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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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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二年 太宗問魏徵曰
何謂爲明君暗君
徵曰
君之所以明者 兼聽也 其所以暗者 偏信也니이다
詩云 有言호대 詢於芻蕘注+詩大雅板篇之辭. 芻蕘, 採薪之人, 言雖賤而不棄也. 人, 詩作民, 蓋避太宗諱, 故以人代民, 他皆類此.라하니이다
昔唐虞之理注+堯曰陶唐氏, 舜曰有虞氏. 理本作治, 蓋避高宗諱, 故以理代治, 他皆類此. 闢四門하며 明四目하며 達四聰注+虞書, 史贊舜之辭, 謂開四方之門, 以來天下之賢俊, 廣四方之視聽, 以决天下之壅蔽也.하니
是以 聖無不照
故共鯀之徒 不能塞也注+共, 音恭. 鯀, 音衮. 共工, 唐虞官名, 古之世族官也. 鯀, 崇伯名, 夏禹父也. 共工淫辟, 鯀治水無功, 舜流共工于幽州, 殛鯀于羽山. 塞, 猶蔽也. 靖言庸回 不能惑也注+虞書曰 “靜言庸違.” 靖, 與靜同. 回, 亦違也. 謂靜則能言, 用之則不然也.니이다
秦二世 則隱藏其身하여 捐隔疎賤하고 而偏信라가 及天下潰叛하여도 不得聞也注+捐, 音員, 棄也. 秦二世, 始皇少子, 名胡亥, 嗣位, 號二世皇帝. 趙高, 秦宦者, 二世用之爲相. 二世常居禁中, 公卿希得朝見, 盜賊益多, 二世後爲高所弑.하고
梁武帝 信朱异라가 而侯景擧兵向闕하여도 竟不得知也注+异, 羊吏切. 梁武帝, 姓蕭名衍, 仕齊, 封梁王, 受齊禪, 國號梁. 朱异, 仕梁, 爲散騎常侍. 侯景, 東魏臣, 叛歸魏, 復請歸梁, 武帝從朱异之議, 納景爲大將軍. 及景反叛, 朝野共怨异. 武帝後爲景所逼, 餓而死.하고
隋煬帝 偏信虞世基라가 而諸賊攻城剽邑하여도 亦不得知也注+剽, 音漂, 刼也. 隋煬帝, 姓楊名廣, 文帝次子也. 虞世基, 仕隋爲内史侍郎. 世基, 以帝惡聞盜賊, 告者皆不以實聞, 由是盜賊競起, 陷沒郡縣, 皆不之知. 煬帝後爲宇文化及等所弑.니이다
是故 人君兼聽納下하면 則貴臣不得壅蔽하여 而下情必得上通也리이다
太宗 甚善其言하니라
【集論】
善哉 太宗之問 魏徵之對也
可謂得其要矣로다
夫聖人 以天下爲耳目이라 故聰明하고 庸君 以近習爲耳目이라 故暗蔽로다
明暗之分 惟在於遠近大小而已矣로다
兼聽하면 則公正忠讜進하고 偏信하면이라
此魏徵論聽納任用之本이라
愚按太宗 問明君暗君한대 魏徵 謂兼聽者明하고 偏信者暗이라하니 玆言固簡而當矣로다
然兼聽偏信 此自外至者也 明之與暗 又有存於中者焉이라
乃其澄徹 如鑑之空하며 如衡之平하여 妍媸輕重 隨物而見者也 彼昧者昏者 反是
此又明暗之所分이라 蓋偏信 固易於蔽하고 而兼聽 亦有所當擇이나 惟明足以燭理 何施而不可哉
君天下者 欲進於堯舜之明인댄 當自格物致知之學始


정관貞觀 2년(627)에 태종太宗위징魏徵에게 물었다.
“무엇으로 명군明君암군暗君이라 하오?”
위징이 말하였다.
