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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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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尋拜靖光祿大夫尙書右僕射하고 賜實封五百戶
얼마 뒤에 이정李靖광록대부光祿大夫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하고 실봉實封 500호를 내려주었다.
又爲西海道行軍大總管하여 征吐谷渾注+胡昆切. 吐谷渾, 西域國名, 本遼東鮮卑, 徒河渉歸長子之名, 其孫葉延遂以其名爲氏.하여 大破其國하니 改封衛國公이라
서해도행군대총관西海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토욕혼吐谷渾을 정벌하여注+은〉 의 반절이다. 토욕혼吐谷渾은 서역의 나라 이름인데, 본래는 요동의 선비족鮮卑族이었다. 도하섭귀徒河渉歸의 큰 아들 이름인데, 그 손자 섭연葉延이 드디어 그 이름을 족종의 명칭으로 삼았다. 그 나라를 크게 격파하자 봉호를 고쳐 위국공衛國公에 책봉하였다.
及靖하여 有詔許墳塋制度 依漢衛霍故事注+衛青‧霍去病, 皆漢武時爲大將軍, 討匈奴有大功. 去病尙公主, 及亡, 詔與主合塟, 起冢象.하여象突厥內燕然山注+燕, 平聲. 吐谷渾內磧石二山하여 以旌殊績注+, 十四年, 靖妻卒, 有墳塋之詔. 及靖身亡, 四字疑誤. 十八年, 上幸其第問疾. 上將伐遼東, 靖入閣賜坐, 謂曰 “公南平吳會, 北淸沙漠, 西定慕容, 惟東有高麗未服. 公意如何.” 對曰 “臣往者憑藉天威, 薄展微效, 今殘年朽骨, 唯擬此行. 陛下若不棄, 老臣病其瘳矣.” 上愍其羸老, 不許. 二十三年, 薨, 贈司徒, 謚曰景武.이라
이정의 아내가 죽자 조서를 내려 그 무덤의 제도를 나라 위청衛靑곽거병霍去病의 고사에 의거해注+위청衛青곽거병霍去病은 모두 나라 무제武帝대장군大將軍으로, 흉노匈奴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곽거병이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죽은 뒤에 조서를 내려 합장하게 하여, 노산盧山의 모양처럼 무덤을 만들었다.을 쌓되 돌궐 내의 연연산燕然山注+(하북성 북부 지역)은 평성平聲이다.토욕혼吐谷渾 내의 적석산磧石山 두 산을 본떠 만들도록 허락하여 이정의 큰 공적을 표창하였다.注+사전史傳을 살펴보면, 정관貞觀 14년(640)에 이정李靖의 처가 죽자 우선 무덤을 만들라는 조서를 내렸다. ‘급정신망及靖身亡(이정이 죽자)’ 4자는 오류인 듯하다. 정관 18년(644)에 태종太宗이 그의 집에 행차하여 병문안을 하였다.
태종이 요동을 정벌하려 할 때 이정이 대궐에 들어오니 자리를 내주며 이르기를 “공은 남쪽으로 오회吳會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사막을 정리하였으며, 서쪽으로 모용慕容을 평정했는데, 오직 동쪽 고구려高句麗만 아직까지 복종시키지 못했으니, 공의 생각은 어떻소?”라고 하였다.
이정이 대답하기를 “신은 이전에 성상聖上의 위엄에 의지하여 작은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몸으로 오직 이번 정벌을 하려고 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버리지 않으신다면 노신의 병이 아마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가 병들고 연로한 것을 가엾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정관 23년(649)에 세상을 떠나자 사도司徒로 추증하였고, 시호를 경무景武라 하였다.
【集論】張氏九成曰
【集論】張九成이 말하였다.
當隋氏之際하고 承唐祖騰龍之時하여 而能依乗風雲하여 勒功帝籍者 豈有他哉
나라가 제위帝位를 잃을 때를 만나고 나라가 일어설 시기를 당하여 풍운風雲의 기회를 타고 황제의 공신록에 공적이 기록된 것은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特以根于忠智 故功名若是其顯也
다만 충성과 지혜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에 공명이 이처럼 드러난 것이다.
觀其用兵컨대 善於料敵하고 速於應機 故所嚮有功이라
이정李靖의 용병술을 살펴보면 적을 간파하기를 잘하고 임기응변에 신속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다.
南平吳하고 北破突厥하고 西走吐谷渾하여 功大寵盛이로대 乃能하니 可謂能自全矣
남쪽으로 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돌궐突厥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토욕혼吐谷渾에 달려가 공로가 크고 총애가 융성했는데도,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를 지켜 왕래하는 것을 사절하였으니, 스스로를 잘 보전하였다고 할 만하다.
始能免俘戮하고 終能保厥躬하니 勝於遠矣로다
처음에는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면하였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잘 지켜냈으니, 한신韓信보다도 더 낫다고 하겠다.”
愚按 太宗 天資英武하고 善戰無敵하여 一時群臣 皆不足以仰望淸光이나 帝之所推服而師問者 獨李靖一人而已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은 천부적 자질이 뛰어나고 용맹하며 전쟁을 잘하여 대적할 자가 없어서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맑은 광채를 우러러볼 수가 없었으나, 태종이 존경하여 따르고 군사에 관해 물었던 사람은 유독 이정李靖 한 사람뿐이었다.
