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十一年 詔曰 朕聞 注+① 欲令人之不得見也:令, 平聲.
정관貞觀 11년(637)에 태종太宗이 조서를 내렸다. “이 듣기에 죽음은 끝마치는 것이니 만물이 진원眞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고, 장례는 감추는 것이니 사람이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소.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上古垂風 未聞於封樹하고 後世貽則하여 乃備於棺槨注+② 乃備於棺槨:易大傳曰 “古之葬者, 厚衣之以薪, 葬之中野, 不封不樹, 喪期無數. 後世聖人, 易之以棺槨.”이라 譏僭侈者 非愛其厚費 美儉薄者 實貴其無危
오랜 옛날부터 전해온 풍속에는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고, 후세에 규범을 지어 비로소 관곽을 마련하게 된 것이오.注+역대전易大傳〉(〈계사전繫辭傳〉)에 말하기를 “옛날 장례葬禮하는 자들은 섶을 두껍게 입혀서 들 가운데 장례葬禮하여 봉분封墳하지 않고 나무를 심지 않으며 상기喪期가 일정한 가 없었는데, 후세에 성인聖人관곽棺槨으로 바꾸었다.” 하였다. 참람하며 사치스런 장례를 비난하는 것은 비용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고, 검약을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실로 도굴의 위험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오.
是以唐堯 聖帝也 穀林有通樹之說注+③ 穀林有通樹之說:呂氏春秋 “堯葬穀林, 通樹之.”하고 秦穆 明君也 橐泉無丘隴之處注+④ 橐泉無丘隴之處:秦穆公, 名任好. 史記註 “穆公葬雍州橐泉宮祈年觀下.”하고
그러므로 임금은 성제聖帝여서 〈장사를 지낸〉 곡림穀林은 온통 나무를 심었다는 말이 있고注+여씨춘추呂氏春秋》 〈안사安死〉에 “임금을 곡림에 장사 지내고, 온 숲에 나무를 심었다.”, 나라 목공穆公은 명군이어서 〈장사를 지낸〉 탁천槖泉은 구릉이 없는 곳이었으며注+진 목공秦 穆公은 이름이 임호任好이다. 《사기史記에 “목공穆公옹주雍州 탁천궁橐泉宮 아래에 장사 지냈다.”라고 하였다.,
仲尼 孝子也 注+⑤ 防墓不墳:孔子合葬親於防, 曰 “吾聞古也墓而不墳.”하시고 延陵 慈父也 嬴博可隱注+⑥ 嬴博可隱:吳延陵季子, 名札, 適齊而返, 其子死, 葬於嬴‧博之間, 不歸鄕里.하니
중니仲尼는 효자여서 방묘防墓(공자孔子 부모父母 합장묘合葬墓)를 만들 때에 봉분을 높이지 않았으며注+ 하였다., 연릉계자延陵季子는 자애로운 아버지여서 영읍嬴邑박읍博邑 사이에 아들을 장사 지냈소.注+나라 연릉계자延陵季子는 이름이 인데 나라를 갔다가 돌아오다가 그 아들이 죽으니 의 사이에 장사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斯皆懷無窮之慮하고 成獨決之明하여 乃便體於九泉이요 非徇名於百代也
이는 모두가 끝없는 우려(도굴)를 생각하고, 홀로 현명하게 결정을 이루어서 시신을 구천九泉에 편히 있게 한 것이지,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오.
