違失臣節
하면 而陛下誅之可也
요
侵擾百姓하면 而陛下滅之可也요 久長能爲中國患이면 而陛下除之可也니 有一於此면 雖日殺萬夫라도 不足爲媿어니와
今無此三條
어늘 中國
하여 內爲舊主雪怨
注+㉔ 內爲舊主雪怨:爲, 去聲, 後外爲同. 十七年, 高麗臣莫離支弑其君高武, 而獨專國政, 太宗於是有征遼之議.하고 外爲新羅報讐
注+㉕ 外爲新羅報讐:十七年, 新羅遣使言 百濟攻取其國四十餘城, 復與高麗連兵, 謀絶新羅入朝之路, 乞兵救援. 上命司農丞相里玄奨齎璽書賜高麗, 使勿攻新羅, 莫離支竟不從. 玄奬還, 具言其狀, 上於是欲征之.하니 豈非所存者小
하고 所損者大
오
以保萬代巍巍之名
하시고 發霈然之恩
하며 降寬大之詔
하고 順陽春以布澤
하며 許高麗以自新
하여 焚凌波之船
하고 罷應募之衆
注+㉖ 罷應募之衆:十八年, 太宗欲征遼東, 長安‧洛陽募士三千, 戰艦五百艘.하시면
自然華夷
하여 遠肅邇安
하리이다 臣老病三公
이니 朝夕入地
나 所恨
은 竟無
이라
謹罄殘魂餘息
하여 豫代結草之誠
注+㉗ 豫代結草之誠:左傳, 宣公十五年, 秦伐晉, 次于輔氏. 魏顆敗秦師, 獲杜回. 初, 魏武子有嬖妾无子, 武子疾, 命顆曰 “必嫁是”. 疾甚則曰 “必殉.” 及卒, 顆見老人結草以亢杜回, 杜回躓而顚故獲之. 夜夢之曰 “余, 而所嫁之婦人父也, 爾用爾先人之治命, 余是以報.”하노니 儻蒙錄此
하시면 卽臣
리이다
太宗見表歎曰 此人危篤如此로되 尙能憂我國家하니 雖諫不從이나 終爲善策이라하더라
注
【集論】唐氏仲友曰
三
과 與未濟九
가 均是伐鬼方
이요 均是三年之伐
이나 在旣濟
엔 則戒之
하고 在未濟
엔 則勉之
하니 武功之未成
에 聖人必勉之於始
하고 武功之旣成
에 聖人必戒之於終
이라
玄齡之書는 得旣濟之象이어늘 太宗莫之聽者는 無畏相之心耳라
注
朱氏黼曰 玄齡於太宗左右에 未嘗有所可否하고 每逢帝怒에 惟震懼遜謝는 非不能諫也라
史稱
이라하니 是以
로 太宗初擧伐遼
에 遂良再言之
나 不聽
하고 至是再擧
에 外庭無敢一言
이라
雖玄齡任用之久하고 相信之深이라도 亦不敢面陳於在廷之日하고 獨表諫於屬纊僅存之際하니
理切詞盡하여 太宗嘉納이나 不之從也하고 至身沒而後罷之라 以此觀太宗晩節하면 大略可攷矣라
注
愚按 玄齡此疏는 乃太宗征遼無功之後니 思謀再擧之時에 而玄齡行將屬纊之日也라
此疏辭意懇切
이어늘 何乃不見於初親征之際耶
아 豈太宗忿心難懲
에 縱
라도 不足以尼其行耶
아 毋乃俟其大擧無成
하여 夫然後諫耶
아
然玄齡此疏切矣어늘 太宗止曰 此人危篤에 尙能憂我國家라하니 亦未有樂從之意라
越明年에 則以疾而命皇儲聽政矣하니 否則忿兵再擧를 事未可知也라
書曰 無怠無荒하면 四夷來王이라하고 又曰 明王愼德이어든 四夷咸賓이라하니 帝王保治가 厥有旨哉인저
또 병기는 흉기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므로 부득이할 경우에 사용해야 하는 법이니, 가령 고구려高句麗가 신하로서의 본분을 잃는다면 폐하께서 그들을 주벌하는 것이 옳고,
침략하여 중원의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면 폐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며, 오랫동안 중원의 근심거리가 된다면 폐하께서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옳으니, 이 중에 한 가지라도 해당된다면 비록 날마다 만 명의 군사가 죽는다고 해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 가지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 없는데, 중원을 스스로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안으로는 시해된 군주의 원한을 씻어주고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뒤에 나오는 ‘외위外爲’의 위爲도 같다. 정관貞觀 17년(643)에 고구려의 신하 막리지莫離支가 군주인 고무高武를 시해하고 국정國政을 독단하자, 태종이 이에 요동遼東을 정벌하자는 논의를 하였다. 밖으로는 신라의 침략에 대한 복수라고 명분을 삼으니
注+정관貞觀 17년(643)에 신라新羅에서 사신을 보내 백제百濟가 자신들을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았고, 다시 고구려와 병력을 연합하여 신라가 당唐나라로 입조入朝하는 길을 막으려 하니, 병사를 보내 구원해달라고 하였다.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奨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고구려로 가서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뜻을 전하도록 하였는데, 막리지가 끝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현장玄奬이 돌아와서 그 정황을 말하자, 태종이 이에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어찌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이 크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조상이 되는 노자老子의 ‘만족할 줄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게 된다.’라는 경계를 따라서
만대의 높은 명성을 지키시고, 지속적인 은혜를 베풀고 관대한 명령을 내리시며 따뜻한 봄빛을 따라 은택을 베풀며,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시어, 바다에 떠다니는 전선을 불태우고 소집된 병사들을 해산하소서.
