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南雖容貌懦弱
하여 注+懦, 乃亂切, 一音儒. 勝字, 平聲.나 而志性抗烈
하고 每論及古先帝王爲政得失
하여는 必存規諷
하여 多所補益
이라
及高祖晏駕
注+漢書曰 “宮車晏駕.” 註謂 “天子當晨起早作, 而方崩殞, 故稱晏駕者. 臣子之心, 猶謂宮車晩出也.” 按高祖以貞觀九年五月崩.하여는 太宗執喪過禮
注+喪, 平聲, 後同.하여 哀容毀顇
하여 久替萬機
하니 文武百寮
가 計無所出
이어늘 世南每入進諫
에 太宗甚嘉納之
하고 益所親禮
라
朕因暇日하여 每與虞世南으로 商搉古今한대 朕有一言之善이면 世南未嘗不悅하고 有一言之失이면 未嘗不悵恨이라
太宗
이 嘗稱世南有五絕
하니 一曰德行
注+去聲.이요 二曰忠直
이요 三曰博學
이요 四曰詞藻
요 五曰書翰
이라
及卒
注+子聿切.에 太宗擧哀於
하여 哭之甚慟
하고 喪事官給
하며 仍賜以
注+葬具也.하고
贈禮部尙書
注+唐制, 禮部掌禮儀‧祭享‧貢擧之政, 尙書其長也. 凡旣没而加之以官曰贈.하고 諡曰文懿
라
태종太宗이 정무를 처리하고 나서 한가할 때마다 우세남虞世南을 불러 담론을 하고, 함께 경서와 역사서를 보았다.
우세남이 겉모습은 허약해서 옷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듯하였지만
注+나懦(약하다)는 내乃와 난亂의 반절이며, 다른 음은 유儒이다. 승勝(감당하다)은 평성平聲이다. 의지와 품성은 매우 강직하였고, 옛 제왕이 베풀었던 정치의 득실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경계하고
풍간諷諫하는 점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조高祖가 세상을 떠난 뒤
注+《한서漢書》 권26 〈천문지天文志〉에 이르기를 “천자 수레가 늦게 출발한다.”라고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 주註에 이르기를 “천자는 마땅히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붕어하였으므로 늦게 출발한다고 한 것이니, 신하의 마음에 오히려 천자의 수레가 늦게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함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살펴보면 고조高祖는 정관貞觀 9년(635) 5월에 붕어하였다. 태종이 상례를 치르기를 예법보다 지나치게 하여
注+상喪(초상)은 평성平聲이다. 뒤에도 같다. 몸이 쇠약해지고 초췌해져 오랜 기간 정사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문무백관들이 해결책을 찾지 못했는데, 우세남이 매번 들어가 간언을 올리면 태종이 몹시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더욱 친애하고 예우하였다.
“짐이 시간이 날 때마다 우세남과 고금의 정치를 논하는데, 짐이 한 마디 선한 말을 하면 우세남이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고, 한 마디 옳지 않은 말을 하면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의 간절한 정성이 이와 같기에 짐이 기뻐하는 것이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우세남과 같다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겠소.”
태종이 일찍이 우세남을 칭찬하며 다섯 가지 뛰어난 점이 있다고 했으니, 첫째는
덕행德行,
注+〈행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다. 둘째는
충직忠直, 셋째는
박학博學, 넷째는
문장文章, 다섯째는
서간書簡이다.
우세남이 세상을 떠나자
注+〈졸卒은〉 자子와 율聿의 반절이다. 태종이
별차別次에서 애도를 표하여 곡소리가 매우 애통해하였고, 장례 비용을 관청에서 마련해주었으며, 궁중의 장례 물품을 그대로 하사하였다.
注+〈동원비기東園秘器는〉 장례 도구이다.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하고
注+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예부禮部는 예의禮儀‧제향祭享‧공거貢擧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상서尙書는 그 수장이다. 일반적으로 죽고 난 뒤에 관직을 더 올려주는 것을 증贈이라 한다. 시호를
문의文懿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