伏見詔書
에 令宗室勳賢
注+ 令宗室勳賢:令, 平聲.으로 作鎭藩部
하여 하여 嗣守其政
하여 非有大故
어든 無或黜免
이라하시니
臣竊惟陛下封植之者가 誠愛之重之하여 欲其緖裔承守하여 與國無疆하여 可使世官也니이다
何則
고 以堯舜之父
로도 猶有朱均之子
注+ 以堯舜之父 猶有朱均之子:堯之子曰丹朱, 舜之子曰商均, 皆不肖.어든
儻有孩童嗣職하여 萬一驕逸이면 則兆庶被其殃而國家受其敗라
政欲絶之也
인댄 則子文之理猶在
注+ 政欲絶之也 則子文之理猶在:子文, 楚令尹, 姓鬭, 名穀於莵. 其孫克黃使齊復命, 自拘於司寇, 王思子文之治, 曰 “.” 使復其官.하고
政欲留之也
인댄 而欒黶之惡已彰
注+ 政欲留之也 而欒黶之惡已彰:黶, 音黯. 欒, 姓, 黶, 名. 晉大夫武子之子也. 晉士鞅曰 “.” 黶死, 武子所施沒矣, 而黶之怨實彰. 後盈見逐. 盈, 黶之子也.하니
與其毒害於見存之百姓
注+ 與其毒害於見存之百姓:見, 音現.으론 則寧使割恩於已亡之一臣
이 明矣
라
臣謂宜賦以茅土
注+ 臣謂宜賦以茅土:古者天子以五色土爲壇, 封諸侯, 取其方面, 苴以白茅授之, 使立社於其國.하고 疇其戶邑
하여 必有材行
注+ 必有材行:行, 去聲.이어든 隨器方授
면
則
非强
이오 亦可以獲免尤累
注+ 亦可以獲免尤累:累, 良僞切.니이다
願陛下
는 深思其宜
하사 使夫
注+ 使夫:夫音扶.得奉大恩而子孫終其福祿也
하소서
太宗
이 竝嘉納其言
하여 於是
에 竟罷子弟及功臣世襲刺史
注+ 貞觀元年……竟罷子弟及功臣世襲刺史:, 貞觀五年, 上令群臣議封建, 魏徵以爲 “若封建則卿大夫咸資俸祿, 必致厚斂. 又京畿賦稅不多, 所資畿外, 若盡封國邑, 經費頓闕. 又燕秦趙代俱帶外夷, 若有警急, 追兵內地, 難以奔赴.” 李百藥云云. 顔師古以爲 “不若分王宗子, 勿令過大, 間以州縣, 雜錯而居, 互相維持, 各守其境, 協力同心, 足扶京室. 爲置官寮, 皆省司選用, 法令之外, 不得擅作威福, 朝貢禮儀, 具爲條式, 一定此制, 萬代無虞.” 十一月, 詔宗室勳賢作鎭藩部云云. 十三年二月, 于志寧以爲 “古今事殊, 恐非久安之道”, 上疏爭之. 馬周亦上疏云云. 會長孫無忌等皆不願, 上表固讓稱 “承恩以來, 形影相弔, 若履春冰, 宗室憂虞, 如寘湯火. 緬惟三代封建, 蓋由力不能制, 因而利之, 禮樂節文, 多非己出. 兩漢罷侯, 蠲除曩弊, 深協事宜. 今因臣等復有變更, 恐紊聖朝綱紀. 且後世愚幼不肖之嗣, 或抵冒邦憲, 自取誅夷, 更因延世之賞, 致成勦絶之禍, 良可哀愍. 願停渙汗之旨, 賜其性命之恩.” 又因子婦長樂公主固請於上, 且言 “臣等披荊棘事陛下, 今海內寧一, 奈何棄之外州, 與遷徙何異.” 上曰 “割地以封功臣, 古今通義, 意欲公之後嗣, 輔朕子孫, 共傳永久, 而公等乃復發言怨望, 朕豈强公等以茅土耶.” 詔停世封刺史. 與此章所紀年歲不同, 今備錄于此, 亦以見唐世議封建之始末云.하다
注
而封建之禮已亡이요 秦滅六國하여 以爲郡縣하니 三代之制不可復矣라
必欲法上古而封之하되 弱則不足以藩屛하고 彊則必至於僭亂하니 此後世封國之弊也라
況諸侯之後嗣가 或賢或不肖어늘 而必使之繼世하니 是以一人而害一國也라
三代封國과 後世郡縣이 時也요 因時制宜하여 以便其民이 順也라
