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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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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十二年 太宗 幸蒲州注+ 太宗 幸蒲州:蒲州, 今爲解州, 隷河東.하여 因詔曰
隋故鷹擊郎將注+ 隋故鷹擊郎將:將, 去聲. 隋制, 親侍置鷹揚府, 有鷹揚郎將, 後改副郎將爲鷹擊郎將.堯君素注+ 堯君素:堯君素, 魏郡人. 煬帝爲晉王時, 君素以左右從, 及嗣位, 累遷鷹擊郎將. 及天下大亂, 君素所部獨全. 後從屈突通, 守河東, 通敗, 通誘之降, 君素責通不義, 卒無降心. 其妻誘之降, 乃引弓射殺之. 嘗曰 “大義不得不死.” 後爲左右所害. 往在大業 受任河東하여 固守忠義하여 克終臣節하니
雖桀犬吠堯注+ 雖桀犬吠堯:하여 有乖倒戈之志注+ 有乖倒戈之志:周書曰 “前徒倒戈.” 言衆服周仁政, 無有戰心, 前徒倒戈, 自攻于後也. 疾風勁草 實表歲寒之心이라
爰踐玆境하여 追懷往事하노니 宜錫寵命하여 以申勸獎이니
可追贈蒲州刺史하고 仍訪其子孫以聞하라
【集論】愚按 하고 唐太宗 褒堯君素 皆帝王盛德事也
然合二子而論之컨대 則君素爲賢하니 何也
季布 身爲楚將하여 數窘沛公하니 此人臣之常事
國亡不能死而逃하니 何足深取哉리오
唐室方興 兵精將勇하여 戰無不勝하고 攻無不破어늘
君素 以區區一城之衆으로 外無彊援이로대 徒以忠義 激勵士卒하여
自義寧元年으로 至武德三年 始終四載 唐朝凡易數將하여 僅能克之하니
此不唯忠義可嘉 其知勇才能 亦古今所罕有也 嗚呼難哉로다
太宗 不惟褒贈이라 又訪錄其子孫하니 忠義之士 其有不興起者乎


정관貞觀 12년(638)에 태종太宗포주蒲州순행巡幸하여注+포주蒲州는 지금의 해주解州이며 하동河東에 속한다. 다음과 같이 조칙을 내렸다.
나라 응격낭장鷹擊郎將注+(장수)은 거성去聲이다. 나라 제도에 의하면 친위親衛 시종侍從 안에 응양부鷹揚府를 개설하고 응양랑장鷹揚郎將을 두었는데 뒤에 부랑장副郎將응격낭장鷹擊郎將으로 바꿨다. 요군소堯君素注+요군소堯君素위군魏郡 사람이다. 양제煬帝진왕晉王이었을 때 요군소가 좌우左右에서 모셨는데 양제煬帝가 재위에 오르고 나서는 여러 번 승진하여 응격낭장鷹擊郎將이 되었다. 천하天下가 크게 혼란에 빠졌을 때도 요군소가 거느리는 곳만은 홀로 온전했다. 뒤에 굴돌통屈突通을 따라가 하동河東을 지켰는데 굴돌통이 패하고 굴돌통이 항복하라고 달래었지만 요군소는 굴돌통에게 의롭지 못하다고 꾸짖고 끝내 항복할 마음이 없었다. 그의 아내가 항복하라고 달래자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의를 위해선 죽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뒤에 측근에게 살해되었다. 지난 대업大業(605~616) 때 하동河東에서 임무를 맡으며 충성과 의리를 굳건히 지켜 신하의 절의를 끝까지 다했다.
비록 걸왕桀王의 개가 임금에게 짖어注+한서漢書》에 “걸왕桀王의 개가 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고 짖은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창을 거꾸로 잡아드는 뜻을 어겼지만注+상서尙書》 〈주서周書 무성武成〉에서 “앞에 가는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겨누었다.”라고 했는데, 뭇사람들이 나라의 인정仁政에 탄복한 나머지 싸울 마음이 없어, 앞에 있는 무리가 창을 거꾸로 들고 후방에 있는 군사들을 직접 공격했다는 말이다., 세찬 바람 앞의 굳센 풀이 실로 추위에도 시들지 않는 마음을 표출했다.
이곳에 와서 지난날을 떠올릴 때 의당 영예로운 을 내려 권면과 장려의 뜻을 밝혀야 할 것이니,
포주자사蒲州刺史추증追贈하고 아울러 그의 자손들을 찾아 보고토록 하라.”
내가 살펴보건대, 한 고조漢 高祖계포季布를 사면하고 당 태종唐 太宗요군소堯君素를 표창한 것은 모두 제왕의 성대한 덕과 관련된 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을 아울러서 논한다면 요군소가 더 훌륭하니, 어째서인가.
계포는 나라 장수로 있을 때 패공沛公(유방劉邦)을 여러 차례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이는 신하의 일상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국가가 망했는데도 죽지 않고 도망갔으니 어찌 크게 취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나라 황실이 막 흥기하여 병사들이 정예롭고 장수들이 용맹스러워서 전쟁에 이기지 못한 것이 없고 공격해서 격파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요군소는 단지 일개 작은 성곽의 무리만으로, 밖으로는 강한 응원도 없는 상태에서 한낱 충성과 의리로 병사들을 격려했다.
의녕義寧 원년(617)에서부터 무덕武德 3년(620)에 이르는 4년 동안 당나라에서 여러 사람의 장수를 바꾸고 나서야 겨우 정복할 수 있었으니
이는 그 충의忠義만 가상할 뿐만 아니라 그 지혜와 용기와 재능 또한 고금에 드문 것이니 아, 어려운 일이다.
태종이 포상하여 증직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손까지 찾아 녹용錄用하게 했으니 충성과 의로운 인물들이 흥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漢書曰……特吠非其主耳 : 《漢書》 〈鄒陽傳〉에는 “桀之犬 可使吠堯”라는 구절만 보이고, 《史記》 〈淮陰侯傳〉에 위의 내용 전체가 보인다.
역주2 漢高祖 赦季布 : 계포는 본래 項羽의 부하 장수로 여러 번 劉邦, 즉 한 고조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정하자 계포를 잡아들인 자에게 千金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藤公이 그의 어짊을 알고 고조에게 간하여 죄를 용서하고 郞中으로 삼았다. 《史記 권100 季布傳》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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