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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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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魏徵 進曰 臣觀古來帝王 撥亂創業 必自戒愼하여 採芻蕘之議하고 從忠讜之言이라가
天下旣安이면 則恣情肆欲하여 甘樂諂諛注+ 甘樂諂諛:樂, 音洛.하고 惡聞正諫注+ 惡聞正諫:惡, 烏去聲.하니라
張子房 漢王計畫之臣이러니 及高祖 爲天子하여 將廢嫡立庶한대
況陛下功德之盛 以漢祖 方之 彼不足準이라
卽位十有五年注+ 卽位十有五年:太宗以武德九年卽帝位, 至是十有五年. 聖德光被하시고 今又平殄高昌하사대 屢以安危繫意하여
方欲納用忠良하여 開直言之路하시니 天下幸甚이로소이다
齊桓公注+ 昔齊桓公:齊君, 名小白. 與管仲鮑叔牙甯戚注+ 管仲鮑叔牙甯戚:三人皆齊相.四人飮할새 桓公謂叔牙曰 盍起爲寡人壽乎注+ 爲寡人壽乎:爲, 去聲. 諸侯自稱曰寡人, 言寡德之人也.
叔牙奉觴而起曰注+ 奉觴而起曰:奉, 音捧.願公 無忘出在莒時注+ 無忘出在莒時:桓公初出奔於莒, 鮑叔爲之傅.하시고 使管仲으로 無忘束縛於魯時注+ 無忘束縛於魯時:하고 使甯戚으로 無忘飯牛車下時注+ 無忘飯牛車下時:하노이다
桓公 避席而謝曰 寡人與二大夫 能無忘夫子之言이면 則社稷不危矣라하니이다
【集論】愚按 唐虞之世 雍熙泰和하여 帝治之極盛也
聖君賢相 於一堂之上하니 凜乎儆戒之言 以聖君賢相으로 夫豈有是哉
玆所以保雍熙泰和之盛也
今觀高昌旣平하고 土宇極盛하되 太宗有兢兢保治之言하고 魏徵有諄諄鑑戒之意 玆所以成貞觀太平之盛也
然古帝王傳心之學 其要在於欽이요 而儆戒之際 尤謹於欽之一辭
蓋敬者 萬化之本原이며 一心之妙用이니 聖神之能事 學問之極功 帝王授受之懿在此
其發於言者 皆由於心也
故能하여 謹終如始
爲上人者 佩太宗君臣鑑戒之言하여 體帝王心學之要하면 則豈惟貞觀
可以進於三代之上矣리라


위징魏徵이 나서서 말하였다. “신은 살펴보니 옛날부터 제왕이 난세를 다스려 창업할 적에 반드시 스스로 경계하여 꼴 베며 나무하는 자들의 의견도 받아들이고 충성스런 말을 따랐다가
천하가 안정되고 나면 감정과 욕심을 방자하게 부려서 아첨을 달갑게 즐기며注+(즐기다)은 이다. 바른 간언을 듣기 싫어합니다.注+(싫어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장자방張子房나라 고조의 참모 신하였는데 고조高祖가 천자가 되어 장차 적자인 태자太子(유영劉盈)를 폐하고 서자庶子(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漢 高祖漢 高祖
장자방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말로 쟁론爭論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고注+장자방張子房은 이름이 이니, 나라에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고조高祖태자太子 유영劉盈을 폐하고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세우려고 하였다. 어떤 이가 여후呂后에게 말하기를 “유후留侯는 계책을 잘 세워서 황상이 그 계책을 믿고 씁니다.”라고 하자, 여후가 장량을 겁주어 말하기를 “그대는 황상의 계책을 내는 신하가 되어 있는데, 지금 황상이 태자를 바꾸려고 하거늘 그대가 어찌 베개를 높이 베고 잠을 잘 수 있소?”라고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과거에 황상께서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다행히 저의 계책을 쓰셨습니다. 천하가 이미 안정되었고 사랑 때문에 태자를 바꾸려 하니, 비록 신과 같은 자가 백 명이나 있은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후가 강요하기를 “나를 위해 계책을 세우시오.”라고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이것은 말로 간쟁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태자를 위하여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청하여 도움을 받아 그것을 힘입어서 폐하지 않았다. 마침내 감히 다시 말하지 않았습니다.注+(다시)는 이다.
더구나 폐하의 공덕의 성대함은 한나라 고조와 비교하면 상대방이 대등해질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15년에注+태종太宗무덕武德 9년(626)에 황제에 즉위하여 지금 15년에 이르렀다. 성덕이 천하에 널리 퍼졌고 지금 또 고창高昌을 평정하여 소멸시키시고도 자주 국가의 안위에 마음을 쓰시고
바야흐로 충량한 신하를 등용하여 받아들이고자 신하가 직언하는 길을 열어놓으셨으니, 천하가 매우 다행입니다.