後世如有王者가 親親而尊賢하고 務德而愛民하여 愼擇守令하여 以治郡縣이면
亦足以致太平而興禮樂矣
리니 何必如古封建乃爲盛哉
리오柳宗元 그림설명>
注
辨方正位하고 體國經野하여 設官分職하여 以爲民極之言에
慨然嘆曰 不井田하고 不封建이면 不足以法三代之治라하니
夫封建與天下共其利는 天道之公也요 郡縣以天下奉一人은 人欲之私也라
而近世
도 亦謂封建不可行
하니 始皇李斯柳宗元之論
은 聖人不能易也
라하니 嗚呼
라 豈其然乎
리오
注
更立制度하여 以爲郡縣하고 乃畫壤列土하여 修明侯甸之法은 何哉오
此仁之至며 義之盡이요 而出於人心之固然者니 固非聖人之私意어늘 而歸之勢면 可乎아
注
夫孟子所言
之法
은 皆先王之制也
니 烏在其不改變乎
아
自漢之失
로 固言之矣
니 豈可擧此以例禹湯文武所爲哉
리오
方三代盛時에 諸侯或自其國入爲三公하고 王室有難에 諸侯或釋位以間王政하고
至其衰也하여는 五伯雖彊大나 猶且攘夷狄以尊戴天下之共主어늘
凡若此類는 宗元皆略而不稱하고 乃摘取衰微禍亂之一二하여 欲擧封建而廢之하니
注
是聖人於未擧兵之前에 要結衆力이라가 及成功之後에 姑息苟安이니
夫謂三代聖王無公心
하여 以封建自私
라하면 是
之事也
요
謂秦無私意
하여 以郡縣公天下
라하면 是
之忠也
니 一何不類之甚歟
아
注
天子聖明하고 公卿必得其人이면 諸侯不敢越亂法度라
世固多賢也
니 而又有鄕擧里選之法
하고 有
이면 何患乎材之不用也
리오
若上無明君하고 下無賢臣하여 如周之衰와 秦之季와 漢魏隋唐之時하여 在位者無非小人이요 而興邦之良佐悉沈于民伍하여 不見庸也면
夫爲君如堯舜禹湯亦足矣요 帝王之治至於唐虞三代면 亦無以加矣라
井天下之田하여 使民各有以養其生하고 經天下之國하여 使賢才皆得以施其用하면
人主自治가 不過千里하여 大小相維하고 輕重相制하여
外無强暴侵陵微弱不立之患하고 內無廣土衆民奢泰恣肆之失이라
若秦則妬民之兼幷而自爲兼幷하여 筦天下之私以自奉이라
曰何獨封建也리오 二帝三王之法을 孰不可行者리오마는 在人而已矣라하노라
然欲行封建인댄 先自井田始하니 范子亦惑於宗元하여
謂今日之法不可用於古가 猶古之法不可用於今이라하니
夫後世之私意妄爲固不可行於古라하여 而爲天下者가 不以二帝三王善政良法爲則이면 則又何貴於稽古哉아
注
愚按 封建은 古先哲王公天下之良法美意也니 後世言治者가 何敢妄議哉리오
若
은 挻禍尤甚
하여 其間悖逆自恣負强梗化者
를 不可勝數
나
然終不若郡縣臂指運掉之爲得하니 於是封建是非之論興焉이라
後世無古先哲王治天下之本이라도 而用古先哲王治天下之具하여 宜致然也니 豈封建之失哉리오
而謂封建非聖人意라하고 謂公天下自秦始라하니 此誠爲過라
不以盛時封建之美處爲言하고 而以季世之弊處爲說하니 此誠爲偏이라
若胡氏以井田封建可行於後世는 則亦未敢以爲知言也라
封建井田은 兆於黃帝畫野分州하고 綿歷幾代하여 大備於周하니 豈一朝夕之故哉리오
居今之世에 出宗室而分王之하고 取民田而井疆之하면 紛紜轇轕하리니 何能有定이리오
故以封建爲非者는 昧於古之實也요 以封建爲是者는 泥於古之名也니
加秩而久任之하고 登進而激勸之하여 體古先哲王之美意하고 而行後世之良法이 可也오
중서사인中書舍人 마주馬周가 또 상소를 올려 말했다.
