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十八年
에 太宗將伐高麗
할새 其莫離支
注+① 莫離支:高麗官名, 其職如中國吏部兼兵部尙書也. 貞觀十六年, 高麗東部大人泉蓋蘇文弑其王武, 立王弟子藏爲王, 自爲莫離支官.遣使
注+② 遣使:去聲.하여 貢白金
이어늘 黃門侍郞褚遂良諫曰 莫離支虐殺其主
하니 九夷所不容
注+③ 九夷所不容:東方之夷有九種, 曰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 又一曰玄菟, 二曰樂浪, 三曰高麗, 四曰滿飭, 五曰鳬臾, 六曰索家, 七曰東屠, 八曰倭人, 九曰天都.이라
陛下以之興兵
하사 將事
하여 爲遼東之人
注+④ 爲遼東之人:爲, 去聲.報主辱之恥
니이다
昔宋督
注+⑤ 宋督:宋, 春秋時國名, 字華父, 宋戴公孫也.遺魯君以郜鼎
注+⑥ 遺魯君以郜鼎:遺, 去聲. 魯君桓公, 名軌. 郜鼎, 郜國所造器, 故繫名於郜.이어늘 桓公受之於大廟
注+⑦ 桓公受之於大(태)廟:大, 音泰, 後同. 大廟, 周公之廟也.하니 臧哀伯
注+⑧ 臧哀伯:魯大夫臧孫達也.諫曰 君人者
는 將昭德塞違
어늘 今滅德立違而寘其賂器於大廟
하니 百官象之
면 又何誅焉
이리오
武王克商
하고 遷九鼎于雒邑
注+⑨ 遷九鼎于雒邑:九鼎, 殷所受夏鼎也. 武王克商, 乃營雒邑, 而後去之, 又遷九鼎焉.하니 義士猶或非之
注+⑩ 義士猶或非之:蓋伯夷之屬.어든 而況將昭違亂之賂器
하여 寘諸大廟
하니 其若之何
注+⑪ 況將昭違亂之賂器……其若之何:事見左傳. 桓公二年, 宋督弑其君殤公與夷, 以郜鼎賂公, 故遂相宋公. 四月, 取郜鼎于宋, 納于大廟, 臧哀伯諫曰, 云云. 公不聴.오하니
夫
注+⑫ 夫:音扶.春秋之書
는 百王取則
하니 若受不臣之筐篚
하며 納弑逆之朝貢
하여 不以爲愆
하면 將何致伐
이리오 臣謂莫離支所獻
을 自不合受
하노이다하니 太宗從之
注+⑬ 貞觀十八年……太宗從之:按通鑑 “太宗又謂高麗使者曰 ‘汝曹皆事 有官爵. 莫離支弑逆, 汝曹不能復讐, 今更爲之遊說(세), 以欺大國, 罪孰大焉.’ 悉以屬大理.”하다
注
【集論】唐氏仲友曰
니 此兵法也
라 太宗固深忿莫離支
하여 必欲討之
러니 其貢使之來
에 欲治之而未有辭
어늘 遂良之諫
이 與太宗意會
하니 宜其從之之速也
라
注
愚按 褚遂良援古證今
하여 諫太宗却莫離支之獻
하니 則善矣
나 而不能因以消其忿兵黷武之心
하고 而其諫辭與太宗意會
하여 卒成
하니 惜哉
로다
정관貞觀 18년(644)에
태종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려고 할 적에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가
注+〈막리지莫離支는〉 고구려高句麗의 관직 명칭으로, 그 직위는 중국의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겸한 것과 같다. 정관貞觀 16년(642)에 고구려 동부대인東部大人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왕인 무武를 죽이고, 왕의 조카인 장藏(보장왕寶藏王)을 왕으로 옹립하고는 스스로 막리지의 관직에 올랐다. 사신을 보내어
注+〈사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백금白金을 바치자,
황문시랑黃門侍郞 저수량褚遂良이 간언하였다. “막리지는 군주를 시해하였으니, 이는 동방의 여러 오랑캐들도 용납하지 않는 일입니다.
