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每與之言에 未嘗不悅하고 徵亦喜逢知己之主하여 竭其力用이라
卿所諫前後二百餘事
는 皆稱朕意
注+稱, 去聲.하니
三年에 累遷秘書監하여 參預朝政하니 深謀遠筭하여 多所弘益이라
卿罪重於中鉤
나 我任卿逾於管仲
注+中, 去聲. 管仲, 名夷吾, 齊卿也. 初齊襄公被弑, 議立君, 先陰告公子小白於, 魯亦發兵, 送公子糾, 而使管仲别將兵遮魯道, 射中小白帶鉤. 糾至齊小, 白已立, 是爲桓公. 管仲請囚, 請公用之, 公以爲大夫, 後爲相, 遂霸天下.하니
위징魏徵은 평소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능이 있었으며, 성격이 또 강직해서 굽히는 일이 없었다.
태종太宗이 그와 담소를 나눌 때마다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위징 역시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난 것을 기뻐해서 능력과 쓰임을 다하였다.
태종은 또 위징을 위로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注+노勞는 거성去聲이니, 위로하다는 뜻이다.
“경이 전후로 간언한 200여 가지의 일은 모두 나의 생각에 들어맞는 것이었소.
注+칭稱(걸맞다)은 거성去聲이다.
경이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소.”
정관貞觀 3년(629)에 여러 번 승진하여 비서감秘書監이 되어 조정 정사에 참여하였는데, 그는 깊이 생각하고 원대하게 계획을 세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경의 죄는
제齊 환공桓公의 허리띠 쇠 장식을 쏜
관중管仲보다도 크지만, 내가 그대를 신임하고 중용한 것은 환공이 관중을 대우한 것보다 낫소.
注+중中(맞히다)은 거성去聲이다. 관중管仲은 이름이 이오夷吾이니, 제齊나라 경卿이다. 처음에 제齊나라 양공襄公이 시해되어 임금을 세우려 논할 적에 고씨高氏와 국씨國氏가 먼저 거莒 땅에 있던 공자 소백小白에게 몰래 고하자, 노魯나라 역시 군대를 동원하여 공자 규糾를 전송하고 관중에게 따로 군사들을 거느리고 노魯나라로 통하는 길목을 막도록 하였는데, 관중이 활을 쏘았으나 소백의 허리띠 쇠 장식에 맞았다. 규가 제齊나라에 도착하고 보니 소백이 이미 임금이 되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제齊 환공桓公이다. 관중은 죄수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포숙아鮑叔牙가 환공에게 그를 등용하도록 요청하니, 환공이 대부로 삼았고 그 후에 재상으로 삼아 결국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근대近代에 군주와 신하 간에 마음이 맞는 것이 어찌 나와 경과 같은 경우가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