“폐하의 조서를 보니,
종실宗室이나 공신들에게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번부藩部(변방
군국郡國)를
진수鎭守하게 하고 그들의 자자손손에까지 전하여 그곳의 정권을 대대로 계승하도록 하고, 중대한 잘못을 범하지 않는 한 파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서 이들을 제후로 봉하시는 것은 참으로 이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시어 그 자손에까지 이어서 지키게 하여 국가와 더불어 한없이 관직을 이어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려는 것입니까.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같은 아버지에게도
단주丹朱와
상균商均 같은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거늘
注+요堯임금의 아들은 단주丹朱이고, 순舜임금의 아들은 상균商均인데, 모두 불초하였다.,
하물며 이들보다 못한 자인데도 아버지의 공으로 그 자식을 취하여 쓰려고 한다면 이는 큰 잘못입니다.
만일 어릴 때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하여 만에 하나라도 교만하고 방자하다면 백성들이 재앙을 입고 나라 또한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근절하려 한다면
초楚나라의
영윤令尹 자문子文의 치적이 여전히 남아 있어 손자에게 관직을 회복하게 한 예가 있고
注+자문子文은 초楚나라의 영윤令尹으로, 성姓은 투鬭이고 이름이 누오도穀於莵(누오도)이다. 그의 손자 극황克黃이 제齊나라로 사신을 갔다가 복명復命하고 스스로 사구司寇에게 체포되자, 왕王이 자문子文의 치적을 생각하여 말하기를 “자문子文의 후손이 끊긴다면 어찌 선善을 권면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그 관직을 회복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유지하려 한다면
진晉나라
난염欒黶의 악행이 드러나서 손자에게 재앙이 미친 예가 있으니
注+암黶(검다)은 음이 암黯이다. 난欒은 성姓이고, 암黶은 이름이니, 진晉나라 대부大夫인 무자武子의 아들이다. 진晉 사앙士鞅이 말하기를 “난염欒黶은 교만과 포학이 너무 심하나 오히려 재앙을 면할 수 있지만 망함이 아들 난영欒盈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난염欒黶이 죽자 무자武子가 베푼 은덕이 사라졌고, 난염欒黶의 원한이 실제로 드러난 것이다. 뒤에 난영欒盈은 쫓겨났다. 난영欒盈은 난염欒黶의 아들이다.,
현재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기보다는
注+견見(드러나다)은 음이 현現이다. 차라리 죽은 공신에 대한 은혜를 끊어버리는 편이 나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들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되니,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봉토封土를 나누어주고
注+옛날에 천자는 오색토五色土로 단을 만들어 제후를 봉하고 그 방면의 흙을 취하여 백모白茅(흰 띠풀)로 싸서 주어 그 제후국에 사社를 세우게 하였다. 호읍戶邑을 평등하게 하여 반드시 재능과 덕행이 있을 경우
注+행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다. 국량에 따라 관직을 임명하면
그 세력은 강하지 않고, 또 과실을 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注+누累(누를 끼치다)는 양良과 위僞의 반절이다.
과거 한 광무제漢 光武帝는 공신에게 관리의 일을 맡기지 않았으니, 그 공신들이 온전히 삶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그 방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 마땅함을 깊이 생각하시어 그들이
注+부夫(발어사)는 음이 부扶이다. 폐하의 큰 은혜를 입어 자자손손 복록을 끝까지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태종이 그들의 말을 모두 받아들여 이에 종실의 자제와 공신들이
자사刺史를 세습하도록 하는 일을 취소했다.
