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元年
에 拜幷州都督
注+幷州, 卽太原. 唐制, 武德七年, 改總管曰都督, 立府置佐.하여 令行禁止
하니 號爲稱職
注+稱, 去聲.하고
隋煬帝
는 不解精選賢良
注+解, 音懈.하여 鎭撫邊境
하고 惟遠築長城
하고 廣屯將士
注+將, 去聲.하여 以備突厥
注+隋大業三年, 詔發丁男百餘萬築長城, 西距楡林, 東至紫河, 旬而畢工.하니 而情識之惑
이 一至於此
아
朕今委任李勣於幷州한대 遂得突厥畏威遠遁하여 塞垣安靜하니 豈不勝數千里長城耶아하다
其後
에 幷州改置大都督府
하고 又以勣爲長史
注+長, 音掌.하고 累封英國公
이라
太宗
이 自剪鬚爲其和藥
注+爲‧和, 竝去聲, 後同.이어늘 勣
이 頓首見血
하고 泣以陳謝
한대
十七年
에 高宗居春宮
할새 轉太子詹事
注+唐制, 東宮官, 掌統三寺‧十率府之政.하고 加特進
하여 仍知政事
라
朕將屬以孤幼
注+屬, 音囑.하노니 思之
에 無越卿者
라
俄沈醉
한대 御服覆之
注+覆, 音副.하니 其見委信
이 如此
라
勣每行軍에 用師籌筭하고 臨敵應變하여 動合事機라
自貞觀以來
로 討擊突厥頡利及薛延陀
注+北狄國名. 本延陀部與薛種雜居, 號薛延陀. 貞觀中, 拔灼立, 勣滅其國, 置爲州縣.高麗等
하여 竝大破之
라
李靖李勣二人
을 古之韓白
注+漢將韓信秦將白起也.衛霍
注+見前註.이 豈能及也
注+按, 二十三年, 帝疾, 謂太子曰 “李勣才智有餘, 然汝與之無恩, 恐不能懷服. 我今黜之, 若其卽行, 俟我死, 汝用爲僕射, 親任之, 若徘徊顧望, 當殺之.” 乃授疊州都督, 受詔, 不至家而去. 高宗立, 召進僕射. 後欲立武昭儀爲后, 畏大臣異議, 未決. 帝密訪勣, 勣曰 “此陛下家事, 無須問外人.” 帝意遂定, 詔勣奉冊立武氏. 總章二年, 卒, 贈太尉, 謚曰貞武.리오하다
以爲愚也면 則不可託幼孤而寄天下矣요 以爲賢也면 當任而弗疑어늘 何乃憂後嗣之不能懐服하여 先黜之而後用之아
高宗欲廢立
이나 而猶難於
하고 取決於勣之一言
하니 勣若以爲不可
면 則武氏必不立矣
라
勣
이 非惟不諫
이요 又勸成之
하니 孽后之立
에 無忌遂良之死
와 은 皆勣之由
니 其禍豈不博哉
아
太宗
이 以勣爲忠
이라 故託以幼孤
나 而其大節如此
하니 가 信矣
로다
古者에 不盟하고 結言而退하니 蓋人不愛其情하여 相命而信喩矣라
逮德下衰하여 疑阻猜貳하여 至于刑牲㰱血이라도 曾未旋踵하여 又已背之라
是故
로 孔子於春秋
에 不貴盟誓
하고 而善
하니 取
欲人之惇信
하여 而不食言也
라
若李勣齧指出血
하여 以受太宗之託
은 若不爲負義者
나 而於
廢興之際
에 以
이어든 則不必待如
然後
에 爲隳大節也
라
夫以言許人者도 猶恐非其本心이어늘 勣受託而無一言하고 徒齧指出血而已니 使當堯舜之智라도 豈得遁乎아
太宗이 以勣守邊은 可謂善用人矣나 至其任以託孤之寄하여는 則非其所能也라
按吳起與田文論功할새 起曰 將三軍하여 使士卒樂死하여 敵國不敢謀는 子孰與起오하니 文曰 不如라하고
治百官하고 親萬民하며 實府庫는 子孰與起오하니 文曰不如라하다
가 皆出吾下
로되 而位加吾上
은 何也
오하니 文曰 主少國疑
하여 大臣未附
하고 百姓不信
하니 方是之時
하여屬之子乎
아
蓋勣之賢於長城이나 是亦吳起之所長이어늘 而太宗以之處田文之任하니 宜其敗也로다
夫不負人은 固可任以事요 至於關朝廷之重하여는 則非不負者能之라
如立武氏之說은 彼豈有意於負太宗者며 奈何利害所在리오
噫
라 以
之少文
으로 幾陷呂氏之禍
하고 以
之重厚
로 猶有所不免
하니 皆不學無術所以致也
라
愚按 太宗이 英武將略은 優於漢高나 至於知人料事하여는 不及漢高遠矣니 其間章章較著者는 李勣之事가 是也라
自今觀之컨대 勣之爲人이 外若純慤이나 内任術數하여 非特太宗不能知요 至今人不能知하니 何也오
勣이 始事翟讓에 讓爲李密所誅어늘 勣不能死하고 後爲竇建徳所敗하여 屈伏請降하고 復不能死라
勣始與單雄信으로 誓同死生이로대 雄信誅어늘 又不能死하니 其名節이 如此라
