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孤하여 落魄하여 棄貲産不營이로되 有大志하여 通貫書術하니라
密得寶藏書하고 輒稱善하고 旣聞徵所爲하고 促召之하다.
魏公雖驟勝이나 而驍將銳士死傷略盡하고 又府無見財하여 戰勝不賞이니
若浚池峭壘하고 曠日持久하여 賊糧盡且去에 我追擊之하면 取勝之道也라하니
自請安輯山東하니 乃擢秘書丞하여 馳馹至黎陽하다.
始魏公起叛徒하고 振臂大呼하니 衆數十萬이요 威之所被半天下라
今君處必爭之地하여 不早自圖하니 則大事去矣라하다.
勣得書하고 遂定計歸하고 而大發粟饋淮安王之軍하다.
當是時에 河北州縣素事隱巢者不自安하고 往往曹伏思亂하다
道遇太子千牛李志安齊王護軍李思行傳送京師어늘 徵與其副謀曰
屬有詔에 宮府舊人普原之라한대 今復執送志安等하면 誰不自疑者리오
使還하니 帝悅하고 日益親하여 或引至臥內하여 訪天下事하다
徵亦自以不世遇하여 乃展盡底蘊無所隱하여 凡二百餘奏하니 無不剴切當帝心者라
左右有毀徵阿黨親戚者라하니 帝使溫彥博按訊한대 非是라
彥博曰 徵爲人臣하여 不能著形迹하고 遠嫌疑하여 而被飛謗하니 是宜責也라하니
豈有置至公하고 事形迹이리오 若上下共由玆路하면 邦之興喪未可知也니이다
徵頓首曰 願陛下俾臣爲良臣이요 毋俾臣爲忠臣하소서
良臣은 身荷美名하고 君都顯號하여 子孫傳承하여 流祚無疆이요
忠臣은 己嬰禍誅하고 君陷昏惡하여 喪國夷家하여 祗取空名이니 此其異也니이다
徵曰 君所以明은 兼聽也요 所以暗은 偏信也니이다
秦二世隱藏其身하고 以信趙高라가 天下潰叛而不得聞하고
故曰 君能兼聽하면 則姦人不得壅蔽하여 而下情通矣라하다
鄭仁基息女美而才하여 皇后建請爲充華하고 典冊具한대 或言許聘矣라하다
徵諫曰 陛下處臺榭엔 則欲民有棟宇하고 食膏粱엔 則欲民有飽適하고 顧嬪御엔 則欲民有室家하신대
今鄭已約昏이어늘 陛下取之하시면 豈爲人父母意리오
高昌王麴文泰將入朝어늘 西域諸國欲因文泰悉遣使者奉獻이러라
徵曰 異時文泰入朝에 所過供擬不能具어늘 今又加諸國焉하면 則瀕塞州縣以乏致罪者衆하리이다
彼以商賈來하면 則邊人爲之利하고 若賓客之하면 中國蕭然耗矣리이다
漢建武時에 西域請置都護送侍子하되 光武不許하니 不以蠻夷敝中國也일새니이다
於是帝卽位四年에 歲斷死二十九하여 幾至刑措하고 米斗三錢이라
答曰 此不爲聖哲論也라 聖哲之治는 其應如響하여 期月而可하니 蓋不其難하니이다
秦任法律하고 漢雜霸道하니 皆欲治不能이요 非能治不欲이니이다
徵은 書生이라 好虛論하여 徒亂國家하니 不可聽이니이다
徵曰 五帝三王不易民以教라 行帝道而帝하고 行王道而王하니 顧所行何如爾니이다
桀爲亂이어늘 湯放之하고 紂無道어늘 武王伐之하여 湯武身及太平하니이다
若人漸澆詭하여 不復返朴하면 今當爲鬼爲魅리니 尙安得而化哉리잇가
至是하여 天下大治하니 蠻夷君長이 襲衣冠하고 帶刀宿衛하니라
東薄海하고 南踰嶺하며 戶闔不閉하고 行旅不齎糧하여 取給於道하다
帝謂群臣曰 此徵勸我行仁義하여 旣效矣라 惜不令封德彜見之라하다
俄檢校侍中
하고 進爵
하다 帝幸九成宮
이어늘 宮御舍圍川宮下
하다
僕射李靖侍中王珪繼至러니 吏改館宮御以舍靖珪하니라
詔幷按之하니 徵曰 靖珪皆陛下腹心大臣이요 宮人止後宮掃除隸耳니
方大臣出하면 官吏諮朝廷法式하고 歸來하면 陛下問人間疾苦라
以此按吏하면 且駭天下耳目이라하다 帝悟하고 寢不問하다
魏徵王珪事隱太子巢刺王時에 誠可惡어늘 我能棄怨用才하니 無羞古人이라
徵曰 臣以事有不可라 故諫이어늘 若不從輒應이면 恐遂行之니이다
若面從可하고 方別陳論은 此乃後言이니 非稷卨所以事堯舜也니이다
帝大笑曰 人言徵舉動疏慢이어늘 我但見其嫵媚耳로다
徵再拜曰 陛下導臣使言
하시니 所以敢然
이요 若不受
하시면 臣敢數批
哉
리오
七年에 爲侍中하고 尙書省滯訟不決者를 詔徵平治하다
徵不素習法하고 但存大體하여 處事以情하니 人人悅服하니
公獨不見金在鑛가 何足貴邪리오 善冶鍛而爲器라야 人乃寶之라
朕方自比於金하고 以卿爲良匠而加礪焉이라 卿雖疾이라도 未及衰하니 庸得便爾아하니
徵懇請이어늘 數却愈牢하니라 乃拜特進하고 知門下省事하고
詔朝章國典
하고 參議得失
하고 祿賜國官
竝同職事
하다
文德皇后旣葬에 帝卽苑中作層觀하여 以望昭陵할새 引徵同升하니
徵曰 臣以爲陛下望獻陵이요 若昭陵은 臣固見之니이다
帝泣하고 爲毀觀하다 尋以定五禮하고 當封一子縣男한대 徵請封孤兄子叔慈하다
徵曰 隋惟責不獻食과 或供奉不精한대 爲此無限하여 而至於亡하니이다
故天命陛下代之하니 正當兢懼戒約이어늘 奈何令人悔爲不奢아
若以爲足하면 今不啻足矣요 以爲不足하면 萬此寧有足邪아
夫上易事하고 下易知하면 君長不勞하고 百姓不惑이라 故君有一德하고 臣無二心이라
夫刑賞之本은 在乎勸善而懲惡이니 帝王所與天下畫一은 不以親疏貴賤而輕重者也니이다
今之刑賞은 或由喜怒하며 或出好惡하니 喜則矜刑於法中하고 怒則求罪於律外하며
小人之惡不懲하고 君子之善不勸하고 而望治安刑措는 非所聞也니이다
且暇豫而言엔 皆敦尙孔老하되 至於威怒엔 則專法申韓하니이다
頃者에 罰人할새 或以供張不贍하고 或不能從欲하나니 皆非致治之急也니이다
以隋府藏으로 況今之資儲하고 以隋甲兵으로 況今之士馬하고 以隋户口로 況今之百姓하여 挈長度大인댄 曾何等級焉이리잇가
然隋以富彊而喪은 動之也요 我以貧窮而安은 靜之也니
靜之則安하고 動之則亂은 人皆知之라 非隱而難見과 微而難察也니이다
不蹈平易之塗하고 而遵覆車之轍은 何哉잇가 安不思危하고 治不念亂하고 存不慮亡也니이다
方隋未亂에 自謂必無亂하고 未亡에 自謂必不亡이라
所以甲兵亟動하고 徭役不息하여 以至戮辱而不悟滅亡之所由也니 豈不哀哉잇가
夫監形之美惡
인댄 必就
하고 監政之安危
인댄 必取亡國
이니이다
臣願當今之動靜은 以隋爲鑑하면 則存亡治亂을 可得而知니이다
思所以危則安矣요 思所以亂則治矣요 思所以亡則存矣니
存亡之所在
는 在節嗜欲
하고 省游畋
하고 息靡麗
하고 罷不急
하고 愼偏聽
하고 近忠厚
하고 而已
니이다
夫守之則易나 得之實難이니 今旣得其所難인댄 豈不能保其所易리잇가
陛下貞觀之初엔 導人使諫하고 三年以後에 見諫者悅而從之러니
對曰 陛下初卽位에 論元律師死어늘 孫伏伽諫以爲法不當死라하니
或曰 賞太厚라한대 答曰 朕卽位에 未有諫者라 所以賞之라하시니 此導人使諫也니이다
謂冑曰 弟守法如此하면 不畏濫罰이라하시니 此悅而從諫也니이다
近皇甫德參上書言호대 修洛陽宮은 勞人也요 收地租는 厚斂也요 俗尙高髻는 宮中所化也라하여늘
陛下恚曰 是子使國家不役一人하고 不收一租하고 宮人無髮이라야 乃稱其意라커늘
臣奏호대 人臣上書는 不激切이면 不能起人主意니 激切이 卽近訕謗이니이다하니
于時에 陛下雖從臣言하여 賞帛罷之나 意終不平하니 此難於受諫也니이다
隋有天下三十餘年에 風行萬里하고 威憺殊俗하되 一旦舉而棄之하니이다
彼煬帝者가 豈惡治安喜滅亡哉리오 恃其富彊하고 不虞後患也라
驅天下하고 役萬物하여 以自奉養하고 子女玉帛是求하며 宮宇臺榭是飾하며 徭役無時하고 干戈不休하니
外示威重이나 內行險忌하여 讒邪者進하고 忠正者退하니이다
하고 人不堪命
하여 以致殞匹夫之手
하고 爲天下笑
하니 聖哲乘機
하사 拯其危溺
하니이다
今宮觀臺榭를 盡居之矣요 奇珍異物을 盡收之矣며 姬姜淑媛을 盡侍於側矣요 四海九州를 盡爲臣妾矣니이다
若能鑑彼所以亡하고 念我所以得하여 焚寶衣하며 毀廣殿하며 安處卑宮인댄 德之上也니이다
若成功不廢하여 卽仍其舊하고 除其不急인댄 德之次也니이다
不惟王業之艱難하여 謂天命可恃라하여 因基增舊하고 甘心侈靡하여 使人不見德而勞役是聞인댄 斯爲下矣니이다
以暴易暴하고 與亂同道하면 夫作事不法하여 後無以觀하리이다
人怨神怒하면 則災害生하고 災害生하면 則禍亂作하고 禍亂作에 而能以身名令終者鮮矣니이다