“임금이 명철해지는 것은 널리 듣기 때문이고 어두워지는 것은 한쪽만 신임하기 때문입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에 이르기를 ‘선현이 말하기를 나무꾼에게도 물으라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注+시경詩經》 〈대아大雅 〉의 가사이다. 추요芻蕘는 땔나무를 하는 사람이니, 비록 비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버리지 않음을 말한다. 은 《시경詩經》에 으로 썼으니, 태종太宗(世民)의 이름을 피한 것이다.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옛날에 요제堯帝순제舜帝가 다스릴 적에는注+도당씨陶唐氏이고 유우씨有虞氏이다. 는 본래 로 쓰였는데 고종(李治)의 이름을 피하였기 때문에, 로 바꾼 것이다.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사방의 문을 열어두며, 사방 사람의 눈으로 밝게 보며, 사방 사람의 귀로 들었습니다.注+이는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에서 사관史官임금을 찬양한 말이니, 사방 문을 열어 천하의 훌륭한 현인을 오게 하고, 사방의 언로言路를 넓혀 천하의 막힌 것을 트이게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제堯帝순제舜帝의 성스러움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공共工의 무리들이 총명을 가리지 못하였고,注+은 음이 이고, 은 음이 이다. 공공共工당우唐虞(堯舜) 시대의 관명官名이니, 옛날에 세족世族의 대물려 받은 관직이다. 숭백崇伯의 이름이니, 나라 임금의 아버지이다. 공공은 음탕하였고 곤은 홍수를 다스려 공로가 없자, 이 공공을 유주幽州로 유배시키고 곤을 우산羽山에서 죽였다. (가리다)와 같다. 조용할 때는 말을 잘하나 등용되어서는 그와 어긋나는 행동이 총명을 미혹시킬 수 없었습니다.注+서경書經》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말하기를 “조용할 때는 말을 잘하나 등용되어서는 어긋났다.”라고 하니, (조용하다)과 같고 (어긋나다)의 뜻이다. 조용할 때는 말을 잘하나 등용되어서는 그렇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는 자신을 숨겨 소원한 신하를 버리며 천한 백성들을 멀리 하고 조고趙高 한 사람만 신임하다가 천하가 무너지고 반란이 일어나도 그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注+은 음이 이니, 버린다는 뜻이다. 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시황제始皇帝의 작은 아들이니, 이름은 호해胡亥이고 시황始皇의 지위를 계승하여 이세황제라고 일컬었다. 조고趙高나라 환관宦官이었는데 이세황제가 재상宰相으로 기용하였다. 이세황제가 늘 깊은 궁중에 거하여 공경대신公卿大臣들도 드물게 알현할 수 있었고 도적이 더욱 많이 일어났다. 이세황제는 뒤에 조고에게 피살되었다.
나라 무제武帝주이朱异만 신임하다가 후경侯景이 군대를 일으켜 궁궐로 향해도 끝내 알지 못하였습니다.注+의 반절이다. 나라 무제武帝(464~549)는 이고 이름이 이니, 나라에 벼슬하여 양왕梁王에 봉해지고 나라에게 선위禪位를 받아 국호國號이라고 하였다. 주이朱异나라에 벼슬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 후경侯景동위東魏의 신하였는데 배반하여 나라에 귀순하였다가 다시 나라에 귀순하기를 청하자, 무제가 주이의 논의를 따라 후경을 받아들여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후경이 반란하자 조정과 재야가 함께 주이를 원망하였다. 무제는 뒤에 후경에게 핍박을 받아 굶어 죽었다.
나라 양제煬帝우세기虞世基 한 사람만 신임하다가 여러 역적들이 성을 공격하고 읍을 약탈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注+는 음이 이니, 겁탈한다는 뜻이다. 양제煬帝(569~618)는 이고 이름이 이니,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이다. 우세기虞世基나라에 벼슬하여 내사시랑内史侍郎이 되었다. 우세기는 양제가 도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기를 싫어한다 하여 고할 적에 모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이 다투어 일어나서 군현郡縣을 함락시켰으나 〈황제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지 못했다. 양제는 뒤에 우문화급宇文化及 등에게 피살되었다.
그러므로 임금이 널리 듣고서 아랫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높은 신하가 임금의 총명을 막아 가리지 못하여 아랫사람의 실정이 반드시 임금께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종이 그 말을 매우 훌륭하게 여겼다.
【集論】范祖禹가 말하였다.
“훌륭하구나, 태종太宗의 질문과 위징魏徵의 대답이여.
그 요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성인聖人은 천하 사람들을 귀와 눈으로 삼기 때문에 총명하고, 용렬한 임금은 근신近臣을 귀와 눈으로 삼기 때문에 어둡다.
