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謂侍臣曰 朕聞西州有警急하니 雖不足爲害나 然豈能無憂乎리오
往者初平高昌에 魏徵褚遂良이 勸朕立麴文泰子弟하여 依舊爲國한대
昔漢高祖遭平城之圍而賞婁敬
注+⑫ 昔漢高祖遭平城之圍而賞婁敬:漢高帝欲擊匈奴, 使婁敬使匈奴, 還報曰 “匈奴伏奇兵以爭利, 不可擊也.” 上怒曰 “齊虜以口舌得官, 迺今妄言沮吾軍.” 械繫敬至廣武. 遂至平城, 匈奴果出奇兵, 圍帝白登七日, 然後得解. 還至廣武, 赦敬曰 “吾不用公言, 以困平城.” 迺封敬千戶, 爲關內侯. 하고 袁紹敗於官渡而誅田豐
注+⑬ 袁紹敗於官渡而誅田豐:하니
注
【集論】范氏祖禹曰 魏徵之言은 其利害非不明也어늘 以太宗之智로 豈不足知之아
惟其好大而喜遠하며 矜功而徇名하여 不能以義制心이라
注
又曰 有國者喪師之禍小
하여 而或以霸
하니 이 是也
요
先王患德之不足하고 而不患地之不廣하며 患民之不安하고 而不患兵之不彊이라
太宗不從忠諫이라가 卒自咎悔어늘 況不若太宗之彊而可爲乎아
注
胡氏寅曰 中國은 禮義之地니 四夷所爲視效而賓服者也라
高昌有罪하여 王師討之할새 旣聞其喪인댄 是罪人已死니
則宜按兵遣使하여 立其嗣子하고 懷以恩信이 乃不攻而自服之道也어늘
是故以利言之하면 乘人之隙하여 迫以强暴하고 坐收數百里之地하여 斥廣輿圖하니 信足以夸耀一時언마는
以義言之하면 則窮兵遠討는 以高昌王一人桀驁之故나 而係累其孤하고 郡縣其土하니 仁者不爲也라
注
帝悔之하여 曰 魏徵褚遂良勸我復立高昌이어늘 吾不用其言하여 今方自咎耳라하다
初에 議處突厥於河南할새 徵爭之로되 而帝不從이라가 後以結社率之變而悔하고
後議以高昌爲郡縣할새 徵爭之로되 而帝復不從이라가 又以西突厥入寇而悔하니
注
通西域而開
하고 極城郭
하여 諸國悉服
은 實始於漢武
라
太宗滅高昌하고 置都護하여 由是爲開通西域之計하여
至于開元하여 自玉門以西로 烟火萬里하니 爲唐極盛이라
曾幾何時에 天寶以後로 事勢日非하여 前日之輿圖가 擧爲戎馬之郊矣라
정관貞觀 16년(642)에 이르러 서돌궐西突厥이 병사를 보내 서주西州를 침략하자
태종太宗이 근신近臣에게 말하였다. “짐朕이 듣건대 서주西州에 긴급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비록 해가 되지는 않으나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과거에 처음 고창국을 평정하자 위징과 저수량이 짐에게 권하기를 국문태의 자제를 왕으로 세워 예전대로 번국藩國으로 삼으라고 하였소.
짐은 끝내 그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오늘 비로소 후회하며 자책하고 있소.
옛날
한 고조漢 高祖는
평성平城에서 포위를 당하고서
누경婁敬에게 상을 내렸으며
注+한 고제漢 高帝가 흉노匈奴를 공격하려고 하여, 누경婁敬에게 흉노에 사신을 가게 하였는데 돌아와 보고하기를 “흉노는 기병奇兵을 숨기고 이로움을 다투니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고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제齊나라 포로 녀석(누경)이 말로 관직을 얻더니, 지금 허망한 말을 하여 우리 군사를 저상시키는구나.”라고 하고, 누경을 형틀에 묶어 구속하고 광무廣武에 이르렀다. 마침내 평성平城에 이르자 흉노가 과연 기병奇兵을 출동시켜서 고제를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 동안 포위하였다가 그 후에 포위가 풀렸다. 돌아오다가 광무에 이르러 누경을 석방하고 말하기를, “내가 공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평성에서 곤궁함을 당하였다.”라고 하고, 누경에게 1,000호戶를 봉해주고 관내후關內侯로 삼았다.,
원소袁紹는
관도官渡에서 패전하고서
전풍田豐을 죽였소.
注+한 헌제漢 獻帝 때에 조조曹操의 군대가 원소袁紹를 관도官渡에서 크게 격파하자, 원소는 8백 기병과 함께 황하를 건너 도주하여 여양黎陽에 이르렀는데 부하들이 조금 돌아왔다. 혹자가 전풍田豐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반드시 중용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전풍이 말하였다. “원소 공이 지금 패전해서 돌아와서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것이니, 나는 살 가망이 없소이다.” 원소가 봉기逢紀에게 말하기를 “전별가田別駕(전풍)가 이전에 간언하여 나를 말렸는데, 내가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하니, 봉기가 말하기를 “전풍이 장군께서 후퇴했다는 것을 듣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으니 자신의 말이 적중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하니, 원소는 마침내 전풍을 죽였다.