太宗이 信其區區之小節하여 遂謂可以託孤라하니 過矣라
太宗之將終也에 黜勣爲疊州都督하고 謂太子曰 勣若卽行이면 汝用爲相하고 若不卽行이면 汝必殺之라하니 勣聞命不辭家而去라
夫太宗之術數가 可謂精矣나 孰知勣之術數가 又高出於其上哉아
厥後에 武氏之立에 竟以勣一言而定하여 而唐之子孫이 幾盡於武氏之手하니 蓋太宗이 以術數待勣이라 故勣이 亦以術數報之요 固不暇爲唐社稷計也라
吾後子孫有交遊非類者
면 汝必殺之
라한대 異時
에 擧兵覆宗
이라가 至毁冢而暴骨
이라
정관貞觀 원년(627)에
병주도독幷州都督에 임명되어
注+병주幷州는 바로 태원太原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무덕武德 7년(624)에 총관을 도독으로 개칭하였으며, 부府를 세우고 부관副官을 두었다.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하면 멈추니, 직책에 걸맞다고 일컬어졌다.
注+칭稱(걸맞다)은 거성去聲이다.
“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어진 인재를 가려 뽑아 변방을 안정시킬 방안을 강구하지 못하고
注+해解(게으르다)는 음이 해懈이다. 오직 멀리까지 장성을 쌓고 많은 병사들을 널리 주둔시켜
注+장將(장수)은 거성去聲이다. 돌궐을 방비하려 했으니,
注+수隋나라 대업大業 3년(607)에 조서를 내려 장정 백여만 명을 징발해 장성을 축조하게 했는데 서쪽으로 유림楡林에서부터 동쪽으로 자하紫河까지였으며, 10일 만에 공사를 마쳤다. 그 감각과 식견의 혼미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이오.
짐이 지금 병주幷州를 이적李勣에게 위임하자, 결국 그 위세를 두려워한 돌궐이 멀리 달아나 변방이 안정되었으니, 어찌 수천 리 장성보다 나은 것이 아니겠소.”
그 뒤 병주에 새로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설치하고 이적을
장사長史로 임명하였으며,
注+장長(우두머리)은 음이 장掌이다. 여러 번 승진시켜
영국공英國公에 책봉하였다.
병주에 재임한 기간이 총 16년이었으며, 그 뒤 조정에 불러들여 병부상서兵部尙書 겸지정사兼知政事에 임명하였다.
이적李勣이 이때 갑자기 병이 났는데, 의원의 처방전에 수염을 태운 재가 있어야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태종太宗이 직접 수염을 잘라 그를 위해 약에 섞으니,
注+위爲(위하다)와 화和(섞다)는 모두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이적이 피가 나도록 머리를 바닥에 부딪고 울면서 사례를 하였다.
“나는 사직을 위한 계책을 따른 것일 뿐이니 번거롭게 깊이 사례할 것 없소.”
정관貞觀 17년(643)에
고종高宗이
춘궁春宮(태자)에 있을 때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전임되었고,
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태자첨사太子詹事는〉東宮의 관원이니, 삼사三寺와 십솔부十率府의 정무를 총괄하는 일을 관장한다.특진特進이 더해져서 그대로 정사를 담당하였다.
태종이 또 일찍이 연회에서 이적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짐이 어린 태자를 부탁할 사람을 찾는데
注+촉屬(맡기다)은 음이 촉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만 한 사람이 없소.
공이 지난날 이밀을 버리지 않았는데 지금 어찌 짐을 저버리겠소.”