是歲에 大雨하여 穀洛溢하고 毀宮寺十九하고 漂居人六百家하다
徵陳事曰 臣聞호니 爲國基於德禮하고 保於誠信이라하니
誠信立하면 則下無二情하며 德禮形하면 則遠者來格이니이다
然則言而不行은 言不信也요 令而不從은 令無誠也니
自王道休明으로 綿十餘載하여 倉廩愈積하고 土地益廣이나
由待下之情이 未盡誠信이라 雖有善始之勤이라도 而無克終之美라
故便佞之徒는 得肆其巧하여 謂同心爲朋黨하고 告訐爲至公하고 彊直爲擅權하고 忠讜爲誹謗이라하니이다
謂之朋黨하면 雖忠信이나 可疑하고 謂之至公하면 雖矯僞나 無咎하니
彊直者는 畏擅權而不得盡하고 忠讜者는 慮誹謗而不敢與之爭하니이다
熒惑視聽하고 鬱於大道하니 妨化損德이 無斯甚者니이다
夫中智之人이 豈無小惠리오마는 然慮不及遠이라 雖使竭力盡誠이나 猶未免傾敗어늘 況內懷姦利하여 承顔順旨乎아
今謂之善人矣라하고 復慮其不信하면 何異立直木而疑其景之曲乎아
故上不信하면 則無以使下하고 下不信하면 則無以事上하니 信之爲義大矣라
曰 不能知人이 害霸也요 知而不能用이 害霸也요 用而不能任이 害霸也요 任而不能信이 害霸也요 旣信而又使小人參之가 害霸也라하니이다
饋間倫曰 鼓之嗇夫를 間倫知之하니 請無疲士大夫하고 而鼓를 可得이라하되
穆伯不應이어늘 左右曰 不折一戟하고 不傷一卒하여 而鼓를 可得이어늘 君奚不爲아하니
穆伯曰 間倫之爲人也가 佞而不仁하니 若使間倫下之하면 吾不可以不賞이어늘
若賞之하면 是賞佞人也라 佞人得志하면 是使晉國으로 捨仁而爲佞이라
夫穆伯은 列國大夫요 管仲은 霸者之佐로되 猶能愼於信任하고 遠避佞人이어늘 況陛下之上聖乎아
若欲令君子小人으로 是非不雜인댄 必懷之以德하고 待之以信하고 厲之以義하고 節之以禮하여
然後善善而惡惡하고 審罰而明賞하면 無爲之化가 何遠之有리오
善善而不能進하며 惡惡而不能去하고 罰不及有罪하며 賞不加有功하면 則危亡之期도 或未可保니이다하니
帝手詔嘉答하니라 於是에 廢明德宮玄圃院하여 賜遭水者하다
他日에 宴群臣할새 帝曰 貞觀以前에 從我定天下하고 間關草昧는 玄齡功也요
貞觀之後에 納忠諫하여 正朕違하여 爲國家長利는 徵而已니
帝曰 徵蹈履仁義하여 以弼朕躬하여 欲致之堯舜하니 雖亮無以抗이라
時上封者衆한대 或不切事라 帝厭之하고 欲加譙黜이어늘
徵曰 古者
에 立
은 欲聞己過
니 封事
는 其謗木之遺乎
니이다
言而是乎면 爲朝廷之益이요 非乎라도 無損於政이니이다 帝悅하고 皆勞遣之하다
十三年에 阿史那結社率作亂하고 雲陽石然하고 自冬至五月히 不雨하니 徵上疏極言曰
守而不失하시고 儉約朴素를 終始弗渝하시니 德音在耳하여 不敢忘也니이다
頃年以來로 寖不克終하니 謹用條陳하여 裨萬分一하니이다
陛下居常論議이 遠輩堯舜이어늘 今所爲는 更欲處漢文晉武下乎아 此不克終一漸也니이다
對曰 不以道導之면 則吾讐也니 若何不畏리오하시니
陛下在貞觀初에 護民之勞하며 喣之如子하여 不輕營爲러니
頃旣奢肆하여 思用人力하여 乃曰 百姓無事則易驕하고 勞役則易使라하시니
自古未有百姓逸樂而致傾敗者니 何有逆畏其驕而爲勞役哉아 此不克終二漸也니이다
陛下在貞觀初에 役己以利物이러니 比來縱欲以勞人하니
雖憂人之言은 不絕於口나 而樂身之事은 實切諸心하니
無慮營構하고 輒曰 弗爲此면 不便我身이라하시니 推之人情에 誰敢復爭이리오
在貞觀初에 親君子하며 斥小人이러니 比來輕褻小人하고 禮重君子하니
重君子也는 恭而遠之하고 輕小人也는 狎而近之하니
莫見其是하면 則不待間而疏하고 莫見其非하면 則有時而昵하니
昵小人疏君子而欲致治는 非所聞也니 此不克終四漸也니이다
而今難得之貨가 雜然竝進하고 玩好之作이 無時而息이라
上奢靡而望下朴素하고 力役廣而冀農業興은 不可得已니 此不克終五漸也니이다
貞觀之初에 求士如渴하여 賢者所舉는 卽信而任之하고 取其所長하여 常恐不及이러니
比來由心好惡하여 以衆賢舉而用이라가 以一人毀而棄며
夫行有
하고 事有成迹
하니 一人之毀
는 未必可信
이요 積年之行
은 不應頓虧
니이다
使讒佞得行하고 守道疏間이니 此不克終六漸也니이다
數年之後에 志不克固하여 鷹犬之貢으로 遠及四夷하고 晨出夕返하여 馳騁爲樂하니
今外官奏事에 顔色不接하고 間因所短하여 詰其細過하니
雖有忠款이라도 而不得申하니 此不克終八漸也니이다
比恃功業之大하고 負聖智之明하여 長慠縱欲하여 無事興兵하고 問罪遠裔하니
親狎者는 阿旨不肯諫하고 疏遠者는 畏威不敢言하니
貞觀初에 頻年霜旱하여 畿內戶口가 竝就關外에 攜老扶幼하여 來往數年이로되
卒無一戶亡去하니 此由陛下矜育撫寧이라 故死不攜貳也니이다
雜匠當下
에 顧而不遣
이라 正兵番上
에 復別驅任
하고 하니 遞子背望於道
라
면 百姓之心
이 恐不能如前日之怗泰
하리니 此不克終十漸也
니이다
今旱熯之災는 遠被郡國하고 凶醜之孽이 起於轂下하니
千載休期는 時難再得이어늘 明主可爲而不爲하시니 臣所以鬱結長歎者也로소이다
疏奏에 帝曰 朕今聞過矣니 願改之하여 以終善道요 有違此言인댄 當何施顔面與公相見哉리오
方以所上疏로 列爲屏障하여 庶朝夕見之하고 兼錄付史官하여 使萬世知君臣之義라하고
高昌平하고 帝宴兩儀殿할새 歎曰 高昌若不失德하면 豈至於亡가
然朕亦當自戒하여 不以小人之言而議君子하여 庶幾獲安也라하다
桓公避席而謝曰 寡人與二大夫가 能無忘夫子之言이면 則社稷不危矣라하니이다
帝曰 朕不敢忘布衣時하리니 公不得忘叔牙之爲人也하라
帝遣使者
하여 至西域
하여 立
한대 未還
에 又遣使賷金帛
하여 諸國市馬
하니
徵曰 今立可汗未定에 卽詣諸國市馬하시니 彼必以爲意在馬요 不在立可汗이리이다
可汗得立이라도 必不懷恩이요 諸蕃聞之하면 以中國薄義重利하니 未必得馬而先失義矣라하니이다
當今忠謇貴重無踰徵하니 我遣傅皇太子하여 一天下之望하여 羽翼固矣라하고
漢太子以
爲助
하니 我賴公
은 其義也
라 公雖臥
나 可擁全之
하라
徵家初無正寢이러니 帝命輟小殿하고 材爲營構한대 五日畢이라
令中郎將宿其第하여 動靜輒以聞하고 藥膳賜遺無算하니 中使者綴道라
帝臨哭하고 爲之慟하며 罷朝五日하다 太子舉哀西華堂하다
詔內外百官
皆赴喪
하고 贈司空相州都督
하고 諡曰文貞
이라하고
將葬에 其妻裴辭曰 徵素儉約이어늘 今假一品禮하시고 儀物褒大하니 非徵志니이다
帝後臨朝歎曰 以銅爲鑑하면 可正衣寇하고 以古爲鑑하면 可知興替하고 以人爲鑑하면 可明得失이라
朕嘗保此三鑑하여 內防己過러니 今魏徵逝하여 一鑑亡矣라
始半藁어늘 其可識者曰 天下之事는 有善有惡하여 任善人則國安하고 用惡人則國弊라
公卿之內에 情有愛憎하여 憎者惟見其惡하고 愛者止見其善이라
朕顧思之하니 恐不免斯過라 公卿侍臣은 可書之於笏하여 知而必諫也라하다
徵狀貌不逾中人이어늘 有志膽하여 每犯顔進諫에 雖逢帝甚怒라도 神色不徙하여 而天子亦爲霽威라
奏曰 向聞陛下有關南之行하여 旣辦而止는 何也오하니
帝曰 畏卿하여 遂停耳라하다 始에 喪亂後라 典章湮散하니
嘗以小戴禮綜彙不倫으로 更作類禮二十篇하여 數年而成이라
故徵侍宴
에 奏
하면 則俛首不顧
하고 至
하면 則諦玩無斁
하니 舉有所諷切如此
라
徵亡
에 帝思不已
하고 登
觀畫像
하고 賦詩悼痛
하니 聞者媢之
하고 毀短百爲
하다
徵嘗薦杜正倫侯君集才任宰相
이러니 에 孅人遂指爲阿黨
하고
帝滋不悅이라가 乃停叔玉昏하고 而仆所爲碑하니 顧其家衰矣라
卽召其家到行在하여 賜勞妻子하고 以少牢祠其墓하고 復立碑하고 恩禮加焉하다
叔玉襲爵爲光祿少卿이라 神龍初에 以其子膺紹封하다
叔瑜는 豫州刺史요 善草隸하여 以筆意傳其子華及甥薛稷하다
開元中에 寢堂火하여 子孫哭三日하니 詔百官赴弔하다
徵五世孫謩라 謩는 字申之라 擢進士第하여 同州刺史楊汝士辟爲長春宮巡官이라
文宗讀貞觀政要하고 思徵賢하여 詔訪其後어늘 汝士薦爲右拾遺하니라
邕管經略使董昌齡誣殺參軍衡方厚하여 貶漵州司戶나 俄徙峽州刺史하다
