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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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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庶人承乾注+太宗初立長子承乾爲太子, 後以罪廢爲庶人.在春宮하여 不修德業하고 魏王泰注+字惠褒, 太宗第四子. 封魏王, 好士善屬文. 後貶王濮. 謚曰恭.寵愛日隆하니 內外庶寮 咸有疑議
太宗聞而惡之注+烏, 去聲.하여 謂侍臣曰
當今朝臣 忠謇無如魏徵하니
我遣傅皇太子하여 用絕天下之望하리라하다
十七年 遂授太子太師注+唐制, 太子太師太傅太保, 爲三師, 掌以道德輔導皇太子.하여 知門下事如故
徵自陳有疾하니 太宗謂曰
太子 宗社之本이니 須有師傅
故選中正하여 以爲輔弼이라
知公疹病하니 可臥護之하라
徵乃就職이라가 尋遇疾이라
徵宅內先無正堂이러니
太宗 時欲營小殿이라가 乃輟하고 其材爲造注+爲, 去聲.한대 五日而就어늘 遣中使注+去聲.賜以布被素褥하여 遂其所尙이라
後數日하니 太宗親臨慟哭注+臨, 去聲.하고 贈司空하며 諡曰文貞이라
太宗親爲製碑文하여 復自書於石하고 特賜其家食實封九百戶하다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이승건李承建注+태종太宗 초년에 장자長子이승건李承乾을 세워 태자로 삼았는데, 뒤에 죄로 인해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덕행과 학문을 닦지 않았고, 위왕威王 이태李泰注+위왕魏王 이태李泰는〉 혜포惠褒이니, 태종太宗의 넷째 아들이다. 위왕魏王에 봉해졌으며 선비를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후에 복왕濮王으로 강등되었다. 시호는 이다. 대한 태종太宗의 총애가 나날이 더해가자 궁궐 안팎의 여러 관료들이 모두 의심하여 논의하였다.
태종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매우 싫어하여注+(미워하다)는 거성去聲이다.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조정의 대신들 가운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로는 위징魏徵만 한 사람이 없소.
나는 그를 보내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아 천하 사람들의 잘못된 바람을 없앨 것이오.”
정관貞觀 17년(643)에 드디어 태자태사太子太師注+나라 제도에 의하면 태자태사太子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삼사三師라고 하니, 도덕道德으로 황태자를 돕고 이끌어주는 일을 담당한다. 임명하여 이전처럼 문하성門下省의 일을 맡게 하였다.
위징이 질병이 있다고 스스로 아뢰자, 태종이 말하였다.
“태자는 종묘사직의 근본이니, 반드시 사부師傅가 있어야 하오.
그런 까닭에 올바른 사람을 선발해 보필하게 하는 것이오.
그대가 질병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누워서 가르쳐도 될 것이오.”
위징이 마침내 태사太師의 직책을 맡았는데 얼마 뒤에 병에 걸렸다.
위징의 집에는 안에 원래 정당正堂이 없었다.
태종이 그때 작은 전각을 지으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그 재목으로 위징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었는데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닷새 만에 완공되니, 환관을 보내注+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무명 이불과 요를 내려서 위징이 숭상하는 것을 이루어주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친히 조문하여 통곡하였으며,注+(조문하다)은 거성去聲이다. 그를 사공司空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태종은 직접 위징을 위하여 비문을 지어 다시 돌에 썼고, 특별히 그의 집에 실봉實封 900를 식읍으로 주었다.
魏徵을 위해 태종太宗이 殿閣을 짓지 않고 집을 짓다魏徵을 위해 태종太宗이 殿閣을 짓지 않고 집을 짓다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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