이적이 눈물을 닦으며 감사의 말을 올리고 이어서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어느덧 술에 취해 떨어지자 태종이 자기 옷을 벗어 덮어주었으니,
注+복覆(덮다)는 음이 부副이다. 그가 위임과 신뢰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적이 군사를 운용할 때에는 정확한 계책에 맞춰 병사들을 움직였고, 적과 싸울 때에는 임기응변하여 움직일 때마다 사기事機에 부합하였다.
정관 연간 이후로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과
설연타薛延陀,
注+〈설연타薛延陀는〉北狄의 국명國名이다. 본래 연타부延陀部와 설종薛種이 섞여 살아서 설연타薛延陀라 불렀다. 정관貞觀 연간에 발작拔灼이 즉위하자 이적李勣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고구려高句麗 등의 정벌에 나서 모두 크게 격파했다.
“
이정李靖과
이적李勣 두 사람을 옛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
注+〈한백韓白은〉漢나라 장군 한신韓信과 진秦나라 장군 백기白起이다.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注+〈위곽衛霍은〉앞의 주註에 보인다.이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注+사전史傳을 살펴보면, 정관貞觀 23년(649)에 태종太宗이 병이 나자 태자(高宗)에게 이르기를 “이적李勣이 재주와 지혜가 충분하나 네가 그와 은혜 관계가 없으니, 내가 그를 심복시키지 못할까 우려된다. 내가 지금 그를 내칠 터이니, 그가 곧장 떠나면 내가 죽은 뒤에 네가 그를 등용하여 복야僕射(복야)로 삼아 가까이하고 신임 할 것이요, 만약 주저하고 관망하면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다.”라 하고, 첩주도독疊州都督에 임명하였는데, 조서를 받고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떠났다. 고종이 제위에 오른 뒤 그를 불러서 복야로 승진시켰다. 그 뒤(永徽 6년, 655)에 무소의武昭儀(則天武后)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대신들이 반대의 의견을 낼까 두려워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고종이 은밀히 이적에게 묻자, 이적이 말하기를 “이는 폐하의 집안일이니 외부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종이 결국 생각을 굳히고 이적에게 조서를 내려 책서冊書를 받들어 무씨武氏를 황후로 책위冊位하였다. 총장總章 2년(669)에 세상을 떠나니, 태위太尉에 추증하고 시호를 정무貞武라 하였다.
“태종太宗이 이적李勣을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는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면 어린 태자를 부탁하고 천하를 맡겨서는 안 되며, 현명하다고 생각했다면 맡기고 의심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하여 태자가 그를 심복시키지 못할까 염려하여 우선 내친 다음 다시 등용하게 하였는가.
이는 그를 개와 말처럼 대우한 것이니, 어찌 요堯임금‧순舜임금이 어진 이를 친히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이익과 녹봉만을 추구하는 선비 정도는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당唐 고종高宗이 황후를 폐하고 새로 세우려고 하면서 오히려 고명대신을 어렵게 여기고 이적의 말 한마디에 생각을 결정하였으니, 이적이 만약 안 된다고 했다면 무씨武氏는 분명 황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적이 간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장하여 이루도록 했으니, 비빈妃嬪이 황후皇后에 오른 뒤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褚遂良이 죽고 당唐나라 황실이 중간에 끊어진 것은 모두 이적에게서 연유된 것이니, 그 재앙이 어찌 크지 않은가.
태종太宗이 이적을 충신이라 생각하였으므로 어린 태자를 부탁하였으나 그의 큰 절개라는 것이 이러했으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요제堯帝도 어렵게 여겼다.’고 한 말이 믿을 만하다.
“옛날에는 맹약을 하지 않고 말로만 약속하고 물러났으니, 이는 사람이 그 감정을 아끼지 않아 서로 말로만 약속해도 믿은 것이다.