比昌齡專殺不辜어늘 事跡暴章하여 家人銜冤하고 萬里投訴하니이다
今又授刺史하여 復使治人하니 紊憲章하고 乖至治하여 不見其可니이다하니
御史中丞李孝本
은 宗室子
러니 하고 其二女沒入宮
하다
謩上言호대 陛下卽位에 不悅聲色하사 于今十年에 未始采擇이러시니
數月以來
로 稍意聲伎
하여 閱選
이 百十未已
하고 莊宅收市
가 亹亹有聞
이어늘
今又取孝本女하여 內之後宮하니 宗姓不育하고 寵幸爲累하여 傷治道之本하고 速塵穢之嫌이니이다
惟陛下는 崇千載之盛德하시고 去一旦之玩好하소서하니
帝卽出孝本女하고 詔曰 乃祖在貞觀時에 指事直言하여 無所避하니 每覽國史에 朕與嘉之하노라
謩爲拾遺하여 屢有獻納이라 夫備灑埽於內니 非曰聲妓며 恤宗女之幼하니 不爲漁取라
然疑似之間에 不可戶曉어늘 謩辭深切하니 其惜我之失이 不亦至乎아
謩雖居位日淺이나 朕何愛一官가 增直臣之氣하니 其以謩爲右補闕하라
先是에 帝謂宰相曰 太宗得徵하여 參裨闕失하고 朕今得謩하여 又能極諫하니
議者頗言司馬品高하여 郎官刺史迭處니 不可以授賤工이라하니 帝意右之하다
宰相諭諫官勿復言이어늘 謩獨固諫不可하여 工降潤州司馬하다
荊南監軍呂令琛縱傔卒辱江陵令
이어늘 觀察使韋長避不發
하고 移
言狀
하다
謩劾長任察廉하여 知監軍侵屈官司하되 不以上聞하고 私白近臣하여 亂法度하니 請明其罰하소서하되 不報하다
俄爲起居舍人이어늘 帝問호대 卿家書詔頗有存者乎아하니
謩對호대 臣頃爲諫臣이라 故得有所陳이나 今則記言動하니 不敢侵官이라하다
帝索起居注하니 謩奏호대 古置左右史하여 書得失하여 以存鑑戒니이다
陛下所爲善은 無畏不書하고 不善은 天下之人이 亦有以記之니이다
謩曰 向者에 取觀은 史氏爲失職하니이다 陛下一見하시면 則後來所書에 必有諱屈하리니
善惡不實하면 不可以爲史니 且後代何信哉리오하니 乃止하다
刑部大理는 法官也어늘 決大獄不與知면 律令謂何리오 請歸有司하노이다하되 未報하다
謩上言호대 事繫軍하면 卽推軍中하고 如齊民이면 宜付府縣이니이다
今獄不在有司하니 法有輕重이어늘 何從而知리오하니
擢諫議大夫하여 兼起居舍人弘文館直學士하니 謩固讓不見可하여 乃拜하다
武宗立에 謩坐二人黨하여 出爲汾州刺史하고 俄貶信州長史하다
遷御史中丞하여 發駙馬都尉杜中立姦贓하니 權戚縮氣하다
俄兼戶部侍郎事어늘 謩奏호대 中丞은 紀綱所寄라 不宜雜領錢穀하니 乞專治戶部하노이다하니
建言호대 今天下粗治나 惟東宮未立하니 不早以正人傅導之하면 非所以存副貳之重이라하고
且泣下한대 帝爲感動하니라 自敬宗後로 惡言儲嫡事라 故公卿無敢開陳者러니
時帝春秋高하고 嫡嗣未辨에 謩輔政하여 白發其端하니 朝議歸重하다
會詹毗國獻象한대 謩以爲非土性이라 不可畜하니 請還其獻하노이다하니 詔可하다
遷中書侍郎하다 大理卿馬曙가 有犀鎧數十首어늘 懼而瘞之러니
奴王慶以怨告曙藏甲有異謀한대 按之無他狀하여 投曙嶺外하고 慶免하니라
議者謂奴訴主나 法不聽하다 謩引律固爭하여 卒論慶死하다
上疾求代한대 召拜吏部尙書하고 因久疾하여 檢校尙書右僕射太子少保하다
謩爲宰相하여 議事天子前에 他相或委抑規諷이나 惟謩讜切無所回畏라
宣宗嘗曰 謩名臣孫이라 有祖風하여 朕心憚之라하다
贊曰 君臣之際는 顧不難哉아 以徵之忠而太宗之睿로도 身歿未幾에 猜譖遽行이라
始徵之諫이 累數十餘萬言이요 至君子小人하얀 未嘗不反復하여 爲帝言之나
故曰 皓皓者易汚하고 嶢嶢者難全이라하니 自古所歎云이라
唐柳芳稱徵死에 知不知 莫不恨惜하여 以爲三代遺直이라하니
諒哉
로다 謩之論議挺挺
하여 有祖風烈
하니 詩所謂
者歟
아
위징魏徵은
자字가
현성玄成이고
위주魏州 곡성曲城 사람이다.
위징魏徵(《고선군신도상古先君臣圖像》)
어려서 고아가 되자 실의에 빠져 재산을 내팽개치고 경영하지 않았으나, 큰 뜻이 있어 서사書史와 술수術數에 통하였다.
수隋나라 말기 전란에는 도사道士로 위장하였다.
무양군승武陽郡丞 원보장元寶藏이 병사를 일으켜 이밀李密과 호응하고 위징에게 편지와 격문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밀이 원보장의 편지를 보고는 매번 잘 쓴다고 칭찬하였고, 위징이 썼다는 것을 듣고는 재촉하여 위징을 불렀다.
위징이 열 가지 계책을 올려 이밀을 설득하였는데 이밀이 쓰지 못하였다.
왕세충王世充이 낙구洛口를 공격하자 위징이 이밀의 장사長史 정정鄭頲을 만나보고 말하였다.
“위공魏公(이밀李密의 자칭)이 비록 누차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맹장猛將과 정병精兵이 죽고 다쳐 거의 없어지고 또 부고府庫에 현재 남아 있는 재물이 없어서 전쟁에 승리하였지만 상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해자를 깊이 파며 영첩營疊을 높이 쌓고 시일을 끌며 지구전持久戰을 하여 적군의 양식이 다 떨어져 장차 철수하려고 할 때에 우리들이 적군을 추격하면 승리를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정정이 말하기를 “노쇠한 선비의 평범한 말일 뿐이오.”라고 하자, 위징이 인사하지 않고 떠났다.
후에 위징魏徵은 이밀李密을 따라 서울에 왔는데 오랫동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자신이 산동山東을 안무按撫하겠다고 청하자 이에 비서승秘書丞에 발탁되어 역마를 달려 여양黎陽에 도착하였다.
이때에 이적李勣이 여전히 이밀을 대신해 산동을 지키고 있었는데 위징이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처음에 위공魏公이 반란 군사를 일으켜 팔을 휘두르며 크게 소리치니 병사들이 수십만에 이르고 위엄이 행해진 곳이 천하의 반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패배하자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마침내 당唐나라에 귀부한 것은 진실로 천명天命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반드시 다툴 땅에 처하고서 일찌감치 스스로 도모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의 대사大事가 틀어질 것입니다.”
이적이 편지를 받고 마침내 당唐나라에 귀순할 계획을 정하고 곡식을 크게 풀어서 회안왕淮安王(이신통李神通, 고조髙祖 이연李淵의 종부제從父弟)의 군대에 보냈다.
마침 두건덕竇建德이 여양黎陽을 함락하고 위징魏徵을 잡아 자신이 세운 조정에서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임명하였다.
두건덕이 패배하자 위징은 배구裴矩와 동관潼關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은태자隱太子(이건성李建成)가 불러들여 세마洗馬로 삼았다.
위징은 진왕秦王(이세민李世民)이 공이 높은 것을 보고 은밀히 은태자에게 일찍 처치할 계획을 세우라고 권하였다.
은태자가 실패하자 진왕이 위징을 꾸짖기를 “네가 우리 형제들을 다투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위징이 대답하기를 “태자께서 일찍 저의 말을 따랐다면 오늘의 재앙에 죽지 않았을 것이오.” 하였다.