注+《자치통감資治通鑑》을 살펴보건대, 정관貞觀 5년에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봉건封建을 의논하도록 하자,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만약 봉건을 하게 되면 경대부卿大夫들이 모두 봉록에 의지하여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또 경기京畿 지역의 부세가 많지 않아서 의지할 곳은 경기 밖인데, 만일 모두 국읍國邑으로 분봉하게 되면 경비가 갑자기 모자랄 것입니다. 또 연燕‧진秦‧조趙‧대代 지역은 모두 외부의 오랑캐와 접하고 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병력을 내지內地에서 소집하여 달려가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백약李百藥이 말하였다. “……”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종자宗子들을 나누어 왕으로 봉해주되 지나치게 크게 하지는 말고 그 사이에 주현州縣이 들쭉날쭉하도록 있게 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각각 그 지역을 지키게 하며 힘을 모으고 마음을 합하게 하면 황실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습니다. 관료를 두는 것은 모두 성사省司(중추적中樞的인 각 생省)가 선발하여 채용하고 법령 이외에는 제멋대로 위엄과 복록을 누릴 수 없게 해야 합니다. 조공하는 예의는 조문과 형식을 갖추어야 하니, 한 번 이 제도를 정해 놓으면 만대萬代 동안 걱정거리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1월에 조서를 내려 종실과 공신에게는 번부藩部를 진수鎭守하라고 하였다. “……” 정관 13년 2월에 우지녕于志寧이 말하기를 “고금古今의 사정이 다르니, 아마도 오래도록 편안히 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라고 하며 상소를 올려 쟁론하였다. 마주馬周 역시 상소를 올려 말하였다. “……” 마침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이 모두 원하지 않아 표문表文을 올려 진실로 사양하며 말하기를 “은혜를 입은 이래로 몸과 그림자가 서로 위로하여 마치 봄날의 얼음을 밟는 듯하고 종실이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이 마치 끓는 물과 불에 놓인 것 같았습니다. 아득히 삼대三代의 봉건을 생각해보면 대개 힘으로 통제할 수가 없었기에 그대로 이를 이롭게 여기니 예악禮樂과 절문節文은 대부분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양한兩漢 시대에는 제후를 없애고 태수를 두어서 과거의 폐단을 제거하였으니 일의 마땅함에 잘 어울립니다. 지금 신 등으로 인하여 다시 변경하게 되면 성스러운 조정의 기강이 무너질까 염려됩니다. 또 후세에 어리석고 불초한 후계자가 혹 나라의 법도를 범하여 스스로 멸망하는 데 이르고, 대대로 이어온 포상으로 인해 멸망하는 화를 당하게 된다면 정말로 슬프고 근심스러운 일입니다. 바라건대 이미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어 성명性命을 보전하는 은혜를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며느리인 장악공주長樂公主를 통하여 굳게 황제에게 청하며 또 말하기를 “신들은 고생을 무릅쓰고 폐하를 섬겨서 지금 해내海內가 편안하게 통일되었는데, 어찌하여 저를 외주外州로 내쳐서 귀양 보내는 것과 다름없이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땅을 나누어 공신에게 책봉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공통된 뜻이고, 공의 후손이 짐의 자손을 보필하여 함께 영구히 전하게 하려는 뜻인데, 공들은 마침내 다시 말을 꺼내서 원망하니, 짐이 어찌 모토茅土로 공들을 억지로 보내겠소?”라고 하고 조서를 내려 대대로 자사刺史에 봉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이 장章과 기록한 시기가 같지 않으나 지금 여기에 갖추어 기록하니, 또한 당唐나라에서 봉건封建을 논한 시말始末을 볼 수 있다.
注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유종원柳宗元이 말하기를 ‘봉건封建은 성인聖人의 본의가 아니라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니,
이는 옛날부터 있던 것이었으나 성인이 없애지 못했다.
주周나라 왕실이 쇠미해지자 12제후국을 병합하여 차례대로 6, 7개 국가가 되었으니
봉건의 예禮가 이미 없어진 것이고, 진秦나라가 6국을 멸하여 군현郡縣으로 만들었으니, 삼대三代의 제도가 회복될 수 없었다.