注+동방東方의 이민족은 아홉 계열이 있는데,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이다. 또 한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가 현도玄菟, 둘째가 낙랑樂浪, 셋째가 고려高麗, 넷째가 만칙滿飭, 다섯째가 부유鳬臾, 여섯째가 색가索家, 일곱째가 동도東屠, 여덟째가 왜인倭人, 아홉째가 천도天都이다.
폐하께서 이 때문에 병력을 일으켜 장차 백성을 조문하고 죄를 토벌하는 일을 하려는 것은
요동遼東(고구려)의 백성을 위하여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그 군주의 치욕을 갚아주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군주를 시해한 역적을 토벌할 때 뇌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옛날
송독宋督이
注+송宋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국명國名이다. 〈독督은〉 자字가 화보華父로, 송 대공宋 戴公의 손자이다. 〈군주를 시해하고〉
노 환공魯 桓公에게
고정郜鼎을 보냈는데
注+유遺(보내다)는 거성去聲이다. 노魯나라 군주는 환공桓公이니, 이름이 궤軌이다. 고정郜鼎은 고국郜國에서 만들어진 기물이므로, 고郜에서 이름을 따왔다., 환공이 이것을
태묘太廟에 두자
注+대大(크다)는 음音이 태泰이다. 뒤에도 같다. 대묘大廟는 주공周公의 묘廟이다.,
장애백臧哀伯이
注+〈장애백臧哀伯은〉 노魯나라 대부大夫인 장손달臧孫達이다. 간언하기를 ‘군주는
덕德을 밝히고
비위非違를 막아야 하거늘, 지금
덕德을 멸하고 비위를 행하여 뇌물로 준 기물을 태묘에 두었으니,
백관百官들이 이를 본받는다면 또한 어떻게 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주 무왕周 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구정九鼎을
낙읍雒邑으로 옮겼을 때
注+구정九鼎은 은殷나라가 전해 받은 하夏나라의 정鼎이다. 무왕武王이 상商나라에 승리를 거두고 낙읍雒邑을 건설하고서 그 후에 떠났으며, 또 구정九鼎을 옮겼다.,
의사義士들도 오히려 이를 비난하였는데
注+〈의사義士는〉 백이伯夷의 무리이다., 하물며 부정한 뇌물로 받은 기물을 환히 드러내어 태묘에 안치하려 하시니, 어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注+일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보인다. 노 환공魯 桓公 2년에 송독宋督이 군주인 송 상공宋 殤公 여이與夷를 시해하고 노 환공魯 桓公에게 고정郜鼎을 뇌물로 주었으므로, 마침내 송 장공宋 莊公을 도와주었다. 4월에 송宋나라에서 고정을 취하여 태묘太廟에 들이자 장애백臧哀伯이 간언하기를 “……”라고 하였으나 환공이 따르지 않았다.
《
춘추春秋》라는
注+〈부夫(발어사)는〉 음音이 부扶이다. 책은 모든 왕들이 법으로 삼고 있으니, 만일 신하 노릇 안 한 자의 예물을 받거나 군주를 시해한 자의 조공을 받고서 잘못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앞으로 어찌 정벌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신臣이 생각하기에는 막리지가 바치는 것을 받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태종이 그의 말을 따랐다.
注+《자치통감資治通鑑》을 살펴보건대 “정관貞觀 18년에 태종太宗이 또 고구려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고무高武를 섬겨 관작을 얻었다. 그런데 막리지가 임금을 시해했는데도 그대들은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해 유세를 하여 대국을 기만하니, 이보다 큰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사신들을 모두 대리大理(형옥刑獄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주었다.”라고 하였다.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명분상 역적임을 규정해야 적을 승복시킬 수 있으니, 이것이 병법兵法이다. 태종太宗이 본래 막리지莫離支에게 크게 분노하여 반드시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조공朝貢을 바치는 사신이 왔을 때에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수량褚遂良의 간언이 태종의 뜻과 부합하였으니, 신속히 따른 것이 마땅하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저수량褚遂良은 옛날의 일을 인용해서 지금의 상황을 증명하여 태종太宗에게 막리지莫離支가 바친 공물을 물리치도록 간언하였으니, 훌륭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분노로 전쟁을 일으키며 무력을 남용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지 못하였고, 그가 올린 간언이 태종의 뜻과 부합하여 결국에 요수遼水(고구려) 정벌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애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