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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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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初 太宗與黃門侍郞王珪宴語注+作貞觀二年十二月, 以黃門侍郞王珪爲守侍中, 上嘗閒居與珪語.할새 時有美人侍側注+美人, 女官九員, 充世婦之數.한대 本廬江王瑗之姬也注+廬江王, 名瑗. 太祖生蔚, 蔚生哲, 哲生瑗. 武德末, 爲幽州都督右領軍, 王君廓誘瑗反. 後瑗傳首至京師. 瑗敗 籍沒入宮이라
太宗指示珪曰
廬江不道하여 賊殺其夫而納其室이라
暴虐之甚하니 何有不亡者乎
陛下以廬江取之 爲是邪잇가 爲非邪잇가
太宗曰
安有殺人而取其妻어늘
卿乃問朕是非 何也
珪對曰
臣聞호니 於管子曰注+管仲著書十八篇, 曰管子. 齊桓公 之郭國注+齊桓公, 名小白. 郭, 小國, 齊滅之. 之, 猶往也.하여 問其父老曰 郭何故亡 父老曰 以其善善而惡惡也注+惡惡, 上烏去聲, 下如字, 後同.니이다
桓公曰 若子之言이면 乃賢君也어늘 何至於亡 父老曰 不然하니이다
郭君 善善而不能用하고 惡惡而不能去 所以亡也注+去, 上聲, 後同. 已上王珪述管子之言以爲喩也.
라하니이다
今此婦人 尙在左右 臣竊以爲聖心是之시니 陛下若以爲非하시면 所謂知惡而不去也니이다
太宗大悅하여 稱爲至善하고 遽令以美人還其親族注+令, 平聲. 按, 皆云 “帝雖不出此美人, 而甚重其言.” 與此異. 曰 “太宗賢主. 旣重珪言, 何得反棄而不用乎. 且美人, 汎左右, 又非嬖寵著名之人, 太宗何愛而留之. 此章爲是也.”하다
【集論】唐氏仲友曰
王珪納諫 皆人主情慾之際 人所難言이니 可謂無慙於魏徵矣
愚按 春秋傳曰 人誰無過리오마는 過而能改 善莫大焉이라하니
王珪之直言無諱 言人之所難言이요 太宗之改過不吝 改人之所難改
王珪進諫之誠 太宗納諫之美 方之古昔이라도 何以尙玆리오


정관貞觀 초기에 태종太宗황문시랑黃門侍郞 왕규王珪와 함께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때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 “정관貞觀 2년(628) 12월에 황문시랑黃門侍郞 왕규王珪수시중守侍中으로 삼고, 태종太宗이 한가할 때 왕규와 이야기를 나눴다.”라고 하였다.미인美人이 옆에서 모시고 있었는데,注+미인美人여관女官으로 인원이 아홉이고 세부世婦(宮中 여관女官)의 수에 포함된다. 그녀는 원래 여강왕廬江王 이원李瑗희첩姬妾이었으나注+여강왕廬江王은 이름이 이다. 태조太祖(李虎, 고조高祖 이연李淵조부祖父)가 이울李蔚를 낳고, 이위가 이철李哲을 낳고 이철이 이원李瑗을 낳았다. 무덕武德(618~626) 말엽에 유주도독우령군幽州都督右領軍이 되었는데 왕군곽王君廓이 이원을 꾀어 반란하도록 하였다. 훗날 이원의 머리가 경사京師(서울)에 전해졌다. 이원이 패망하면서 적몰籍沒되어 궁중으로 들어왔다.
태종이 그녀를 왕규에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였다.
“여강왕이 무도하여 그녀의 남편을 해치고 그녀를 첩실로 들였소.
포학함이 심하였으니,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소.”
왕규가 앉은 자리를 피해 일어나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여강왕이 첩실을 취한 것을 옳다고 보십니까, 그르다고 보십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어찌 사람을 살해하고 그 아내를 취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소.
그런데도 이 짐에게 옳고 그름을 묻는 것은 어째서요?”
왕규가 대답하였다.
이 들으니 《관자管子》에 이르기를注+관중管仲이 18편을 저술했는데, 이를 《관자管子》라 한다.나라 환공桓公나라로 가서注+ 환공桓公은 이름이 소백小白이다. 은 작은 국가인데, 나라가 멸망시켰다. (가다)과 같다. 그 원로에게 「郭나라가 왜 망한 것인가?」라고 묻자, 원로가 「善한 사람을 좋아하고 한 사람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注+악악惡惡은, 위 글자는 거성去聲(미워하다)이고, 아래 글자는 본래 음의音義대로 독해한다. 뒤에도 같다.
환공이 「그대의 말대로라면 훌륭한 임금인데, 왜 멸망에 이른 것인가?」라고 하자, 원로가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 임금이 선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라고 했다.’라고 했습니다.注+(버리다)는 상성上聲이다. 뒤에도 같다. 이상의 내용은 왕규王珪관자管子의 말을 서술하며 비유로 든 것이다.
지금 이 부인이 아직도 폐하의 좌우에 있는 것은 제가 추측해보건대 폐하께서 마음속으로 여강왕의 행동을 옳다고 여기고 계신 것이니, 폐하께서 만일 옳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이른바 악을 알고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태종이 크게 기뻐하여 아주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바로 미인을 그 친족에게 돌려보내게 하였다.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를 살펴보면, 모두 “태종太宗이 비록 이 미인美人을 내보내지는 않았지만 왕규王珪의 말을 매우 중시했다.”라고 하여, 이 내용과 다르다.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 “태종은 현명한 임금이니, 왕규의 말을 중시했으면서 어찌 도리어 버리고 쓰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미인美人은 좌우에서 시중드는 사람이고, 또 총애받거나 명성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태종이 어찌하여 그를 사랑하여 남겨두었겠는가. 이 장의 내용이 옳다.”라고 하였다.
【集論】唐仲友가 말하였다.
왕규王珪가 올린 간언은 모두 임금의 정욕情慾과 관련된 것이어서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위징魏徵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할 만하다.”
내가 살펴보건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선공宣公 2년에 이르기를 “어느 누군들 과오가 없겠는가마는 과오를 범하고 바로잡으면 이보다 더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왕규王珪가 회피하지 않고 직언直言한 것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 것이고, 태종太宗이 주저하지 않고 과오를 바로잡은 것은 사람들이 바로잡기 어려운 것을 바로잡은 것이다.
왕규가 간언한 정성과 태종이 간언을 받아들인 미덕은 옛 역사에 견주어 보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역주
역주1 避席 : 앉은 자리를 피해 일어나서 공경을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2 齊桓公之郭……所以亡也 : 《春秋集義》 권15 莊公 24년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역주3 通鑑 : 《資治通鑑》 권193 唐紀 9 太宗에 보인다.
역주4 新舊史 : 《新唐書》 〈王珪列傳〉과 《舊唐書》 〈王珪列傳〉에 보인다.
역주5 通鑑考異 : 《資治通鑑考異》 권10 唐紀 2 太宗 貞觀 원년에 보인다.
역주6 (待)[侍] : 저본에는 ‘待’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考異》에 의거하여 ‘侍’로 바로잡았다.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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