蓋自以來 能將法度之師者 獨諸葛武侯與靖耳
손무孫武 이래로 법도에 맞는 군대를 거느린 사람은 제갈무후諸葛武侯(諸葛亮)와 이정뿐이다.
今世傳武經 雖未必出靖之手 要必有近似者
지금 세상에 전하는 무경武經(兵法書)이 비록 꼭 이정에 의해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요컨대 반드시 근사한 점이 있다.
其論이라하니 大意謂唐之戰勝 特暗合兵法耳 亦猶韓信謂漢高天授非人力 是也
곽읍霍邑의 전투를 논하면서 “이건성李建成이 거의 패배할 뻔한 것은 기병奇兵 때문이고, 태종太宗이 측면을 공격한 것은 정병正兵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대략적인 뜻은 나라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다만 은연중에 병법에 부합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니, 한신韓信 고조高祖를 두고 “하늘이 주신 것이지,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異時 太宗 伐遼無功而歸하여 謂靖曰 吾以天下之力으로 屈於小夷 何也오하니
그 뒤에 태종이 요동을 정벌했다가 성과 없이 돌아와서 이정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제패한 힘으로 작은 오랑캐에게 패배한 것은 무엇 때문이오?”라고 하니,
靖不答所問하고 顧曰 玆事 知之리이다하니
이정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딴 곳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일은 이도종李道宗이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蓋指 請分兵襲平壤之事也
이는 주필산駐蹕山 전투에서 병력을 나누어 평양平壤을 공격하자고 했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嗚呼 卽其所至而論이면 靖可謂知兵之聖者歟인저
아, 그의 경지에 대해 논한다면 이정은 병법을 아는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世以竝稱이나 要之컨대 李勣非靖之匹彚倫伍也
세상에서 ‘영위英衛’라 병칭하지만 요컨대 이적李勣은 이정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못된다.
역주
역주1 (身)[妻] : 저본에는 ‘身’으로 되어 있으나, 謝保成의 《貞觀政要集校》에 의거하여 ‘妻’로 바로잡았다.
역주2 : 무덤 앞에 세우는 문이다. 묻힌 이의 성명과 관작을 기록하였다.
역주3 廬山 : 盧山이라고도 한다. 匈奴 지역의 산이라 하며, 單于의 南庭이 있었다고 한다. 《資治通鑑 권21 漢紀 13 孝武皇帝 元封 5년》, 《同書 권34 漢紀 26 孝哀皇帝 建平 4년》
역주4 史傳 : 《舊唐書》 권67 〈李靖列傳〉에 보인다.
역주5 : 저본에는 ‘故’가 없으나, 《舊唐書》 권67 〈李靖列傳〉에는 이 글자가 없다.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역주6 喪鹿 : 鹿은 帝位를 말하니, 喪鹿은 제위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
역주7 闔戶自守 以謝過從 : 《舊唐書》 〈李靖列傳〉에 “李靖은 반란했다는 모함을 받았는데, 풀려난 이후로는 문을 닫아걸고 자신을 지키면서 빈객들을 사절하여 비록 친척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찾지 못하였다.[闔門自守 杜絶賓客 雖親戚不得妄進]”라고 하였다.
역주8 韓信 : 劉邦을 도와 漢나라를 창업한 한 명장이다. 그러나 반란죄에 걸려 참형을 당하였다.
역주9 孫武 : 春秋시대의 병법가이다. 兵法을 논한 《孫子》 13편이 있다. 吳王 闔閭의 명에 따라 궁중의 미인들을 상대로 전법을 시범 보이면서, 명령을 듣지 않는 왕의 寵姬 두 명을 참수하여 軍律을 엄하게 확립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孫子列傳》
역주10 霍邑之戰……太宗旁撃爲正兵 : 이 내용은 《新唐書》 권2 〈太宗本紀〉에 보인다. 隋나라 장군 宋老生과 霍邑에서 전투를 할 때에 唐 高祖는 李建成을 인솔하여 동쪽에 있었고 太宗과 柴紹는 남쪽에 있었는데 송노생이 동쪽을 압박하여 이건성이 말에서 떨어지고 고조는 군대를 퇴각시켰다. 태종이 남쪽 언덕으로부터 비탈을 달려 내려가서 군대를 나누어 송노생의 군대를 끊어 둘로 가르고 적진의 배후로 출동하자 송노생의 군대가 패하여 도주하니 마침내 송노생을 참수하였다.
역주11 道宗 : 李道宗(600~653)을 가리킨다. 자는 承范이며, 任城君, 江夏王으로 책봉되었다. 唐 高祖의 당질이다. 정관 19년(645), 예부상서로 있을 때 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일으키자, 종군하여 장군 이적의 군대와 함께 蓋牟城을 공략하였으며 안시성을 공략할 때 토산을 쌓을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역주12 駐蹕之戰 : 645년에 있었던 駐蹕山 전투를 말한다. 고구려와의 전쟁 중 唐 太宗이 지휘하는 唐나라의 대군과 이에 반격하는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안시성 부근 주필산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다.
역주13 英衛 : 李勣과 李靖을 말한다. 이적은 英國公, 이정은 衛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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