반드시 상고시대를 모범으로 삼아 봉건제도를 하려고 하였지만 힘이 약하면 번병藩屛을 만들기에도 부족하고, 힘이 강하면 반드시 참란僭亂한 데 이르니, 이것이 후세 제후국을 봉한 폐단이다.
더군다나 제후諸侯의 후사後嗣가 뛰어난 경우도 있고 불초한 경우도 있거늘 반드시 대물려 이어가게 하니, 이 때문에 한 사람으로 인해 온 나라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이르기를 ‘예禮에는 시時가 가장 중요하고 순順이 그 다음이다.’라고 하였으니
삼대三代에 제후국을 봉해준 것과 후세에 군현제郡縣制를 행한 것이 시時이며, 시時를 따라 마땅한 제도를 제정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순順이다.
옛날의 법도를 지금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지금의 법을 옛날에 적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후세에 어떤 왕이 친한 이를 친애하고 어진 이를 존중하며 덕에 힘쓰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수령을 신중히 선발하여 군현郡縣을 다스리게 하면
또한 태평시대를 이루어 예악禮樂을 흥기시킬 것이니, 어찌 굳이 옛날의 봉건제도를 따라야만 성하게 될 수 있겠는가.”
注
호인胡寅이 말하였다. “태종太宗이 일찍이 《주관周官》 〈천관天官 총재冢宰〉를 읽다가
‘방위를 분변‧정립하고, 도성의 규모를 구획하고 교외를 경영하여, 관직을 설립‧배치하여 백성들의 법이 된다.’라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정전제井田制를 행하지 않고 봉건제封建制를 행하지 않으면 삼대三代의 다스림을 본받기에 부족하다.’라고 하였으니,
여러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봉건을 논의하게 한 것이 여기에 그 근원이 있을 것이다.
봉건제封建制가 천하 사람들과 그 이익을 함께하는 것은 천도天道의 공변됨이며, 군현제郡縣制가 천하 사람들로 한 사람을 받들게 하는 것은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다.
위징魏徵이 옛날의 제도를 자세히 상고한 적이 없어 너무 식견이 없었으나
근세의 소씨蘇氏와 범씨范氏도 말하기를 ‘봉건封建을 행해서는 안 되니 진시황秦始皇‧이사李斯‧유종원柳宗元의 논의는 성인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아! 어찌 그렇겠는가.
注
유종원柳宗元이 말하기를, ‘봉건封建은 성인聖人의 본의가 아니라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가령 상고시대의 제후가 백성들의 해악이 되는데도 성인이 부득이 존치했다고 한다면
당우唐虞의 시대에는 홍수가 땅을 범람하여 백성들이 정착할 곳이 없었고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주紂를 치고 엄奄을 쳤을 때 50개국을 멸망시킨 것은 모두 천하의 큰 변고이니, 이 몇 가지는 성인이 시대를 따를 수 없는 변화이다.
그런데 다시 제도를 세워 군현제郡縣制를 만들고 지역을 구획하여 분봉分封하여 후전侯甸(왕기王畿 이외 구역區域)의 법을 정비한 것은 어째서인가.
유종원이 또 이르기를 ‘공덕을 남에게 남긴 사람은 죽으면 반드시 그 후사를 받들어준다. 그러므로 봉건은 성인의 본의가 아니라 형세상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니,
그 사람의 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후손이 끊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이는 지극한 인仁이며, 의義를 다하는 것이고 인심人心의 본연에서 나온 것이라 진실로 성인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거늘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라 결론 지어서야 되겠는가.
注
유종원柳宗元이 또 말하기를, ‘제후국諸侯國이 혼란스러우면 천자天子가 그 군주를 바꿀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맹자孟子가 말한 ‘제후의 관작을 강등시키고 제후의 국토를 삭감하는 것과 육사六師를 출동하여 제후를 바꾼다.’는 법은 모두 선왕 때의 제도이니, 어디에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는가.
한漢나라는 후왕侯王의 악행이 싹트기 전에 제어하지 못하고 대역부도大逆不道함에 이른 뒤에 군대를 일으켜 멸망시켰으니, 이는 삼대三代의 옛일이 아니다.