진왕은 위징의 강직함을 훌륭하게 여겨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위징魏徵을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하고 거록현남鉅鹿縣男에 봉하였다.
이때 하북河北 주현州縣의 원래 은태자隱太子와 소랄왕巢剌王(소랄왕,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의 시호)을 섬기던 자들은 스스로 편안해하지 못하고 이따금 무리 지어 몰래 난리를 일으킬 생각을 하였다.
위징이 태종에게 아뢰었다. “지극히 공정함을 보이지 않으면 재앙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대가 가서 하북河北 사람들을 안정시키고 타이르도록 하시오.”
위징이 도중에 은태자의 천우千牛 이지안李志安과 제왕의 호군護軍 이사행李思行을 잡아 서울로 전송하는 일행을 만났는데 위징이 그의 부사副使와 상의하였다.
“위촉받은 조서에 동궁東宮과 제왕부齊王府의 옛사람들을 모두 사면하라고 하였는데, 지금 다시 이지안李志安 등을 잡아서 보내면 누가 스스로 의심하지 않겠소?
우리들이 비록 가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오.”즉시 그들을 사면한 뒤에 조정에 보고하였다.
사신이 돌아오자 태종이 기뻐하고 나날이 더욱 친밀히 대하여, 혹은 침실까지 끌어들여 천하의 정사를 물었다.
위징 또한 자신이 세상에 만나지 못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숨김없이 다 펼쳐서 모두 2백여 건을 아뢰었으니, 태종의 마음에 적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고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겸하였다.
위징魏徵이 친척들을 비호하며 편애한다고 비방하는 측근이 있자 태종太宗이 온언박溫彥博에게 조사하게 하였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온언박이 말하였다. “위징이 신하가 되어 행적을 드러내지 않고 혐의를 멀리 피하지 않아 비방을 받았으니 이는 질책해야 합니다.”
위징이 태종을 뵙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신은 들으니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함께하는 것을 한 몸이라 한다.’고 하니
어찌 지극히 공정한 국사를 버려두고 일의 행적을 드러내는 것을 일삼겠습니까. 만일 위와 아래가 함께 이러한 길을 따른다면 국가의 흥망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내가 잘못을 깨달았소.”
위징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을 양신良臣이 되게 하시고 신을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마소서.”
태종이 말하였다. “충신과 양신에 차이가 있소?”
위징이 말하였다. “양신은 직稷‧설契‧고요咎陶(고요皐陶)이고 충신忠臣은 관룡방關龍逢(관룡방)‧비간比干입니다.
양신은 자신도 미명美名을 얻고 임금도 훌륭한 이름을 듣게 되어 자손이 전승하여 복록이 끝없이 전해지는 것이고,
충신은 자신이 재화와 죽음을 받게 되고 임금이 어두우며 악한 데에 빠져 집안과 나라를 망치면서 다만 헛된 이름만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어서 위징에게 물었다. “임금 된 자는 무슨 방도로 명철해지고 무엇을 잘못하여 어두워지는 것이오?”
위징이 말하였다. “임금이 명철해지는 것은 널리 듣기 때문이고, 어두워지는 것은 한쪽만 신임하기 때문입니다.
요堯‧순舜은 사방의 문을 열어두며, 사방 사람의 눈으로 밝게 보며, 사방 사람의 귀로 들었습니다.
비록 공공共工과 곤鯀의 무리가 있어도 총명을 가리지 못하였고, 조용할 때는 말을 잘하나 등용되어서는 그와 어긋나는 행동이 총명을 미혹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는 자신을 숨기고 조고趙高만 신임하다가 천하가 무너지고 반란이 일어나도 그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주이朱异만 신임하다가 후경侯景이 〈군대를 일으켜〉 도성 관문으로 향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우세기虞世基만 신임하다가 역적들이 천하에 가득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널리 들으면 간사한 사람들이 임금을 막아 가리지 못하여 아랫사람의 실정이 임금께 통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인기鄭仁基의 딸이 아름답고 재주가 있어서, 장손황후長孫皇后가 건의하여 충화充華(여관女官 명칭)로 삼기를 청하고 책봉하는 글을 갖추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길, 정인기가 다른 사람과 혼인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위징魏徵이 간언하였다. “폐하陛下께서 대사臺榭에 머무를 때는 백성들에게 주택이 있기를 바랐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는 백성들이 배부르기를 바랐고, 빈어嬪御를 가까이할 때는 백성들에게 아내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지금 정씨가 이미 혼인의 약속을 하였는데 폐하께서 그를 취하신다면 어찌 백성의 부모가 되는 뜻이겠습니까.”
태종太宗은 통렬하게 자신을 허물하고 즉시 조서를 내려 책봉을 정지하였다.
정관貞觀 3년(629)에 비서감秘書監으로 조정朝政에 참여하였다.
고창왕高昌王 국문태麴文泰가 당唐나라에 조회하러 들어오려고 하자,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국문태를 통해서 모두 사신을 보내 진헌하려고 하였다.
태종은 조서를 내려 국문태의 사신 염달흘간厭怛紇干에게 그들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위징이 말하였다. “왕년에 국문태가 조회하러 들어올 때 지나가는 곳에서 공의供擬(필요한 물품 제공)를 갖출 수 없었는데, 지금 또 여러 나라를 더하게 된다면 주변 변방의 주현州縣들에 공의供擬 부족으로 죄를 받을 자가 많을 것입니다.
저들이 상인의 신분으로 오면 변방 사람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만약 그들을 빈객으로 대우한다면 중국에는 쓸데없이 소모되는 비용이 생길 것입니다.
한漢나라 건무建武(광무제光武帝의 연호, 25~55) 때에 서역西域에서 도호都護(서역西域 제국諸國을 통치하는 관명官名)를 설치해달라고 하면서 시자侍子를 보내겠다고 요청하였으나 광무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니 만이蠻夷가 중국을 어지럽히기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태종이 말하기를 “좋소.” 하고, 〈염달흘간을〉 뒤따라가서 그 조서의 시행을 정지시키게 하였다.
이에 태종太宗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한 해에 사형 판결을 받은 자가 29인뿐이어서 거의 형벌을 버리고 쓰지 않을 지경이 되었고 쌀 한 말 값이 3전錢이었다.
이보다 앞서 태종이 일찍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지금 큰 난리를 겪은 뒤이니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이오!”
위징魏徵이 말하였다. “큰 난리를 겪은 뒤에는 다스리기가 쉬우니 비유하면 굶주린 사람을 먹이기 쉬운 것과 같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옛날에 ‘선인善人이 나라를 백 년 동안 다스린 연후에 잔악한 이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위징이 대답하였다. “이는 성철聖哲한 제왕에게 해당되는 논의가 아닙니다. 성철의 다스림은 그 호응이 메아리처럼 빨라서 일 년이면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봉덕이封德彜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삼대三代 이후에 경박하고 속이는 것이 날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진秦나라는 법률에 의지하고 한漢나라는 패도霸道를 섞어 썼으니, 모두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이지 잘 다스릴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위징은 서생書生이라, 공담空談을 좋아하여 다만 국가를 어지럽힐 뿐이니, 그의 말을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위징이 말하였다.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은 백성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 오제의 도道를 시행하면 제帝가 되고 삼왕의 도道를 시행하면 왕王이 되니 시행한 것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볼 뿐입니다.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내몰아 70번 전투를 하여 그 혼란 속에 승리하여 이로 인해 무위無爲의 치적을 이루었고,
구려九黎가 도덕에 해를 끼치자 전욱顓頊이 그들을 정벌하여 이기고 나서 치세를 이루었고,
걸桀이 혼란한 짓을 일삼자 탕왕湯王이 그를 내쫓았고, 주紂가 무도함을 일삼자 무왕武王이 그를 정벌하여 탕왕과 무왕이 몸소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점점 경박하고 속여 다시 순박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지금 응당 모두 귀신과 도깨비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니, 오히려 어찌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봉덕이는 대답하지 못하였으나 마음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는데, 태종은 그 말을 받아들여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으니 만이蠻夷의 군장君長들이 의관을 입고 칼을 차고 숙위하였다.
국토가 동으로는 바닷가에 이르고 남으로는 오령五嶺을 넘었으며, 문을 닫지 않고 여행자들이 양식을 싸서 다니지 않아 길에서 조달하였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는 위징이 나에게 인의仁義를 행하라고 권하여 효험이 드러난 것이요. 봉덕이가 죽어서 이것을 보게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오.”
얼마 후에 위징魏徵은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고 군공郡公으로 작위가 올랐다. 태종太宗이 구성궁九成宮에 행차하였는데 궁녀들이 위천궁圍川宮에서 묵었다.
복야僕射 이정李靖과 시중侍中 왕규王珪가 이어서 이르렀는데, 관리가 궁녀들의 처소를 옮기게 하고 이정과 왕규를 묵게 하였다.
태종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위복威福이 이들로부터 나오는가! 어찌 나의 궁녀들을 경시하는가!”
그리고 조서를 내려 모두 조사하게 하니 위징이 말하였다. “이정과 왕규는 모두 폐하의 심복 대신이고 궁녀는 다만 후궁에 있으면서 소제하는 하인일 뿐입니다.
대신이 지방으로 나가면 그곳의 관리는 조정의 법도를 여쭈어보고, 돌아오면 폐하께서는 민간의 고통을 묻습니다.
저 관사官舍는 본래 이정 등이 이곳의 관리를 만나보던 곳이니 관리가 알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궁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서 음식을 바칠 때 이외에는 모시면서 받드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건으로 관리를 조사하면 또 천하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태종이 깨닫고는 명을 정지하여 묻지 않았다.
뒤에 태종이 단소루丹霄樓에서 연회를 할 때에 술을 마시다가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말하였다.