注+정관貞觀 18년(644)에 태종太宗이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할 때,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모인 군사가 3천이었고, 전함이 5백 척이었다.
그렇게 하시면 자연스레 중원과 오랑캐가 경하하며 의지하여 먼 곳에서는 공경하고 가까운 곳은 편안해할 것입니다. 신은 늙고 병든 몸으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만간에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안타까운 점은 결국 작은 먼지와 이슬만 한 정성이라도 산과 바다 같은 폐하의 은혜에 보탬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남은 정신과 붙어 있는 숨이 다할 때까지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정성을 미리 대신하고자 하니
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5년에 진秦나라가 진晉나라를 토벌할 적에 보씨輔氏에 주둔하였는데, 위과魏顆가 진나라 군사를 패퇴시키고 두회杜回를 사로잡았다. 과거에 위무자魏武子에게 아들이 없는 폐첩嬖妾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이 들자 아들 위과에게 명하기를 “그녀를 반드시 개가改嫁시켜라.”라고 하였다가, 병이 위독해지자 “반드시 순장殉葬시켜라.”라고 하였다. 위무자가 죽은 뒤에 위과가 어떤 노인이 풀을 엮어 두회杜回의 길을 막는 것을 보았는데, 두회가 그 풀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에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개가시킨 부인의 아비이다. 그대가 그대 아버지의 정신이 맑을 때 내린 명을 따랐기 때문에 내가 그로 인해 보답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여 이 애달픈 말을 받아들이신다면 신이 죽더라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태종이 표문을 보고 탄식하였다. “이 사람이 이처럼 위독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우리 국가를 근심하니, 비록 간언을 따를 수는 없지만 결국에는 좋은 계책이구나.”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주역周易》 기제괘旣濟卦의 구삼九三과 미제괘未濟卦 구사九四가 동일하게 ‘벌귀방伐鬼方’과 ‘삼년지벌三年之伐’을 말하였지만, 기제괘에서는 경계를 하고 미제괘에서는 면려를 하였으니, 무공武功을 아직 이루지 않았을 때에는 성인聖人이 반드시 시작을 면려하고, 무공武功을 이루고 나서는 성인聖人이 반드시 끝맺음을 경계한 것이다.
방현령房玄齡의 글은 기제旣濟의 상象이 있었는데, 태종太宗이 따르지 않은 것은 재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注
주보朱黼가 말하였다. “방현령房玄齡이 태종太宗의 곁에 있으면서 가부可否를 말한 적이 없고, 늘 태종이 성을 낼 때면 두려워하며 겸손히 사례했던 것은 간언을 잘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관史官이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이 간언을 잘하니,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그 정직함을 사양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태종이 처음 요동遼東을 정벌했을 때 저수량褚遂良이 거듭 간언을 했으나 따르지 않았고, 이때에 와서 재차 정벌을 감행할 때에도 외정外庭에서는 감히 한마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비록 방현령이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고 신의가 두터웠으나 역시 조정에 있을 때에는 감히 면전에서 간언을 하지 못하고, 다만 겨우 숨만 붙어 있어 임종에 가까울 때 표문表文으로 간언을 하였다.
이치가 절실하고 말을 다하여 태종이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방현령의 말을 따르지는 않고, 죽음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 사실로 태종의 만년의 행동을 살펴본다면 대략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방현령房玄齡의 이 상소는 태종太宗이 요동遼東 정벌을 실패하고 난 뒤에 올린 것이니, 재차 정벌에 대한 도모를 생각할 때 방현령은 거의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 상소의 말뜻이 아주 절실한데 어찌하여 처음 태종이 친히 정벌할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가. 아마도 태종의 성난 마음을 징계하기 어려워 비록 입에 쓴 좋은 약과 귀에 거슬리는 충언이라 하더라도 친히 나서는 정벌을 막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대규모 정벌이 실패하기를 기다린 뒤에 간언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방현령의 이 상소가 절실하였는데 태종은 단지 “이 사람이 이처럼 위독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우리 국가를 근심하는구나.” 라고 말하였으니 역시 즐거이 따를 뜻이 없었다.
그 이듬해에 태종이 병이 나서 명을 내려 태자에게 정무를 보게 하였으니,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분노로 병사를 다시 출동시켰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에 “게을리하지 않고 황폐하지 않으면 사방의 오랑캐들도 와서 왕으로 받들 것이다.” 라고 하였고, 《서경書經》 〈주서周書 여오旅獒〉에 또 이르기를 “명철한 왕이 덕을 삼가면 사이四夷가 모두 손님이 되어 복종한다.” 라고 하였으니, 제왕이 치세治世를 보존하는 것이 뜻이 있을 것이다.
훌륭한 태종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그 보다 못한 군주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