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정관정요집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七年 太宗 將發諸道注+ 太宗將發諸道:唐分天下爲十道, 一曰關內, 二曰河南, 三曰河東, 四曰河北, 五曰山南, 六曰隴右, 七曰淮南, 八曰江南, 九曰劍南, 十曰嶺南, 皆因山川形便, 而倂省之也.黜陟使注+ 黜陟使:使, 去聲. 後同. 將命而出掌黜陟臧否, 故曰黜陟使.할새 畿內道注+ 畿內道:畿內道, 唐建都之地, 卽關內道也. 未有其人이어늘
太宗 親定問於房玄齡等曰 此道事 最重하니 誰可充使
右僕射李靖曰 畿內事大하여 非魏徵이면 莫可니이다
太宗 作色曰
朕今欲向九成宮 亦非小 寧可遣魏徵出使
每行 不欲與其相離者 適爲其見朕是非得失注+ 適爲其見朕是非得失:爲, 去聲.이라
公等 能正朕이어든 不可因輒有所言이니 大非道理라하고
乃卽令李靖充使注+ 乃卽令李靖充使:令, 平聲. 按, 通鑑 “貞觀八年, 太宗欲分遣大臣爲諸道黜陟使, 未得其人, 李靖薦魏徵, 上曰 ‘徵箴規朕失, 不可一日離左右.’ 乃命靖與蕭瑀等凡十三人, 分行天下, ‘察長吏賢不肖, 問民疾苦, 禮高年, 振窮乏, 褒善, 起淹滯, 俾使者所至如朕親睹.’” 與此小異.하다
【集論】愚按 太宗 嘗問群臣호대 魏徵與諸葛亮孰賢가하니
岑文本 對曰 亮 才兼將相하여 非徵所及이라하니 斯言 是已
然嘗論之컨대 太宗有餘於才 而不足於德하고 勇於敢爲 而不能不爲러니
當時 能攻其所短하고 救其所偏 惟徵一人而已
使徵生於三國之時하면 未必能勝武侯之任이나 然使武侯生於太宗之時 不過爲徵之所爲耳
故以唐之時勢 觀之컨대 則二子 政未易優劣也
李靖之才 兼資文武하여 非徵所能及也
然貞觀之時 可以無靖이나 不可以無徵이니 何也
盖靖之才能 不過增太宗之所有餘 徵之諫爭 乃能補太宗之所不足也
是以 畿內之使 太宗寧使靖이언정 而不使徵 豈非自知之明哉


정관貞觀 7년(633)에 태종太宗제도諸道注+나라는 천하를 10개의 도로 나누었으니, 첫 번째는 관내關內, 두 번째는 하남河南, 세 번째는 하동河東, 네 번째는 하북河北, 다섯 번째는 산남山南, 여섯 번째는 농우隴右, 일곱 번째는 회남淮南, 여덟 번째는 강남江南, 아홉 번째는 검남劍南, 열 번째는 영남嶺南이다. 모두 산천山川의 형태에 따라 아우르고 줄인 것이다.출척사黜陟使를 파견하려 할 때注+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명령을 가지고 나가 잘잘못에 대해 권장하고 축출하는 일을 담당하므로 출척사黜陟使라 하는 것이다. 기내도畿內道注+기내도畿內道나라의 건도建都 지역이니, 바로 관내도關內道이다. 적합한 사람이 없었는데,
태종이 직접 물색하고 나서 방현령房玄齡 등에게 물었다. “이 의 일은 가장 중요하니 누가 출척사를 충당할 만하겠는가.”
우복야右僕射 이정李靖이 말했다. “기내도는 일이 커서 위징魏徵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태종이 엄숙한 얼굴로 말하였다.
이 지금 구성궁九成宮으로 향하려 한 것 또한 작은 일이 아닌데 어떻게 위징을 출척사로 내보낼 수 있겠소.
짐이 행차 때마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은 단지 짐의 옳고 그름과 잘되고 잘못된 점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오.注+(때문에)는 거성去聲이다.
공 등이 짐을 바로잡으려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니, 전혀 도리가 아니오.”
그리고는 즉시 이정을 기내도의 출척사로 충당하게 했다.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정관貞觀 8년(633)에 태종太宗이 대신들을 제도諸道출척사黜陟使로 나누어 파견하려 할 때 알맞은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정李靖위징魏徵을 추천하자, 태종이 ‘위징은 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어 하루도 곁을 떠날 수 없소.’라고 하고, 이정李靖소우蕭瑀 등 13인을 선발해 각지에 나뉘어 가도록 한 뒤, ‘장리長吏들의 잘잘못을 살피고 백성이 아파한 곳을 물어보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예우하고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고 선한 자를 포상하고 침체돼 있는 현자를 발탁해서, 출척사가 이르는 곳마다 짐이 직접 보는 것처럼 하게 하시오.”라고 하여, 이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다.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일찍이 뭇 신하들에게 묻기를, ‘위징魏徵제갈량諸葛亮 중에 누가 더 훌륭하오.’라고 하자,
잠문본岑文本이 대답하기를, ‘제갈량의 재능은 장수와 재상을 겸하여서 위징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라고 했으니, 이 말이 맞다.
하지만 일찍이 논하기를, 태종은 재능에는 여유가 있지만 이 부족하고 과감하게 실천하는 데는 용맹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지 못하니,
당시에 그 단점을 고치고 치우친 면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위징 한 사람뿐이었다.
위징이 삼국三國시대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의 임무를 해낼 것은 아니겠지만, 제갈무후가 당 태종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위징이 행한 것을 행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나라의 시대와 형세로 관찰해보면 두 사람은 정녕 그 우열을 논하기가 쉽지 않다.
이정李靖의 재능은 문무를 겸하고 있어서 위징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관貞觀의 시대엔 이정은 없어도 되지만 위징은 없어선 안 되니, 어째서인가.
이정의 재능은 태종의 남아돈 것을 증가시켜주는데 지나지 않지만, 위징의 간쟁諫爭은 태종의 부족한 것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내도의 출척사를 태종이 이정에게 맡길지언정 위징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어찌 스스로 분명하게 간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