“위징魏徵‧왕규王珪가 은태자隱太子(이건성李建成)‧소랄왕巢刺王(이원길李元吉)을 섬길 때는 진실로 미워할 만하였는데 나는 원망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였으니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소.
그러나 위징은 매번 간언을 하여 내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말을 하면 바로 순응하지 않으니 어찌 된 것이오.”
위징이 말하였다. “신臣은 일에 옳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간언을 한 것인데 만약 따르지 않으시는데도 바로 순응하면 마침내 그러한 일을 행하실까 두렵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다만 바로 응낙하고 잠시 뒤에 따로 진술하여 논의하면 어찌 되지 않겠소.”
위징이 말하였다. “옛날 순舜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경계하기를 ‘내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다가 물러나서는 뒷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폐하 앞에서는 순종하여 옳다고 하고 곧바로 따로 진술하여 의논함은 이것이 바로 뒷말을 하는 것이니, 후직后稷‧설卨(설契)이 요堯‧순舜을 섬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태종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사람들이 위징의 거동이 소루하며 오만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다만 그 몸가짐의 아름다움을 볼 뿐이오.”
위징이 재배하고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신을 인도하여 말을 하게 하시니 감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말을 받아주지 않으신다면 신이 감히 자주 역린逆鱗을 저촉하겠습니까.”
정관貞觀 7년(633)에 위징魏徵이 시중侍中이 되었다. 상서성尙書省에 재결裁決하지 못하고 쌓여 있는 송사를 태종은 위징에게 조서를 내려 공평히 다스리게 하였다.
위징은 평소에 법률에 익숙하지 못하고 다만 대체를 보존하였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기를 실정에 맞게 하니, 사람들이 기뻐하여 승복하였다.
위징은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정국공鄭國公으로 승진하였다. 위징이 병이 심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공은 어찌 광석 속의 금을 보지 못하였소? 그것이 뭐가 귀할 것이 있겠소. 뛰어난 대장장이가 제련하여 기물로 만들어야만 사람들이 보물로 여기게 되오.
짐은 나 자신을 금에 비유하고 경을 뛰어난 대장장이로 여겨서 연마를 하겠소. 경이 비록 질병이 있더라도 아직 노쇠하지 않았으니, 어찌 갑자기 이렇게 그만둘 수 있소.”
위징이 간절하게 청하자 태종이 누차 물리쳤고 위징은 견고히 사퇴하였다. 이에 특진特進(산관散官)으로 임명하고 문하성門下省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조정과 국가의 전장典章을 알리고 득실을 의론하는 데 참여하게 하고, 그의 봉록俸祿‧상사賞賜‧봉국관리封國官吏‧방합防閤을 모두 직사관職事官(실직實職 관리官吏)과 같게 하였다.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장사 지내고 나서 태종太宗이 곧바로 후원後苑 안에 고층 누각을 지어 소릉昭陵(문덕황후 능)을 바라볼 적에 위징을 이끌고 함께 올라가니
위징이 자세히 보며 말하였다. “신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겠습니다.”
태종이 가리켜 보게 하거늘 위징이 말하였다. “이 소릉 말입니까?”
위징이 말하였다.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고조 능)을 바라본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릉은 신臣이 진실로 보았습니다.”
태종은 눈물을 흘리고 고층 누각을 헐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오례五禮를 정하고 한 명 아들에게 현남縣男을 봉해주게 되어 있었는데, 위징이 고아인 형의 아들 위숙자魏叔慈를 봉해주기 청하였다.
태종이 애처로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풍속을 권장할 만하오.” 하고, 바로 허락하였다.
능陵을 바라보며 고층 누각을 허물게 하다(《제감도설帝鑑圖說》)
후에 태종太宗이 낙양洛陽에 행차하여 소인궁昭仁宫에 머무를 때 꾸짖는 일이 많았다.
위징魏徵이 말하였다. “수隋나라는 음식을 바치지 않거나 공양한 것이 정갈하지 못함을 꾸짖었는데, 이러기를 한없이 하여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폐하에게 명하여 대신하게 하신 것이니 의당 조심하고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검약하셔야 하는데,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사치스럽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도록 하신단 말입니까.
만일 만족한다고 여긴다면 금일에만 만족하지 않을 것이고 만족하지 못하다고 여긴다면 이것보다 만 배 많아도 어찌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공公이 아니면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오.”
위징魏徵은 물러나서 또 상소를 올렸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덕을 밝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하셨다.’라고 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셨다.’라고 하며,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윗사람이 일을 쉽게 하고 아랫사람이 알기를 쉽게 하면 형벌이 번거롭지 않다.’라고 하고, ‘임금이 의심이 많으면 백성이 의혹에 빠지고, 아랫사람이 알기 어렵게 하면 임금이 힘들다.’라고 했습니다.
무릇 윗사람이 일을 쉽게 하고 아랫사람이 알기를 쉽게 하면, 임금이 힘들지 않고 백성은 의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한결같은 덕이 있고 신하는 두 가지 마음이 없습니다.
무릇 형벌과 포상의 근본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데 있으니, 제왕이 천하 사람들과 하나로 하는 것은 친소親疎와 귀천貴賤을 가지고 경중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형벌과 포상이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데에서 연유하며 혹은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에서 연유하니, 기쁜 사람을 만나면 법의 범위 안에서도 형벌을 주는 것을 가엾게 여기고 노여운 사람을 만나면 법률 밖에서까지 죄를 묻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죽을 뚫어 깃이라도 찾아내듯 치켜세우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때를 씻어내 상처 흔적이라도 찾아내듯 헐뜯습니다.
형벌이 넘치면 소인의 도가 자라나고 포상이 그르치면 군자의 도가 소멸됩니다.
소인의 악이 징계되지 않고 군자의 선이 권장되지 않고서 정치의 안정과 형벌의 폐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가하고 편안히 지내며 말할 때는 모두 공자孔子와 노자老子를 돈독히 숭상하지만 위엄과 노여움에 미칠 땐 오로지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만을 본받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의 종지가 크게 펼쳐지지 않고 각박한 풍조가 먼저 일어납니다.
옛날 백주려伯州犂가 그 손을 들어 왕자를 가리키고 손을 내려 현윤縣尹을 가리키자 초楚나라의 법이 폐단이 생겼고, 장탕張湯이 한 무제漢 武帝의 마음에 따라 형벌의 경중을 두자 한漢나라의 형법이 잘못되는데, 하물며 임금이 자기 마음대로 높이고 낮추는 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일전에 사람들에게 형벌을 줄 때에 혹은 공양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들기도 하고 혹은 욕구를 따르지 않은 것을 들기도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정치를 잘하는 데에 있어 시급한 것이 아닙니다.
귀함은 교만함과 함께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교만함이 저절로 이르고, 부유함은 사치함과 함께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사치함이 저절로 이른다는 것이 빈말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대신한 것은 실제로 수隋나라입니다.
수나라 창고에 저장된 물자를 가지고 지금의 저장된 물자에 비교해보고, 수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지금의 병력에 비교해보고, 수나라의 호구수户口數를 가지고 지금의 백성과 비교해볼 때 그 길이를 따지고 크기를 견주면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수나라가 부강함에도 패망한 것은 백성을 소동케 했기 때문이고, 우리가 빈궁함에도 평안한 것은 백성을 안정시켰기 때문입니다.
안정시키면 평안하고 소동시키면 혼란한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으로, 숨어 있어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미묘해서 살피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평이한 길을 밟아가지 않고, 전복된 과거 전례를 따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지 않고 다스려질 때 혼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생존할 때 멸망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나라가 혼란스럽지 않을 때 스스로 반드시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 망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 반드시 망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 때문에 병력을 자주 동원하고 요역徭役을 멈추지 않아, 죽임과 능욕을 당할 처지에 이르렀음에도 멸망의 원인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무릇 모양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살필 땐 반드시 잔잔한 물에 나아가고, 정사의 안정과 위기를 살필 땐 반드시 망국에서 취해옵니다.
그래서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은殷나라의 거울삼을 것이 멀리 있지 않고, ##하후夏后 시대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지금의 소동과 안정은 반드시 수隋나라를 떠올려 거울로 삼는다면 생존과 멸망, 치세와 난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위태로워지는 이유를 생각해낸다면 편안할 것이고, 혼란해지는 이유를 생각해낸다면 다스려질 것이며 패망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낸다면 생존할 것입니다.
생존과 멸망의 소재는 사적인 기호와 욕구를 절제하고, 유람과 사냥을 줄이고, 화려한 궁궐의 건축을 멈추고, 시급하지 않은 일을 파하고, 한쪽 말만 듣는 것을 삼가하고, 충성스러우며 후덕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무릇 지키는 것은 쉽지만 취하는 것은 실로 어려우니, 지금 이미 어려운 것을 얻었는데 어찌 그 쉬운 것을 보존하지 못하겠습니까.
보존한 것이 견고하지 못하면 교만과 사치와 음탕한 마음이 그것을 동요시키게 될 것입니다.”
태종太宗이 여러 신하들과 적취지積翠池에서 연회하며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시를 지었다.
위징魏徵이 《서한西漢》을 지었는데 졸장卒章에 말하였다. “마침내 숙손통叔孫通의 예禮에 도움을 받아 비로소 황제가 높은지를 알게 되었다.”
태종이 말하였다. “위징의 말은 나를 예禮로 요약해주지 않은 적이 없다.”
뒷날 조용히 물었다. “근래의 정치政治는 어떠하오.”
위징은 오랫동안 태평하여 태종의 마음에 소홀한 것이 있다고 간파하고 이어서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정관貞觀의 초기에는 사람들에게 간언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3년 이후에는 간언을 하는 자를 보면 기뻐하며 따르시더니
근래 1, 2년에는 억지로 간언을 받아들이고는 결국엔 평안해하지 않습니다.”