덕이 후대로 갈수록 쇠퇴하여 의심과 시기와 배신이 난무하여,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며 맹약을 하고도 발길을 채 돌리기도 전에 금세 배반을 하였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서 맹세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서명胥命을 훌륭하게 여겼으니, 순식荀息이 사람들에게 신의를 독실히 지켜 말한 것을 저버리지 않게 하고자 한 점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이적李勣이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태종太宗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듯하였지만 왕씨王氏를 폐위하고 무씨武氏를 황후로 세울 때에 말 한 마디로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굳이 이극里克과 같은 자를 기다린 뒤에야 큰 절의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말로 남에게 허락하는 사람도 오히려 그 본심이 아닐까 염려하는데, 이적은 태종太宗의 부탁을 받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피가 나도록 손가락만 깨물었을 뿐이니, 설령 요堯임금‧순舜임금의 지혜에 필적하더라도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태종太宗이 이적李勣에게 변방을 지키도록 한 것은 인물을 잘 쓴 것이라 할 수 있으나, 태자를 부탁하는 일을 맡긴 것은 이적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살펴보건대 오기吳起가 전문田文과 공을 논할 때, 오기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기꺼이 싸우게 하여 적이 감히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대와 나 가운데 누가 더 낫소?’라고 하니, 전문이 ‘그대만 못하오.’라고 하였고,
‘백관百官을 다스리고 온 백성을 사랑하며 창고를 꽉 채우는 일에 있어서는 그대와 나 가운데 누가 더 낫소?’라고 하니, 전문이 ‘그대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이 세 가지가 다 나보다 못한데 지위가 나보다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이오?’라고 하니, 전문이 말하기를 ‘군주는 어리고 나라는 혼란하여 대신들이 따르지 않고 백성들이 믿지 않는데, 이러한 때에 국정國政을 그대에게 맡기겠소?
나에게 맡기겠소?’라고 하니, 오기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그대에게 맡길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적이 만리장성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해도 이 역시 오기의 장점일 뿐인데, 태종이 전문에게 맡겨야 할 임무를 그에게 맡겼으니, 실패를 한 것이 당연하다.”
“이적李勣은 본래 그다지 큰 장점은 없고 다만 남을 배신하지 않는 정도일 뿐이다.
남을 배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일을 맡길 수 있지만 조정의 중요한 일과 관련된 경우에는 남을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컨대 무씨武氏를 황후로 세우는 설의 경우에는 이적이 어찌 태종太宗을 배반할 마음으로 그런 것이겠으며, 또 무슨 이해관계가 걸려있어 그런 것이겠는가.
이적이 배움이 없어 이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아, 식견이 부족했던 주발周勃이 여씨呂氏의 재앙에 걸려들 뻔하였고, 중후했던 곽자맹霍子孟도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모두 배움이 없고 계책이 없어서 야기된 일들이다.
하물며 이적의 한 마디 말의 잘못 때문에 후일의 재앙이 이러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무예와 장수의 도량은 한漢나라 고조高祖보다 낫지만 사람을 알아보고 일을 예측하는 것은 한 고조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니, 비교적 분명히 드러난 예 중 하나가 이적李勣에 관한 것이다.
지금 살펴보면, 이적의 인물됨이 겉으로는 순진하고 성실한 듯하지만 속으로는 술수를 부려 태종이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사람들도 알 수가 없으니 그것은 어째서인가.
이적이 처음에 적양翟讓을 섬겼을 때, 적양은 이밀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나 자신은 죽지 않았고, 나중에 두건덕에게 패하였을 때 굴복하여 항복을 청하고 또 죽지 않았다.
이적이 애초에 단웅신單雄信과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약을 맺었을 때 단웅신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는 또 죽지 않았으니, 그 명성과 절의가 이와 같았다.
다만 이밀이 패망했을 때만은 절의를 지켜서 이밀이 살아 있을 때는 그에게 공을 미루고 이밀이 죽었을 때는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태종이 그의 미미한 작은 절의를 믿고, 결국 태자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것이다.
태종이 죽음에 임박하여 이적을 내쳐 첩주도독疊州都督으로 삼은 뒤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적이 곧장 떠나면 네가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을 것이요, 곧장 떠나지 않으면 네가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적이 명령을 듣자마자 집에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다.
태종의 술수가 뛰어나다고 할 만하나 이적의 술수가 그보다 더 뛰어났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 뒤에 무씨武氏가 황후에 오를 즈음 결국 이적의 한 마디 말로 결정되어 당唐나라 황실의 자손이 무씨의 손에 거의 다 죽었으니, 이는 태종이 술수로 이적을 대했기 때문에 이적 역시 술수로 갚아준 것이요, 진실로 당唐나라 사직을 위해 계책을 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적이 죽음에 임박해 그 아우에게 말하기를 “나는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고생을 하며 집안을 일으켰으나 모두 불초한 자손들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죽은 뒤에 자손들 중에 옳지 않은 무리와 교유하는 자가 있으면 네가 반드시 그를 죽여라.”라고 하였는데, 후일 손자 이경업李敬業이 군사를 일으켜 종실을 무너뜨리려 하다가 이적의 무덤이 훼손되고 유골이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아, 이적이 믿었던 술수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 교묘함을 펼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군자는 지혜만 믿는 것을 싫어하고 정상적인 법도를 준수하는 것을 크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