밝음과 어두움의 구분은 원대遠大하게 하느냐 근소近小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널리 들으면 공정公正하고 충직한 이가 나오고, 한쪽 말만 믿으면 물이 스며드는 듯한 참소와 살을 에는 듯한 비방이 행해진다.
이것은 위징魏徵이 간언을 받아들이고 인재를 임용하는 근본을 논한 것이다.”
내(戈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명군明君암군暗君을 묻자 위징魏徵이 널리 듣는 이는 밝고 한쪽 말만 믿는 이는 어둡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간결하고 적당하다.
그러나 널리 듣는 것과 한쪽 말만 믿는 것은 외면에서 오는 것이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은 또 마음에 있는 것이다.
임금의 흠명欽明임금의 총명聰明은 속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이 깨끗한 거울과 같으며 평평한 저울대와 같아서 미추美醜와 경중이 사물에 따라 드러나고, 저 어둡고 흐린 자는 이와 반대이니, 이것이 또 밝음과 어두움이 구분되는 것이다.
한쪽 말만 믿는 것은 참으로 가려지기 쉽고, 널리 듣는 것도 당연히 채택해야 하지만 오직 밝음이 이치를 밝게 알기에 충분하다면 무엇을 시행한들 불가능하겠는가.
천하의 제왕이 요임금‧순임금의 밝음에 나아가려 한다면 당연히 격물格物치지致知의 학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역주
역주1 先人 : 《詩經》 〈大雅 板〉의 集傳에 “先民(先人)은 옛날의 현인이다.[先民 古之賢人也]”라고 하였다.
역주2 趙高 : ?~B.C.207. 秦나라 사람으로, 二世皇帝를 시해하고 이세황제의 아들 子嬰을 秦王으로 세웠으나 자영에게 피살되었다.
역주3 范氏祖禹 : 1041~1098. 范祖禹는 北宋의 학자‧관원이며 進士 출신이다. 司馬光 밑에서 《資治通鑑》을 편수했다. 관직은 給事中‧翰林學士 등을 역임했다. 新法을 두둔했다는 여론이 일자 武安軍節度副使로 貶謫되고 永州에 安置되었다. 程顥와 程頤를 사사했으며, 사마광의 학문을 추종했다. 시호는 正獻이다.
역주4 唐氏仲友 : 1136~1188. 唐仲友는 南宋의 학자‧관원이며 進士 출신이다. 관직은 秘書省正字‧通判建康府를 역임하고 江西提刑에 발탁되었지만 朱熹에게 탄핵을 받고 파직된 뒤 저술 활동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經世致用學을 강조하여 佛敎와 老莊을 배척하고 당시의 心學도 반대하고 주희의 理學 위주의 학문도 반대하고, 天文‧地理‧刑政 등 경세에 유익한 학문을 추구했다.
역주5 浸潤膚受 : ‘浸潤之譖’은 물이 점점 스며들듯이 점점 믿도록 만드는 참언을 뜻하고, ‘膚受之愬’는 살을 에는 듯한 통절한 呼訴로써 듣는 사람이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믿게 만드는 참소를 뜻한다. 모두 임금을 고혹하게 만드는 간신의 소행을 말한다. 《論語 顔淵》
역주6 堯之欽明 : 欽明은 공경하고 밝다는 뜻으로 요임금의 덕을 형용한 말이다. 《書經》 〈虞書 堯典〉에 “옛날 요임금을 상고하건대 放勳이시니, 공경하고 밝고 문채롭고 생각함이 편안하고 편안하시며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하시어 광채가 四表에 입혀지시며 상하에 이르셨다.[曰若稽古帝堯 曰放勳 欽明文思安安 允恭克讓 光被四表 格于上下]”라고 하였다.
역주7 舜之聰明 : 聰明은 ‘明四目 達四聰’의 줄임말로, 《書經》 〈虞書 舜典〉에 순임금이 즉위하고 나서 “四岳에게 자문을 구하며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 사방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의 귀로 자신의 귀를 통하게 하였다.[詢于四岳 闢四門 明四目 達四聰]”라고 하였다.
역주8 中扃(경) : 마음으로, 內心을 뜻한다.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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