태종이 놀라며 말하였다. “공公은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오?”
위징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는 원율사元律師를 사형에 판결하자 손복가孫伏伽가 간언하기를 ‘형법에는 사형에 해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폐하께서 난릉공주蘭陵公主(태종太宗의 딸)의 전원을 하사했는데 백만 전의 가치였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포상이 너무 큽니다.’라고 하자, 대답하시기를 ‘짐이 즉위하고 나서 간언한 자가 없었소. 그래서 포상을 한 것이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사람들을 간언하도록 인도하신 예입니다.
뒤에 유웅柳雄이 수隋나라 때 받은 자급資級을 멋대로 말하고 다니자, 유사有司가 듣고 그 위조僞造를 탄핵하여 유웅을 사형으로 판결하려고 하였는데,
대주가 ‘법에는 다만 도형徒刑에 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아뢰고 대주가 고집하기를 4, 5차례 하고 나서야 석방하였습니다.
대주에게 말하기를 ‘다만 이와 같이 법을 지킨다면 벌을 함부로 줄 일을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기쁘게 간언을 따르신 예입니다.
근래에 황보덕참皇甫德參이 올린 글에 ‘낙양궁洛陽宮을 고쳐 짓게 한 것은 백성을 피로케 한 것이고, 지조地租를 거두게 한 것은 거두기를 많이 한 것이며, 세속에서 여자 머리 쪽을 높게 함을 숭상하는 것은 궁중에서 교화시킨 것입니다.’라고 하자,
폐하께서 화를 내며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국가에서 한 사람도 부리지 않고 조금의 지조地租도 걷지 않고 궁녀들이 머리카락이 없게 되어야 그의 마음에 맞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기에,
신이 상주하기를 ‘신하의 상서上書가 격렬하고 절실하지 않으면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니, 격렬하고 절실함은 비방과 유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에 폐하께서 비록 신의 말을 따르시어 황보덕참에게 비단을 상으로 내리시고 〈위의 세 가지 일을〉 그만두게 하셨지만 마음으로는 결국 편안치 않아 하였으니, 이것이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신 것입니다.
”태종이 깨닫고 말하였다. “공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괴로워지는 것이오.”
이보다 앞서 태종太宗이 비산궁飛山宮을 지었는데 위징魏徵이 상소를 올렸다.
“수隋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30여 년 만에 위풍이 만 리까지 퍼지고 위세가 외국까지 진동하였으나 하루아침에 국가를 들어다 내버리게 되었습니다.
저 수 양제隋 煬帝가 어찌 천하의 치안治安을 싫어하고 국가의 멸망을 기뻐하였겠습니까. 자신의 부강함만 믿고 후환을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천하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모든 백성들을 노역시켜 자신을 봉양케 하고 남녀들을 뽑아오고 구슬과 비단을 구해오며, 궁전과 누각을 꾸미며, 요역을 아무 때나 시키고, 전쟁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표면으로는 엄중함을 과시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음험하며 시기함을 행하여 참소하며 간사한 자는 승진하고, 충성하며 정직한 자는 물러났습니다.
위와 아래가 서로를 속이고 백성들은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여 〈양제는〉 필부의 손에 죽게 되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성철聖哲(성상聖上)께서 기회를 틈타시어 백성의 위난을 구제하셨습니다.
지금 궁궐과 누대를 모두 차지하셨고, 진기한 보물들을 모두 거두어들이셨으며, 미녀들을 모두 곁에서 모시게 하고, 사해四海 구주九州 사람들을 모두 신첩臣妾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저 수隋나라가 천하를 잃은 까닭을 거울삼고 우리 당唐나라가 천하를 얻은 까닭을 생각하시어 보배로운 옷을 불태우며 넓은 전각을 헐어버리며 낮은 궁실宮室에 편안히 거처하신다면, 이는 최상의 덕입니다.
만약 이미 세워진 건물들을 헐지 않고 옛것을 그대로 쓰며, 긴요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신다면, 이는 차상次上의 덕입니다.
창업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천명天命만 믿으면 된다고 하여 그 터를 따라 옛것을 늘리고 사치를 마음으로 달게 여겨서 백성들에게 임금의 덕은 보지 못하고 노역을 시킨다는 소문만 듣게 되면 이는 최하가 됩니다.
포악한 자로 포악한 자를 대신하고 어지러운 자와 도를 함께하면 일에 법도가 없어서 후손들이 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신神이 노하면 재해가 생기고, 재해가 생기면 화란禍亂이 일어나고, 화란이 일어남에 몸과 명예를 잘 마치는 자는 적습니다.
이해에 홍수가 나서 곡수穀水와 낙수洛水가 범람하고, 황궁과 관서官署가 열아홉 곳이 파괴되었으며, 표류한 사람의 가옥이 600여 채였다.
위징이 이 일을 진술하였다. “신臣이 들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덕德‧예禮를 기초로 삼아야 하고 성誠‧신信을 보존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성誠‧신信이 확립되면 신하들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으며 덕德‧예禮가 형성되면 먼 지방 사람들이 와서 귀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덕德‧예禮‧성誠‧신信은 국가의 큰 강령이니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예禮로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忠으로 한다.’라고 하였고,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만,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설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같은 말을 하면서도 믿게 하는 것은 믿음이 말에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고, 같은 명령을 내리면서도 실행하게 하는 것은 성의가 명령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말을 해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말에 믿음이 없어서이며,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 것은 명령에 성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말과 성의가 없는 명령을 군자는 하지 않습니다.
왕도王道가 아름답게 밝아진 때로부터 10여 년이 이어져 창고는 갈수록 가득 차고 국토는 갈수록 넓어졌습니다만,
그럼에도 도덕道德은 날마다 넓어지지 않고 인의仁義가 날마다 두터워지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신하를 대하는 마음이 성誠‧신信을 다하지 않아서, 비록 시작을 잘하는 근면이 있지만 마무리를 잘하는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현란한 말주변을 부려서, 마음을 같이하는 이를 붕당朋黨한다고 하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이를 지극히 공정하다고 하고, 강직한 이를 권력을 독점한다고 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이를 비방誹謗한다고 합니다.
붕당이라고 인식되면 비록 충성과 신의가 있더라도 의심하고, 지극히 공정하다고 인식되면 비록 속이더라도 탓하는 일이 없으니,
강직한 이는 권력을 독점한다는 비방을 두려워하여 강직한 말을 다하지 못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이는 비방을 한다는 평가를 염려하여 감히 상대하여 간쟁하지 못합니다.
폐하의 이목耳目을 미혹시키고 대도大道를 막으니 교화敎化를 해치며 성덕聖德을 손상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치적을 이루려고 하신다면 군자에게 일을 맡겨야 하는데, 일의 잘잘못은 혹은 소인에게 물으니,
이는 헐뜯고 칭찬하는 것이 항상 소인에게 달려 있어서 책망하는 것이 항상 군자에게 더해지는 것입니다.
중간 등급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찌 작은 지혜가 없겠습니까마는 생각이 멀리 미치지 못하므로 비록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더라도 오히려 패망을 면치 못하는데, 하물며 마음속에 간사함과 이익을 품고 있으면서 윗사람의 뜻에 따라 영합하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君子로서 인仁하지 못한 자는 있어도 소인小人으로서 인仁한 자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군자는 작은 악이 없을 수 없으나 악이 쌓이지 않아 정도를 해치지 않고,
소인은 때로 작은 선이 있지만 선이 쌓이지 않아 충실함이 부족합니다.
지금 선인善人이라고 말하고 다시 그가 미덥지 않을까 염려한다면 어찌 곧은 나무를 세워놓고 그 그림자가 굽을까 의심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이 믿지 못하면 신하를 부릴 수 없고 신하가 믿지 못하면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믿음의 도리가 큰 것입니다.
옛날에 제 환공齊 桓公이 관중管仲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술을 잔 속에서 썩고 고기가 도마에서 썩게 하려고 하는데 이리하면 패업霸業을 이루는 데 해로움이 없겠소?’
관중管仲이 말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만 패업엔 해가 없을 것입니다.’
환공이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패업에 해가 되오?’
관중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이며, 알아보고도 등용하지 않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이며, 등용하고도 맡기지 않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이며, 맡기고도 믿지 않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이며, 믿고 나서도 또 소인에게 끼어들도록 하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입니다.’
진晉나라 중항목백中行穆伯이 고성鼓城을 공격하여 1년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궤간륜饋間倫이 말하였습니다. ‘고성의 색부嗇夫(향관鄉官)를 제가 잘 아니 사대부士大夫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고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청하였으나,
중항목백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측근들이 말하였습니다. ‘창 한 자루도 부러뜨리지 않고 병졸 한 사람도 상하게 하지 않고서도 고성을 얻을 수 있는데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지 않으십니까.’
중항목백이 말하였습니다. ‘궤간륜의 사람됨이 아첨을 잘하고 어질지 않소. 만약 궤간륜이 함락시키면 내가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소.
그런데 만약 상을 주게 된다면 이는 아첨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되는 것이오. 아첨하는 사람이 뜻을 얻게 되면 이는 진晉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인仁을 버리고 아첨하게 하는 것이오.
중항목백은 열국列國의 대부大夫이며 관중은 패자霸者의 보좌로되 오히려 믿고 맡기는 것을 신중히 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피하였거늘 하물며 위대한 성인이신 폐하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시시비비가 뒤섞이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덕으로 품어주고 믿음으로 대우하고 의리로 격려하고 예절로 절제한
다음에 선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며 형벌을 잘 살피고 포상을 분명히 한다면, 무위無爲의 교화가 어찌 먼 곳에 있겠습니까.