짐朕은 항상 이 두 가지 일로 훈계로 삼고 있으니 어찌 간언한 자를 잊을 수 있겠소.”
注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위징魏徵의 말은 그 이해利害가 분명한데, 태종의 지혜로 어찌 그것을 알지 못했겠는가.
다만 원대한 것을 좋아하고, 공을 자랑하고 명예만을 따라서 의리로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충언을 따르지 않게 되었고, 전대의 제왕을 모두 자신보다 못한 이로 보려고 하였다.”
注
또 말하였다. “국가를 소유한 자 중에 군사를 잃은 것으로 인한 화禍가 작아서 혹은 패자霸者가 되었으니, 진 목공秦 穆公과 구천勾踐이 이들이고,
땅을 얻은 것으로 인한 화禍가 커서 혹은 망했으니, 초 영왕楚 靈王과 제 민왕齊 湣王이 이들이다.
이 때문에 국토를 넓히는 것은 도덕을 넓히는 것만 못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강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선왕先王은 덕이 부족한 것을 근심하고 국토가 광대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으며, 백성이 편안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고 군사가 강하지 않은 것을 근심하지 않았으니,
강역의 밖에 성교聲敎가 미치지 않는 것으로 중국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
태종太宗도 충간忠諫을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스스로 책망하고 후회하였는데, 더구나 국력이 태종 때의 강성함만 못하면서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注
호인胡寅이 말하였다. “중국中國은 예의禮義의 지역이니, 사방 오랑캐가 보고 본받아 빈복賓服(사신을 보내 복종함)하는 대상이다.
고창왕高昌王이 죄가 있어서 왕자의 군대로 그를 토벌할 때에 이미 고창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이는 죄인이 이미 죽은 것이다.
마땅히 군사 행위를 그치고 사신을 보내서 그 후사를 임금으로 세우고 은혜와 믿음으로 품어주는 것이 공격하지 않고도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지금 상중喪中에 있는 이를 공격하여 예禮도 없고 의義도 없으니 어찌 천자의 군대라 하겠는가.
이 때문에 이익으로 말한다면 남이 경황없는 틈을 타서 강포强暴함으로 핍박하여 앉아서 수백 리의 땅을 거두어들여서 판도版圖를 넓게 개척하였으니, 진실로 한 시대에 과시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의리로 말한다면 병사를 끝까지 보내 멀리 토벌한 것은 고창왕高昌王 한 사람이 흉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고아를 결박하고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으니, 어진 자는 하지 않는 것이다.”
注
진덕수眞德秀가 말하였다. “이때에 저수량褚遂良도 역시 간언하였으나 태종太宗이 따르지 않았다.
정관 17년(643)에 서돌궐西突厥이 침입하자
태종이 후회하여 말하기를 ‘위징魏徵과 저수량褚遂良이 나에게 다시 고창왕을 세울 것을 권하였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지금 자책할 뿐이다.’ 하였다.
이전에 돌궐突厥을 하남河南(하수河水의 남쪽)에 살게 하는 것을 의논할 때에 위징이 간쟁하였으나 태종이 따르지 않았다가 후에 아사나결사솔阿史那結社率의 변란을 당하게 되자 후회하였고,
후에 고창高昌을 군현郡縣으로 삼는 것을 의논할 때에 위징이 간쟁하였으나 태종이 또 따르지 않았다가 또 서돌궐이 침입하자 후회하였다.
만일 태종이 일찍이 충언을 따랐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과실을 알고서는 후회하였으니 이것이 당唐나라가 흥성한 까닭이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하우夏禹 때 서융西戎이 성취되어 질서정연해진 뒤와 성주成周 때에 서려西旅가 조공을 바친 뒤로
서역西域과 통해서 옥문관玉門關을 열고 성곽을 높이 쌓아 모든 나라가 다 복종한 것은 실로 한 무제漢 武帝에서 시작되었다.
옥문관을 닫아 서역의 인질을 거절한 것은 광무제가 성대한 덕이 되는 까닭이다.
태종太宗이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도호都護를 설치하여 이에 따라 서역과 개통하려는 계획을 세워서
연지燕支‧소륵疎勒‧구자龜慈‧우전于闐 네 개의 진鎭이 마침내 변경 한 구석의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개원開元(당 현종唐 玄宗의 전기 연호) 시기에 이르러서는 옥문관에서 서쪽으로 밥 지어 먹는 연기가 만 리로 이어졌으니 당唐나라의 전성기였다.
오래되지 않아 천보天寶(당 현종의 후기 연호) 이후로 일의 형세가 날마다 잘못되어 지난날의 판도版圖가 모두 전쟁터가 되었다.
주공周公이 말하기를, “덕이 더해지지 않으면 군자는 그 예물을 받아 누리지 않고, 정령政令이 베풀어지지 않으면 군자는 그 사람을 신하로 삼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그 땅을 빼앗고 군현으로 만듦에 있어서랴.
땅을 넓히는 데 힘쓰는 것은 덕을 넓히는 데 힘쓰는 것만 못하니, 옛날의 훈계가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