한漢나라의 과오가 있음으로부터 원앙爰盎이 진실로 그것을 말하였으니, 어찌 이 일을 들어 우왕禹王‧탕왕湯王‧문왕文王‧무왕武王이 한 일을 예거例擧할 수 있는가.
삼대三代가 성할 때에는 제후諸侯들이 혹 자기 제후국으로부터 왕경王京으로 들어와 삼공三公이 되고 왕실王室에 어려움이 있을 적에 제후諸侯들이 혹 지위를 벗어놓고 왕정王政에 간여하였고,
쇠퇴함에 미쳐서는 오패五伯가 비록 강성하였으나 오히려 또 이적夷狄을 물리쳐 천하의 공주共主를 추대하였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일은 유종원이 모두 생략하여 말하지 않고 쇠미한 화란禍亂의 한두 가지 일만 들어 봉건제를 들어 폐지하려 하였으니,
이는 월자刖者(발꿈치를 베인 사람)를 보고 천하의 신발을 없애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注
유종원柳宗元이 또 말하기를, ‘탕왕湯王은 3천 제후의 힘을 의지하여 하夏나라를 내쳤고, 무왕武王은 8백 제후의 힘을 의지하여 상商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감히 바꿀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성인이 거병擧兵하기 전에 여러 세력을 규합했다가 성공한 뒤에는 고식적으로 구차히 편안히 한 것이 되니,
이는 육국六國과 오대五代의 용렬한 군주나 하는 짓이거늘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그런 일을 했다고 하는가.
유종원이 또 말하기를 ‘봉건封建은 크게 공변된 일이 아니고, 천하의 공변된 일은 진秦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이 공변된 마음이 없어 봉건으로 사심私心을 채웠다고 한다면 이는 백이伯夷와 같은 사람이 도척盜跖과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며,
진秦나라가 사심이 없어 군현제郡縣制로 천하를 공변되게 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비렴飛廉과 같은 인물에게 비간比干의 충정이 있다는 것이니, 하나같이 어찌 유사한 점이 없는 것인가.
注
유종원柳宗元이 또 말하기를, ‘제후諸侯가 대를 이어 지위에 오르고 또 대대로 대부大夫를 지내며 채지采地에서 봉록을 받아 봉역封域을 다하니 비록 성현聖賢이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천하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자天子가 성명聖明하고 공경公卿 중에 반드시 온당한 사람을 얻으면 제후諸侯가 감히 법도를 넘거나 어지럽히지 못한다.
세상에는 진실로 훌륭한 사람이 많고, 또 향거鄕擧와 이선里選의 법이 있고 현달한 자를 드러내어 밝히고 미천한 사람도 천거하여 쓴다면 어찌 인재가 쓰이지 않을 것을 근심하겠는가.
만약 위에 명철한 군주가 없고 아래에 훌륭한 신하가 없어 주周나라가 쇠퇴할 때나 진秦나라의 말기나 한漢‧위魏‧수隋‧당唐의 때처럼 벼슬에 있는 사람이 소인小人이 아닌 경우가 없고 나라를 부흥시킬 훌륭한 보좌가 다 백성들 사이에 숨어 쓰이지 못한다면
비록 수령을 천하에서 두루 구한다 하더라도 장차 이것을 어떻게 구제하겠는가.
그러므로 유종원의 봉건론封建論은 터무니없어 믿을 수가 없다.
임금이 요堯‧순舜‧우禹‧탕湯과 같으면 충분하고 제왕帝王의 치적은 당唐‧우虞‧삼대三代에 이르면 더할 것이 없다.
천하天下의 땅에 정전제井田制를 적용하여 백성들이 각각 살아 있는 부형을 봉양하도록 하고 천하의 제후국을 경영하여 훌륭하고 재주 있는 자들이 등용을 받도록 한다면
인주人主가 스스로 다스리는 곳은 천 리를 넘지 않아 대소大小가 유지되고 경중輕重이 조절되어
밖으로는 강포하거나 미약하여 서지 못할까 하는 근심이 없고, 안으로는 영토를 넓히고 백성을 많게 하여 사치하고 방자하는 잘못이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의義로 이利를 처리하여 천하에 고루 베풀 수 있다.
