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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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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徵雅有經國之才하고 性又抗直하여 無所屈撓하니
太宗每與之言 未嘗不悅하고 徵亦喜逢知己之主하여 竭其力用이라
又勞之曰注+勞, 去聲, 慰喩也.
卿所諫前後二百餘事 皆稱朕意注+稱, 去聲.하니
非卿忠誠奉國이면 何能若是오하다
三年 累遷秘書監하여 參預朝政하니 深謀遠筭하여 多所弘益이라
太宗嘗謂曰
卿罪重於中鉤 我任卿逾於管仲注+中, 去聲. 管仲, 名夷吾, 齊卿也. 初齊襄公被弑, 議立君, 先陰告公子小白於, 魯亦發兵, 送公子糾, 而使管仲别將兵遮魯道, 射中小白帶鉤. 糾至齊小, 白已立, 是爲桓公. 管仲請囚, 請公用之, 公以爲大夫, 後爲相, 遂霸天下.하니
近代君臣相得 寧有似我於卿者乎아하다


위징魏徵은 평소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능이 있었으며, 성격이 또 강직해서 굽히는 일이 없었다.
태종太宗이 그와 담소를 나눌 때마다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위징 역시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난 것을 기뻐해서 능력과 쓰임을 다하였다.
태종은 또 위징을 위로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거성去聲이니, 위로하다는 뜻이다.
“경이 전후로 간언한 200여 가지의 일은 모두 나의 생각에 들어맞는 것이었소.注+(걸맞다)은 거성去聲이다.
경이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소.”
정관貞觀 3년(629)에 여러 번 승진하여 비서감秘書監이 되어 조정 정사에 참여하였는데, 그는 깊이 생각하고 원대하게 계획을 세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태종은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경의 죄는 환공桓公의 허리띠 쇠 장식을 쏜 관중管仲보다도 크지만, 내가 그대를 신임하고 중용한 것은 환공이 관중을 대우한 것보다 낫소.注+(맞히다)은 거성去聲이다. 관중管仲은 이름이 이오夷吾이니, 나라 이다. 처음에 나라 양공襄公이 시해되어 임금을 세우려 논할 적에 고씨高氏국씨國氏가 먼저 땅에 있던 공자 소백小白에게 몰래 고하자, 나라 역시 군대를 동원하여 공자 를 전송하고 관중에게 따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라로 통하는 길목을 막도록 하였는데, 관중이 활을 쏘았으나 소백의 허리띠 쇠 장식에 맞았다. 규가 나라에 도착하고 보니 소백이 이미 임금이 되어 있었는데, 이 사람이 환공桓公이다. 관중은 죄수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포숙아鮑叔牙가 환공에게 그를 등용하도록 요청하니, 환공이 대부로 삼았고 그 후에 재상으로 삼아 결국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근대近代에 군주와 신하 간에 마음이 맞는 것이 어찌 나와 경과 같은 경우가 있겠소.”


역주
역주1 高國 : 高氏와 國氏로, 齊나라 대부이다.
역주2 (筥)[莒] : 저본에는 ‘筥’로 되어 있으나, 《史記》 권32 〈齊太公世家〉에 의거하여 ‘莒’로 바로잡았다.
역주3 鮑叔牙 : 齊나라 대부로 管仲과 절친한 친구이다. 포숙아는 관중의 어짊을 잘 알아주었지만 관중은 워낙 빈곤했기 때문에 포숙아를 항상 속이곤 했다. 그러나 포숙아는 끝까지 그를 잘 대우해 주었으므로 관중이 말하기를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鮑子였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고 하였다. 《史記 권62 管仲列傳》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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