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古人云 未信而諫
이면 則以爲謗己
요 信而不諫
이면 則謂之尸祿
注+論語子夏曰 “信而後諫, 未信則以爲謗己也.” 尸祿, 謂尸位而竊祿.이니이다
但人之才器가 各有不同하여 懦弱之人은 懷忠直而不能言하고 疎遠之人은 恐不信而不得言하고 懷祿之人은 慮不便身而不敢言이라
朕每思之
하니 人臣欲諫
할새 輒懼死亡之禍
가 與夫
注+音扶.赴
注+音霍.冒白刃
으로 亦何異哉
리오
故忠貞之臣
은 非不欲竭誠
이나 竭誠者乃是極難
이니 所以禹拜昌言
注+語見虞書益稷謨.이 豈不爲此也
注+爲, 去聲.리오
朕이 今開懷抱納諫諍하리니 卿等은 無勞怖懼하여 遂不極言하라
言路通塞은 關君德之盛衰니 人主가 因言者之多寡하여 固可自察其身之得失也라
諫者多는 必吾之能聽이요 諫者直은 必吾之能容이요 犯顔而不憚은 必吾無拒人之色이요 苦口而無隱은 必吾無好佞之心이라
一或反是면 則是吾德之不進이요 吾心之不大며 吾之好佞而惡直이요 樂諛而畏忠也라
太宗即位之初에 虛心訪納이라 故論諫者가 步隨袂接하여 表疏之進이 笥溢几盈하여 一日萬機라
在今猶昔이로되 而論事之誠이 頓爾銷減하니 帝而內省하면 當必有以致此者라
今猶此問에 徵以愛身畏罪爲告는 蓋欲使帝自悟耳어늘 帝以赴鼎冒刃으로 爲開說之比하고 終不能深自克責하여 復爲敷求也라
愚按 貞觀十五年에 魏徵謂陛下欲善之志가 不及於昔時하고 聞過必改가 少虧於曩日이라하고
尙幸勉强欲善之意하여 猶能自克이라 故能開導聽納이라
至謂群臣近來都不論事하니 則又在魏徵이 儆戒不克終之後에 得無或如徵之言乎아
정관貞觀 15년(641)에 태종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물었다.
“근래
注+비比(요즘)는 음이 비鼻이다. 조정 신하들이 도무지 정사에 대해 논하지 않으니 무엇 때문이오?”
“폐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신다면 진실로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믿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간언하면 자신을 비방한다고 여기고, 믿음을 얻고서도 간언하지 않으면
시록尸祿이라 한다.’
注+《논어論語》 〈자장子張〉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믿음이 형성된 뒤에 간언해야 하니, 믿음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자신을 비방한다고 여긴다.”라고 하였다. 시록尸祿은 자리만 차지하고 녹봉을 축내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재능과 기국器局이 각기 달라, 나약한 사람은 가슴에 충직한 생각을 갖고 있어도 말로 드러내지 못하고, 소원한 사람은 믿어주지 않을까 우려하여 말을 하지 못하며, 녹봉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편함이 생길까 염려하여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침묵하며 적당히 날짜만 보내는 것입니다.”
짐이 매번 생각해보니, 신하가 간언하려 할 때 이내 죽음의 재앙을 두려워하는 것이
注+〈부夫(발어사)는〉 음이 부扶이다. 끓는 솥으로 들어가고
注+〈확鑊(가마솥)은〉 음이 곽霍이다. 서릿발 칼날을 무릅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래서 충직하고 올곧은 신하가 정성을 다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하기가 바로 매우 어려운 것이니,
우禹임금이 훌륭한 말에 절을 한 것이
注+〈우禹임금이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한 것은〉 내용이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모益稷謨〉에 보인다. 어찌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겠소.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짐이 이제부터 마음을 열고 간언을 받아들일 터이니 경들은 두려움에 떨어 할 말을 다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언로가 소통하느냐 막히느냐는 임금이 지닌 덕의 성쇠와 관계되니, 임금은 참으로 간언하는 자가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잘잘못을 살필 수 있다.
간언하는 자가 많은 것은 반드시 내가 잘 듣기 때문이고, 간언하는 자가 올곧은 것은 반드시 내가 잘 수용하기 때문이며, 면전에서 대들어 거리낌 없는 것은 반드시 내가 남을 거부하는 안색이 없기 때문이고, 숨김없이 쓴소리를 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말재주 부리는 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이와 상반된다면 이는 나의 덕이 발전하지 못하고 나의 마음이 크지 못하며, 내가 말재주 부리는 자를 좋아하고 올곧은 자를 싫어하며,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고 충성하는 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초기에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으므로 간언하는 자들이 발걸음이 따라오고 소매가 연이어져서 표表와 소疏가 올라와 상자에 넘치고 책상에 가득하여 하루에도 수많은 일을 검토했다.
지금도 이전과 다름없는데, 일을 논하는 정성이 갑자기 줄어들었으니, 태종이 마음으로 성찰한다면 반드시 이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간언을 유도하고 중간에는 이를 기쁘게 따르고 마지막에는 힘써 노력할 것을 위징魏徵이 누차 논했다.
지금 이러한 물음에 대해 위징이 자신을 아끼고 죄를 두려워한다고 고한 것은 태종이 스스로 깨우치기를 바란 것인데, 태종은 끓는 솥으로 들어가고 칼날을 무릅쓰는 것으로 설명의 비유만 들었을 뿐 끝내 깊이 자신을 꾸짖어 더 널리 구하지 못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정관貞觀 15년(641)에 위징魏徵이 “폐하께서 잘하고 싶은 의지가 지난날에 미치지 못하고, 잘못을 들으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지난날보다 조금 부족합니다.”라 하였고,
정관 13년(639)에 또 “폐하의 의지와 사업이 정관 초기에 견주어 점차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것이 모두 열 가지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의 덕이 조금은 손상된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잘하고 싶은 생각을 힘써 발휘하여 스스로 극복했으므로 신하들이 간언하도록 유도하고 자신은 그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뭇 신하들이 근래 도무지 일을 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 이르렀으니, 위징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다고 경계한 뒤에 혹여 위징의 말처럼 된 것이 아니겠는가.
후대의 임금은 의당 처음을 신중히 하고 마무리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