선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등용하지 않으며 악한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제거하지 못하고 벌이 죄가 있는 사람에게 미치지 않으며 포상이 공이 있는 사람에게 가해지지 않는다면 위기와 멸망의 시기가 오는 것도 혹은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太宗은 조서를 친히 써서 내려 훌륭하다고 답하였다. 이에 명덕궁明德宮의 현포원玄圃院을 없애버리고 수재水災를 만난 자들에게 하사하였다.
뒷날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할 때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정관貞觀 이전에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국가를 창업한 것은 방현령房玄齡의 공로요,
정관 이후에 충간忠諫을 바쳐 짐의 과실을 바로잡고 국가를 오래도록 이롭게 한 것은 위징魏徵뿐이다.
비록 옛날의 명신名臣인들 또한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소.”
태종이 직접 패도佩刀을 풀어서 두 사람에게 내려주었다.
태종이 일찍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위징과
제갈량諸葛亮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하오?”
제갈량諸葛亮(《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讚》)
잠문본岑文本이 대답하였다. “제갈량의 재능은 장수와 재상을 겸하여서 위징이 비견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위징은 인의仁義를 시행하며 짐朕을 보필하여 짐을 요순堯舜에 이르게 하려고 하였으니 비록 제갈량이라도 견줄 수가 없소.”
당시에 봉사封事를 올리는 자가 많았는데 어떤 경우는 실정에 맞지 않았다. 태종이 그들을 싫어하고 질책하여 내쫓으려 하였는데,
위징이 말하였다. “옛날에 비방목誹謗木을 세워둔 것은 임금 자신의 과실을 들으려 한 것이니 봉사封事는 비방목의 유풍遺風입니다.
폐하께서 잘잘못을 들으려고 생각하신다면 진술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게 해야 합니다.
말한 것이 옳으면 조정에 이익이 되고 말한 것이 잘못되어도 정사에 손해가 없습니다.”태종이 기뻐하고 모두 위로한 뒤에 보냈다.
정관貞觀 13년(639)에 아사나결사솔阿史那結社率이 반란을 일으키고 운양雲陽에서 돌이 불타고 겨울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니, 위징魏徵이 상소를 올려 지극하게 간언을 하였다.
“신이 궁중에서 폐하를 모신 지 10여 년 동안에 폐하陛下께서는 신臣에게 인의仁義의 도道를 시행하도록 허락해주시고
굳게 지켜서 잃지 않으시고 검약儉約과 소박素朴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꾸지 않으시니 폐하의 덕음德音이 귓가에 남아 있어서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근년 이래로 점점 끝을 잘 맺지 못하게 되었으니 삼가 조목조목 진술하여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합니다.
폐하께서 정관貞觀 초기에는 청정淸靜하고 욕심이 없으셔서 교화가 먼 변방까지 크게 미쳤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만리萬里에 사신을 보내 준마駿馬를 찾아 사오게 하고, 아울러 진기한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옛날에 한 문제漢 文帝는 천리마千里馬를 물리쳐 보냈고, 진 무제晉 武帝는 꿩 머리털로 만든 갖옷을 불태웠습니다.
폐하께서 평상시에 논의論議함이 멀리로는 요순堯舜과 짝하시는데, 지금 하시는 것은 다시 한 문제와 진 무제의 아래에 처하려고 하십니까.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첫 번째 조짐입니다.
자공子貢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다스림의〉 두려움이 마치 썩은 밧줄로 여섯 마리 말을 모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공子貢(《성현상찬聖賢像讚》)
자공이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도리로 인도하지 않으면 나의 원수가 되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정관貞觀 초기에는 백성의 노고를 안타깝게 여기며, 백성을 따뜻이 대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여 가볍게 건축 공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근래 이래로 사치하고 방종해져서 인력을 쓰기를 생각하여 이에 말씀하시기를, ‘백성은 일이 없으면 교만하기 쉽고 노역을 시키면 부리기가 쉽다.’라고 하십니다.
예로부터 백성의 안락과 즐거움으로 인해서 나라가 기울고 패망에 이른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어찌 백성들이 교만해질 것을 미리 두려워하여 일부러 노역을 시키려 하십니까.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두 번째 조짐입니다.
폐하께서 정관 초기에는 자신을 수고롭게 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욕심을 마음대로 부려 백성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백성을 걱정한다는 말은 입에서 끊이지 않으나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 실로 마음에 절실합니다.
건축 공사의 결과를 우려하지 않고 번번이 말하기를 ‘이것을 하지 않으면, 내 몸을 편히 하지 못한다.’라고 하시니, 인정人情을 미루어 볼 적에 누가 감히 다시 간쟁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세 번째 조짐입니다.
정관貞觀 초기에는 군자를 친애하며 소인을 멀리하셨는데, 근래에는 소인을 가볍게 가까이하고, 군자를 예의상으로만 소중하게 여깁니다.
군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공손하되 멀리하고, 소인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친하면서 가까이합니다.
가까이하면 그 잘못을 알지 못하고, 멀리하면 그 옳음을 알지 못하니,
옳음을 알지 못하면 이간시키지 않아도 멀어지고, 잘못을 알지 못하면 때때로 친밀해집니다.
소인을 친밀히 하고 군자를 멀리하면서 치세를 이루려고 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네 번째 조짐입니다.
정관 초기에는 이상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무익無益한 일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얻기 어려운 재화가 섞여서 모두 올라오고 노리개를 만드는 것이 쉴 때가 없습니다.
임금이 사치를 하면서 신하들이 소박하기를 바라고 부역을 확장하면서 농업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다섯 번째 조짐입니다.
정관貞觀 초기에는 선비를 구하기를 갈증이 나는 것처럼 하여, 현인이 천거한 이는 바로 믿어 임용하였고, 그 장점을 취하면서도 항상 〈그 장점을〉 다 받아들이지 못할까 염려하셨습니다.
근년 이래로 마음에 좋고 나쁨에 따라서, 많은 현인들의 천거로 임용했다가 한 사람의 비방으로 내쫓기도 하며,
비록 여러 해 동안 맡겨 믿고 있더라도 혹은 하루아침에 의심하여 배척하기도 하셨습니다.
행실은 본래 행하던 것이 있고 일은 이루어진 자취가 있으니, 한 사람의 헐뜯음은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해 동안 쌓은 행실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그 근원을 살피지 않고 좋고 나쁨을 판단하십니다.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마음대로 행동하게 하고 도를 지키는 자들을 점점 소원하게 하시니,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여섯 번째 조짐입니다.
정관 초기에는 높은 곳에서 편안히 계시면서 사냥하고 그물질하고 주살질하는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년 후에는 그 뜻을 굳건히 하지 못하여 매나 개의 공물을 바치는 대상이 멀리 사방 오랑캐에게까지 미쳤고, 사냥을 하러 새벽에 나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와서 말을 달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시니,
헤아리지 못한 변고가 일어나면 어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일곱 번째 조짐입니다.
정관貞觀 초기에는 신하를 대우하시는 데 예禮가 있었으며 신하들의 마음이 황제께 통하였습니다.
지금 지방관이 일을 진술할 때에 용안을 뵐 수 없고 간혹 단점으로 인하여 세세한 잘못까지 문책하시니,
비록 충성스러운 생각이 있다고 하여도 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여덟 번째 조짐입니다.
정관 초기에는 부지런히 도리로 다스려서 항상 부족한 듯이 하셨습니다.
근년에는 공적의 큰 것을 믿고 성지聖智의 밝음을 자부하시어 오만함을 키우고 욕망을 방종하게 부려서 일이 없는데 병사를 일으키고 먼 변방의 나라에 죄를 물으시니,
친압한 자는 폐하의 뜻에 아부하여 기꺼이 간언하려 하지 않고, 소원한 자는 위엄이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쌓여 그치지 않으면 손상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아홉 번째 조짐입니다.
정관貞觀 초기에 해마다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들어 경기京畿 안의 호구戶口가 모두 관외關外(관동關東)로 옮겨갈 적에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고서 오고 간 것이 수년數年이었지만,
끝내 한 호戶도 도망하여 떠난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폐하께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길러주고 어루만져주고 편안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죽음에 이르더라도 두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년에는 요역徭役에 피로한데 그중에서도 관중의 사람들의 노고와 피폐함이 더욱 심합니다.
각종 기술자들은 당번을 쉬는 날에도 도리어 보내주지 않습니다. 정규 군병들은 당번에 들었을 때 다시 별도로 부려지고, 〈화시和市로 인해〉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이 가게에 계속 이어지니, 물건을 운송하는 장정들이 길에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만약 한 톨 곡식도 거두지 못하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예전처럼 편안하지 못할까 우려됩니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열 번째 조짐입니다.
‘화복은 문이 없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고, ‘사람에게 죄가 없으면, 요사스러움이 망령되게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가뭄의 재앙은 멀리 군국郡國까지 피해를 주었고 흉악범들의 재앙이 제도帝都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것이니, 폐하께서 두려워하며 근심하고 근면해야 할 때입니다.
천 년에 한 번 있는 좋은 기회는 다시 얻기 어렵거늘 명철하신 군주께서 행할 수 있는데도 행하지 않으시니, 신이 가슴이 답답하여 길게 탄식하는 이유입니다.”
상소문이 올라가자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짐이 지금 과오를 들었으니, 원컨대 과오를 고쳐서 선한 도를 잘 끝맺도록 할 것이요, 이 말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어떤 얼굴을 하고 공을 만나겠소.
올린 이 상소를 병풍으로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고, 겸하여 사관에게 기록하여 붙이게 하여 만세토록 군신君臣의 의리를 알게 하겠소.”
이어서 위징魏徵에게 황금 열 근과 말 두 필을 하사하였다.
고창高昌이 평정되고 태종太宗이 양의전兩儀殿에서 연회를 할 때 탄식하여 말하였다. “고창국高昌國이 만약 덕을 잃지 않았다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소.