옛날에 제 환공齊 桓公注+제군齊君이니 이름이 소백小白이다. 관중管仲포숙아鮑叔牙영척甯戚注+세 사람은 모두 나라 재상이다. 함께 네 사람이 술을 마실 적에 환공이 포숙아에게 말하기를 ‘어찌 일어나 과인을 위해 오래 살라고 빌지 않는가?’라고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제후諸侯가 스스로 일컫기를 과인寡人이라 하니, 덕이 적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하자,
포숙아가 술잔을 들고 일어나 말하기를注+(두 손으로 받쳐 들다)은 이다. ‘원컨대 공께서는 망명하여 땅에 살던 때를 잊지 말고注+제 환공齊 桓公이 처음에 로 도망하여 나갔을 때에 포숙鮑叔이 스승이 되었다., 관중은 나라에 갇혀 묶여 있던 때를 잊지 않게 하고注+제 환공齊 桓公이 즉위하고 나라에 말하기를 “관중管仲은 원수이니 속을 시원히 풀게 그를 젓 담도록 해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관중管仲이 옥에 갇히기를 청하자 포숙아鮑叔牙가 그를 맞이해 받아들이고 당부堂阜(나라 땅 이름)에 이르자 차꼬와 수갑을 벗겨주었다., 영척은 수레 밑에서 소에게 여물을 먹이던 때를 잊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하니注+영척甯戚이 일찍이 제 환공齊 桓公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남산이 깨끗하고, 흰 돌이 번쩍이네. 그 가운데 길이가 한 자 반이 되는 잉어가 있는데, 살면서 임금이 임금에게 선양해주는 것을 못 만났네. 짧은 베 홑옷은 겨우 정강이만 가리고, 어둑한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소를 먹이네.”라고 하였다. 환공이 마침내 불러서 재상으로 삼았다.,
환공은 자리를 피하고 사례하여 말하기를 ‘과인과 두 대부가 부자夫子(포숙아)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사직이 위태롭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태종太宗이 위징에게 말하였다. “짐이 반드시 평민이었을 때의 일을 감히 잊지 않을 것이니, 공은 포숙아의 사람됨을 잊어서는 안 되오.”注+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13년(639) 고창왕高昌王 국문태麴文泰서역西域에서 조공朝貢하는 것을 막아 끊었다. 이오伊吾(서역 땅 이름)가 이미 나라에 귀속되었는데 고창은 또 서돌궐西突厥과 함께 이오를 공격하였다. 태종太宗은 그 신하 아사나구阿史那矩를 불렀으나 국문태麴文泰는 보내지 않았다. 중국中國 사람으로서 돌궐突厥에 있는 자가 혹은 고창高昌으로 도망하니, 조서를 내려 돌려보내게 하였으나 또한 돌려보내지 않았다. 또 서돌궐西突厥과 함께 언기焉耆를 격파하자 태종이 사신을 보내 문책하니, 국문태는 말이 공손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후군집侯君集 등에게 공격하게 하자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땅이 동쪽은 바다까지 다 갔고 서쪽은 언기焉耆에 이르고 남쪽은 임읍林邑까지 다하고 북쪽은 대막大漠에 이르도록 모두 주현州縣을 삼으니, 모두 동서 9,510리, 남북 19,181리로, 나라가 지극히 성대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임금과 임금의 세상은 태평하고 화락하여 제왕의 다스림이 지극히 성대하였다.
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재상이 모두 한 대청에서 찬성 불찬성의 토론을 하였으니, 경계하는 말을 두려워하기를 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재상으로서 어찌 이런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태평하고 화락한 성대함을 보존하게 된 까닭이다.
지금 살펴보면 고창高昌을 평정하고 나서 나라가 지극히 성대하여도 태종太宗은 삼가고 두려워하며 다스려 보존하는 말을 하고, 위징魏徵은 정성껏 경계하는 뜻을 지녔으니, 이것이 정관貞觀 때에 태평의 성대함을 이루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옛 제왕의 마음을 전하는 학문은 그 요점이 ‘’에 있고 경계하는 때에는 더욱 ‘’이라는 한마디 말에 대해 더욱 신중히 하였다.
은 모든 변화의 본원이며 마음의 오묘한 쓰임이니, 성신聖神의 능한 일과 학문의 지극한 공은 제왕의 주고받는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말에 나타난 것은 모두 마음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태만함도 없고 황폐함도 없어서 끝을 신중히 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윗사람이 된 자는 태종太宗의 임금과 신하가 경계한 말을 가지고서 제왕帝王의 마음을 전하는 학문의 요점을 체득하면 어찌 정관 정도일 뿐이겠는가.
삼대三代의 경지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齊桓公……則社稷不危矣 : 이 내용은 《管子》 〈小稱〉에 보인다.
역주2 張子房……賴以不廢 : 이 내용은 《史記》 권55 〈留侯世家〉에서 추출한 것이다. 본문 중의 ‘后强要’는 〈留侯世家〉에 ‘呂澤强要’로 되어 있다.
역주3 四皓 : 商山에 은거해 사는 네 명의 머리 센 노인으로, 東園公‧綺里季‧夏黃公‧甪里先生이다.
역주4 桓公立……及堂阜而脫桎梏 : 《史記》 권32 〈齊太公世家〉에 보인다.
역주5 甯戚嘗候桓公出……公遂召之爲相 : 《史記》 권83 〈魯仲連鄒陽列傳〉 및 裴駰 〈集解〉에 보인다.
역주6 通鑑……爲唐之極盛焉 : 《資治通鑑》 권195 唐紀 11 〈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中之上〉 貞觀 13년에 보인다.
역주7 都兪吁咈 : 모두 감탄사로, 都는 찬미하는 말, 兪는 동의하는 말, 吁는 동의하지 않는 말, 咈은 반대하는 말이다. 본디 堯, 舜, 禹 등의 임금들이 조정에서 정사할 때에 쓰던 말인데, 후대에는 군신간에 온화한 모습으로 조정의 정사를 논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역주8 無怠無荒 : 《書經》 〈虞書 大禹謨〉에 보인다.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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