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聞古者哲后臨朝
하고 明王創業
에 必
하여 廣諸德化
하고 不事遐荒
하나니
是以周宣薄伐
에 至境而反
注+⑤ 是以周宣薄伐 至境而反:周宣王名靖. 詩曰 “薄伐獫狁, 至于太原.” 言逐出之而不窮追也.하고 始皇遠塞
에 中國分離
注+⑥ 始皇遠塞 中國分離:.하니
陛下誅滅高昌
하사 威加西域
하시고 收其
하여 以爲州縣
하니
然則王師初發之歲
는 河西供役之年
注+⑦ 河西供役之年:供, 平聲.이니 飛蒭輓粟
에 十室九空
하고 數郡蕭然
하여 五年不復
이어늘
陛下每歲에 遣千餘人而遠事屯戍하시니 終年離別하여 萬里思歸하고
去者資裝을 自須營辦이라 旣賣菽粟하여 傾其機杼하고
經途死亡은 復在言外하고 兼遣罪人하여 增其防遏하니
所遣之內
에 復有逃亡
이라 官司捕捉
에 爲國生事
注+⑧ 爲國生事:爲, 去聲.하고
高昌途路가 沙磧千里요 冬風永冽하며 夏風如焚하여 行人遇之多死하나니
設令
注+⑨ 設令:平聲.張掖塵飛
하고 酒泉烽擧
注+⑩ 張掖塵飛 酒泉烽擧:張掖, 今爲甘州路, 酒泉, 今爲肅州路, 隷甘肅.면 陛下豈能得高昌一人菽粟而及事乎
잇가
由斯而言컨대 此河西者는 方於心腹이오 彼高昌者는 他人手足이니 豈得糜費中華하여 以事無用가
陛下平頡利於沙塞
하시고 滅吐渾於西海
하사되 突厥餘落
에 爲立可汗
하며 吐渾遺萌
에 更樹君長
注+⑪ 更樹君長:音掌.하니
復立高昌이 非無前例니이다 此所謂有罪而誅之하고 旣服而存之니
負戴洪恩하여 長爲藩翰하고 中國不擾하여 旣富且寧하리니
황문시랑黃門侍郞 저수량褚遂良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이 듣건대 옛날에 명철하신 군주가 조정을 다스리고 명철한 왕이 나라를 창건할 때에는 반드시 중국을 우선하고 이적夷狄을 뒤로 하여 덕화를 널리 펼치시고 먼 나라의 일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 선왕周 宣王은 〈
험윤獫狁(
흉노匈奴)을〉 잠시 정벌할 적에 국경에 이르러 돌아왔고
注+주 선왕周 宣王은 이름이 정靖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六月〉에 “잠깐 험윤을 정벌하여 태원太原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축출하였지만 끝까지 추격하지 않음을 말한다.,
진 시황秦 始皇은 멀리 장성을 쌓았을 적에 중국이 분열되었습니다.
注+진 시황秦 始皇이 몽념蒙恬에게 병사 30만 명을 데리고 출동하게 하여 하남河南 땅을 거두었는데, 44현縣이 된다.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지형에 따라 험한 지형을 제어하였다. 임조현臨洮縣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렀는데, 길이가 만여 리였다.
폐하께서는 고창국을 멸망시켜 위엄이 서역까지 떨치고 흉악한 우두머리들을 잡아서 그곳을 주현州縣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왕사王師가 처음 출정하던 해는
하서河西의 백성들이 노역을 제공하는 해였으니
注+공供(제공하다)은 평성平聲이다. 말먹이와 군량을 운송하느라 열 집에 아홉이 비게 되고 여러
군郡이 황폐하게 되어 5년 동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 해마다 1,000여 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먼 곳에 주둔하여 수비하게 하시니 해가 지나도록 혈육과 헤어진 채 만 리나 떨어진 곳에서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교대를 위해 떠나는 이들은 물자와 행장行裝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므로 이미 콩과 곡식을 팔아버리고 베틀과 북도 텅 비었습니다.
가는 길에 죽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울러 죄인을 파견하여 수비를 증강하였는데,
보낸 사람들 중에는 또 도망자가 있어서 관청에서 이들을 잡으러 다니니, 이 때문에 국가에 일이 발생합니다.
注+위爲(때문에)는 거성去聲이다.
고창국의 길은 사막 천 리나 되고 겨울바람이 얼음처럼 맹렬하며 여름 바람은 불처럼 뜨거워서 길 가는 사람들이 이 바람을 만나서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다스릴 때 혼란을 잊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설령
注+〈영令(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장액張掖에 변란이 일어나고
주천酒泉에 봉화가 오르면
注+장액張掖은 지금의 감주로甘州路이고 주천酒泉은 지금의 숙주로肅州路이니, 모두 감숙甘肅에 속한다. 〈군량로가 끊길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찌 고창국에 주둔한 군대에 1인분의 식량이라도 공급하여 사변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농우隴右의 여러 주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별똥처럼 달려가고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이 하서河西는 배와 가슴에 해당하고 저 고창국은 타인의 손과 발이니, 어찌 중국의 재화를 소비하여 소용없는 일을 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변방의 사막에 있는
힐리頡利를 평정하시고
토혼吐渾(
토욕혼吐谷渾)을
서해西海(
청해靑海)에서 멸망시키셨는데 돌궐의 남은 부락에
가한可汗을 세워주며 토혼의 남은 백성에게 다시
군장君長을 세워주었으니
注+〈장長(우두머리)은〉 음音이 장掌이다.,
고창국을 다시 세워주는 것은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른바 죄가 있으면 죽이고 항복하고 나면 존립시키는 것입니다.
의당 고창국에서 왕으로 세울 만한 자를 선발하고 불러들여 수령首領을 맡겨서 본국(고창)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폐하의 넓은 은혜를 받들어 오래도록 중국의 울타리가 될 것이고, 중국이 혼란에 빠지지 않아 부유하고 또 편안하게 될 것이니,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후대에 남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상소가 올라갔으나, 태종太宗이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