洎乎闔閭違禮하여 珠玉爲鳧雁注+⑦ 洎乎闔閭違禮 珠玉爲鳧雁:闔閭, 吳王名. 葬虎丘山下, 發士十萬人治葬, 穿土爲川, 積壤爲丘, 銅棺三重, 墳池六尺, 以黃金珠玉爲鳬雁.하고 始皇無度하여 水銀爲江海注+⑧ 始皇無度 水銀爲江海:秦始皇葬於驪山, 吏徒數十萬, 曠日十年, 合采金石, 被以珠玉, 水銀爲江海, 人膏爲燈燭.하고
그런데 나라 합려闔閭가 예를 어겨서 주옥으로 물오리와 기러기를 만들었고注+합려闔閭오왕吳王의 이름이다. 호구산虎丘山 아래에 장사 지냈는데, 군사 10만 명을 동원하여 장사를 치르게 하여 흙을 파서 시내를 만들고 흙덩이를 쌓아서 언덕을 만들고 동관銅棺을 세 겹으로 만들고 봉분 주변의 연못을 6척 깊이로 만들고 황금黃金주옥珠玉으로 오리와 기러기를 만들었다., 진 시황秦 始皇은 법도가 없어서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었으며注+진 시황秦 始皇여산驪山에서 묻혔는데, 이도吏徒 수십만 명이 10년의 세월을 허비하고 금석金石을 채집하여 주옥으로 입히고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사람의 기름으로 등불을 켰다.,
季孫擅魯하여 斂以璵璠注+⑨ 斂以璵璠:斂, 去聲. 璵, 音與. 璠, 音煩. 季孫, 魯大夫季平子也. 左傳 “定公五年, 季平子行東野, 還, 未至, 卒於房. 陽虎將以璵璠斂, 仲梁懷不與曰 ‘改步改玉.’ 陽虎欲逐之, 告公山不狃, 不狃曰 ‘彼爲君也, 子何怨焉.’”하고 桓魋專宋 葬以石椁注+⑩ 桓魃專宋 葬以石槨:魋, 音頹. 桓魋, 宋向戍之孫, 爲司馬. 禮記 “子遊曰 ‘昔者夫子居於宋, 見桓司馬自造石槨, 三年而不成. 夫子曰 「若是其靡也, 死不如速朽之愈也.」’”하여 莫不因多藏以速禍하고 由有利而招辱이라
계손季孫나라 정권을 휘두르다가 죽어서는 아름다운 보옥인 여번璵璠(여번)으로 염습을 하였으며注+(염습)은 거성去聲이다. 이다. 은 음이 이다. 계손季孫나라 대부大夫 계평자季平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정공定公 5년에 계평자가 동야東野에 갔다가 노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이르지 못하고 에서 죽었다. 양호陽虎여번璵璠이란 보옥을 넣어 염을 하려 했으나 중량회仲梁懷가 내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걸음걸이를 바꾸면 차는 옥도 지위에 따라 바꾼다.’라고 했다. 그래서 양호는 중량회를 쫓아내려고 공산불뉴公山不狃에게 고하니, 공산불뉴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임금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그대가 어찌 원망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하였다., 환퇴桓魋나라를 전횡하다가 죽어서는 석곽石槨을 만들어 장례에 쓰려고까지 하여注+이다. 환퇴桓魋나라 향수向戍의 손자이고 사마司馬가 되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에 “자유子遊가 말하였다. ‘옛날에 선생님께서 송나라에 계실 때에 환사마桓司馬가 스스로 석곽을 만드는데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사치하게 하는 것보다는 죽어서 빨리 썩는 것이 낫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많은 부장품으로 인해서 화를 재촉하고, 이로운 물건 때문에 욕을 보았소.
玄廬旣發 致焚如於夜臺注+⑪ 致焚如於夜臺:玄廬‧夜臺, 墓之別名也.하고 黃腸再開 同暴骸於中野注+⑫ 黃腸再開 同暴骸於中野:하니 詳思曩事 豈不悲哉 由此觀之건대 奢侈者 可以爲戒 節儉者 可以爲師矣
현려玄廬(분묘의 이름)는 파헤쳐지고서 야대夜臺(분묘의 이름)를 불태우는 데에 이르렀고注+현려玄廬야대夜臺는 묘의 다른 이름이다., 황장黃腸(관곽의 이름)은 다시 열려서 해골이 들에 모두 드러났소.注+나라 양상梁商이 죽자 동원東園(장례 담당 관청)의 주수지기朱壽之器(붉은 빛 장식 관)에 은으로 아로새긴 황장黃腸을 썼는데, 그 에 “이다. 붉은색으로 장식을 하고 은으로 아로새기고 측백나무의 노란 목심木心으로 외곽外槨을 만드는데 ‘황장黃腸’이라고 한다.” 하였다. 자세히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소. 이를 통해 살펴보건대 사치하는 자는 경계로 삼을 만하며, 절검하는 자는 스승으로 삼을 만하오.
역주
역주1 死者……欲物之反眞也 : 《漢書》 〈楊王孫傳〉에 “죽음은 일생의 큰 변화이고 만물의 본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회귀하는 것이 이르고 변화하는 것이 변화하면 이것이 바로 만물이 각각 그 眞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夫死者 終生之化而物之歸者也 歸者得至 化者得變 是物各反其眞也]”라고 하였다.
역주2 葬者……欲令人之不得見也 : 《禮記》 〈檀弓 上〉의 “葬也者 藏也 藏也者 欲人之弗得見也(장례는 감추는 것이니, 감추는 것은 사람이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을 축약하여 변형한 것이다.
역주3 防墓不墳 : 《禮記》 〈檀弓 下〉에 보인다.
역주4 祈年觀 : 秦 穆公 때 만든 건물이다.
역주5 孔子가……하였다 : 이는 《禮記》 〈檀弓 上〉의 글이다.
역주6 漢梁商薨……曰黃腸也 : 《後漢書》 〈梁商傳〉에 보인다. 註는 唐 章懷太子 李賢이 지은 것이다.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