그러므로 봉건의 법이 천하에 공변된 것이라 하는 것이다.
진秦나라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겸병하는 것을 시샘하여 스스로 겸병하여 천하의 사사로움을 관리하여 스스로를 봉양하였다.
그러므로 군현제郡縣制가 인욕人欲의 사사로운 것이라 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러면 봉건제를 지금도 쓸 수 있는가.’라고 하는데,
‘어찌 봉건제뿐이겠는가. 이제二帝‧삼왕三王의 법을 어느 것이든 행할 수 없겠는가마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하겠다.
그러나 봉건제를 행하려고 한다면 먼저 정전제井田制부터 시작해야 하니, 범조우范祖禹도 유종원에게 미혹되어
‘지금의 법을 옛날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 옛날의 법을 지금에 쓸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후세에 사사로운 의도를 가지고 함부로 본래 옛날 것을 쓸 수 없다고 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자가 이제二帝‧삼왕三王의 선정善政과 양법良法으로 법칙을 삼지 않는다면 또 어찌 옛날을 고찰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注
내가 살펴보건대 봉건封建은 옛날 선철왕先哲王이 천하를 공변되게 하려고 했던 좋은 법의 아름다운 뜻이니, 후세에 다스림을 말하는 자가 어찌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 있겠는가.
진秦나라가 제후를 폐지하고 군수郡守를 둔 이후로 전제田制와 학제學制가 모두 옛 것이 아니고,
한漢나라 이후로는 봉건과 군현제가 서로 뒤섞였으니,
한漢나라의 칠국七國과 진晉나라의 팔왕八王의 경우에는 화를 부른 것이 더욱 심하여 그 사이에 순리를 거슬러 제멋대로 행하고 강함을 믿어 교화를 따르지 않은 경우를 이루 다 셀 수 없으나
그러나 결국에는 군현제가 팔과 손가락을 운용하는 것만큼 나은 것이 되지 못하였으니, 이에 봉건에 대한 시비의 논의가 일어났다.
하남河南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뜻이 있은 뒤에 《주관周官》의 법도를 행할 수 있다.” 라고 하였으니,
후세에 옛날의 선철왕先哲王이 천하를 다스리던 근본이 없더라도 옛날 선철왕先哲王이 천하를 다스리던 제도를 사용하여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니, 어찌 봉건제의 잘못이겠는가.
내가 헤아리지 못하지만 생각을 해보니 유종원의 논의는 진실로 다 그르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봉건제는 성인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고, ‘천하를 공변되게 한 것이 진秦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잘못된 것이다.
융성한 시대의 봉건제도의 아름다움으로 말을 하지 않고 말세의 폐단이 있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편벽된 견해이다.
호씨胡氏가 정전제와 봉건제를 후세에 행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또한 감히 지언知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봉건封建과 정전井田은 황제黃帝가 야野와 주州를 구획하고 구분한 데서 조짐이 있었고, 몇 시대를 거쳐 내려와 주周나라에서 크게 갖추어졌으니, 어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겠는가.
지금 세상에 살면서 종실宗室 출신이라 하여 왕으로 분봉해주고 백성의 땅을 취하여 정전법으로 경계를 짓는다면 분란과 소란이 일어날 것이니, 어찌 정해짐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봉건제를 잘못된 제도라고 하는 것은 옛날의 실상에 어두운 것이고, 봉건제를 옳다고 하는 것은 옛날의 명분에 빠진 것이니,
어찌 저것은 삼대三代 이상의 일의 형세이며, 이것은 삼대三代 이하의 일의 형세라고 말하지 않을 것인가.
옛날과의 거리는 이미 멀어져서 시대에 맞추어 마땅한 제도를 시행해야 하나 군현제는 바꿀 수가 없으니,
오직 수령을 정밀히 택하고 잘 다스리는데 공적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직급을 올려주어 오래 임용하고 등용하여 권면하여 옛날 선철왕先哲王의 아름다운 뜻을 체득하고 후세의 좋은 법을 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정전제를 하지 않고 봉건제를 하지 않으면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