그러나 짐 또한 마땅히 스스로 경계하여 소인의 말을 듣고 군자를 의논하지 않아 편안함을 얻기를 바라겠소.”
위징魏徵이 말하였다. “옛날에 제 환공齊 桓公이 관중管仲‧포숙아鮑叔牙‧영척甯戚과 함께 네 사람이 술을 마실 적에 환공이 포숙아에게 말하였습니다. ‘어찌 일어나 과인을 위해 오래 살라고 빌지 않는가?’
포숙아가 술잔을 들고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망명하여 거莒 땅에 살던 때를 잊지 마시어, 관중으로 하여금 노魯나라에 갇혀 묶여 있던 때를 잊지 않게 하고, 영척으로 하여금 수레 밑에서 소에게 여물을 먹이던 때를 잊지 않게 하소서.’
환공은 자리를 피하고 사례하여 말하였습니다. ‘과인과 두 대부가 부자夫子(포숙아)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사직이 위태롭지 않을 것이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이 평민이었을 때의 일을 감히 잊지 않을 것이니, 공은 포숙아의 사람됨을 잊어서는 안 되오.”
태종太宗이 사신을 보내어 서역西域에 이르러 섭호葉護를 가한可汗에 책립하게 했는데 채 돌아오기도 전에 또다시 사신을 보내 황금과 비단을 가져가서 각국에서 말을 사오게 하자,
위징魏徵이 간언하였다. “지금 가한을 책립하는 일이 확정되기도 전에 바로 서역 여러 나라에 나아가 말을 사오도록 하시니, 저들은 반드시 서역에 사신을 보낸 목적이 말을 사려는 데 있지, 가한을 책립하는 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한이 책립된다고 하더라도 분명 은혜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여러 이민족異民族 나라들이 이 소문을 듣게 되면 중국中國이 의리를 박하게 여기고 이익을 중시한다고 할 것입니다. 말을 얻는다고 기필할 수도 없고 먼저 의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위 문제魏 文帝(조비曹丕)가 서역西域의 대주大珠를 사오려 하자 소칙蘇則이 말하기를 ‘은혜가 천하에 미치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겠지만 일부러 구해서 얻게 되면 귀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폐하께서 소칙의 바른말을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태종이 마침내 멈추게 하였다.
이후에 우복야右僕射가 공석이 되어 위징魏徵을 임용하려고 하자 위징이 사양하니 임명하지 못하였다.
황태자皇太子 이승건李承乾과 위왕魏王 이태李泰의 관계가 악화되자 태종이 말하기를
“당금에 충성스럽고 정직하면서 귀중貴重한 사람으로 위징보다 뛰어난 이는 없소. 나는 그를 황태자皇太子의 스승으로 보내 천하의 기대를 하나로 모아서 태자의 보좌를 공고하게 할 것이오.”라고 하고,
곧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임명하였다. 위징이 병으로 사양하니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한漢나라 태자太子는 상산사호商山四皓의 도움을 받았으니, 내가 공을 의지하는 것은 그러한 뜻이오. 공이 비록 병석에 누워 있지만 태자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오.”
정관貞觀 17년(643)에 위징魏徵의 병이 심해졌다.
위징의 집에는 원래 정침正寢이 없었는데, 태종太宗이 명령하여 작은 전각을 짓는 것을 멈추게 하고 그 재목으로 위징의 정침을 지어주었는데 5일 만에 공사를 끝냈다.
아울러 흰 요와 베 이불을 내려주어서 그가 바라는 것을 따라주었다.
중낭장中郎將에게 위징의 집에 숙직하게 하여 위징의 동정을 즉시 보고하게 하고 약과 반찬을 내려보낸 것이 셀 수 없이 많았으니, 중사中使(심부름하는 관원)가 도로에 이어졌다.
태종이 친히 문병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대화를 종일 하고서야 돌아갔다.
후에 다시 태자와 함께 위징의 집에 이르렀는데 위징이 조복을 몸에 덮고 그 위에 띠를 얹어놓았다.
태종이 슬픔에 젖어 번민하여 그를 어루만지고 눈물을 흘리며 원하는 것을 묻자 위징이 대답하였다.
“과부가 베 짜는 씨실이 모자라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가 망할까를 걱정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태종太宗이 장차 형산공주衡山公主를 위징魏徵의 아들 위숙옥魏叔玉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이때 형산공주가 또한 따라와 있었는데,
태종이 말하였다. “공은 억지로라도 신부를 살펴보시오.” 위징은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날 저녁에 태종의 꿈에 위징이 평소와 같았는데 아침에 이르러 죽었다.
태종이 문상하여 곡을 하고 그를 위해 애통해하며 5일 동안 조회를 쉬었다. 태자太子는 서화당西華堂에서 곡을 하였다.
조서를 내려 내외內外 백관百官 및 조집사朝集使에 모두 문상하게 하고, 위징에게 사공司空 상주도독相州都督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우보羽葆를 든 의장대,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 반검班劍을 든 무사로 40인을 보내고 소릉昭陵에 배장陪葬하게 하였다.
막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위징의 처 배씨裴氏가 사양하며 말하였다. “위징은 평소에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였는데 지금 1품관品官의 장례葬禮를 주시고 의장의 물건이 크고 광대하니 위징의 뜻이 아닙니다.”
태종의 허락을 받아 이에 소거素車를 사용하고 흰 천으로 수레의 유막帷幕을 만들고 도거塗車‧추령芻靈을 갖추지 않았다.
태종이 원서루苑西樓에 올라가 바라보고 곡하며 슬픔을 지극히 하고, 진왕晉王(이치李治, 당 고종唐 高宗)이 조서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다.
태종이 〈위징을 위하여〉 비문을 지어 마침내 글씨까지 썼고, 그의 집에 봉호封戶 900호戶를 내려주었다.
태종太宗은 그 후에 조회에 임하여 탄식하여 말하였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옛일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잘잘못을 알 수 있소.
짐은 일찍이 이 세 종류의 거울을 보유해서 안으로 나의 과실을 예방하였는데, 지금 위징魏徵이 세상을 떠나 거울 하나를 잃었소.
짐이 근래에 사람을 시켜 그의 집에 가게 하여 글 한 장을 얻었소.
처음 반쯤 쓴 초고草稿인데 그중에 알아볼 만한 것에 이르기를, ‘천하天下의 일은 선함이 있고 악함이 있어서 선한 자를 임용하면 나라가 편안하고 악한 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피폐해진다.
공경公卿들 중에도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함이 있어서 미워하는 자는 오직 그의 악만을 보고 사랑하는 자는 다만 그의 선만을 본다.
사랑과 미움의 사이에는 자세하고 신중히 해야 한다.
만약 사랑을 하되 그의 악을 알며, 미워하되 그의 선을 알아서, 간사한 자를 물리치는 데 의심하지 않으며 어진 자를 임용하는 데 시기하지 않으면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하였으니 그 대략이 이와 같소.
짐朕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런 과실을 면치 못할까 두렵소. 공경公卿과 시신侍臣들은 홀笏에 이 글을 써서 이러한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간언해야 할 것이오.”
위징魏徵의 겉모습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는데 담대한 뜻이 있어 항상 임금을 마주하여 간언을 할 때마다 비록 임금의 심한 노여움을 만나더라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아서 천자도 노여움을 거두었다.
의론하는 이들은 맹분孟賁‧하육夏育이라도 위징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일찍이 성묘를 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지난번에 들으니 폐하께서 관남關南으로 행차하려고 하여 이미 준비를 해놓고 그친 것은 무엇입니까?”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경이 두려워서 마침내 정지하였소.”초기에는 전란이 끝난 뒤라 전장典章이 흩어지고 없어졌다.
위징이 상주하여 여러 선비들을 추천하여 비서秘書를 교정하고 수집하여 국가國家의 도적圖籍이 찬란하게 완비되었다.
일찍이 《소대례小戴禮》를 모아 편집한 것이 혼란했기 때문에 다시 《유례類禮》 20편篇을 지어 몇 년 만에 완성하였다.
태종이 이 책을 찬미하고 내부內府에 초록하여 보존하게 하였다.
태종은 본래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이미 치세가 되어서도 사방 오랑캐를 경략할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징이 연회에서 태종을 모실 적에 〈파진무덕무破陣武德舞〉를 연주하면 고개를 숙여 돌아보지 않았고 〈경선악慶善樂〉이 연주되면 자세하게 감상하여 싫어함이 없었으니 대체로 풍간諷諫을 절실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위징魏徵이 죽자 태종太宗이 위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고 능연각凌煙閣에 올라가 화상畫像을 보고 시를 지어 위징을 애도하니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이 위징을 질투하고 온갖 방법으로 헐뜯어 단점을 잡았다.
위징이 일찍이 두정륜杜正倫‧후군집侯君集의 재주가 재상宰相을 맡길 만하다고 추천하였는데 두정륜이 죄로 쫓겨나고 후군집은 역모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소인들이 마침내 위징을 가리켜 아당阿黨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위징이 전후로 간쟁한 말을 기록하여 사관史官 저수량褚遂良에게 보인 적이 있다.”고 하였다.
태종이 더욱 기뻐하지 않다가 마침내 위숙옥魏叔玉과의 혼인을 정지하고 자신이 비문을 지어 세운 비석을 넘어뜨리니, 이에 위징의 집안이 쇠락하게 되었다.
요동遼東의 전쟁에 고구려高句麗‧말갈靺鞨이 당唐나라 군대를 침범하니 이적李勣 등이 힘써 싸워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군대가 돌아올 적에 태종太宗이 처량하게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있었다면 내가 이런 원정을 했겠는가.” 하고
즉시 그 집안 사람을 불러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여 그 처자들에게 포상하여 위로하고 소뢰少牢를 써서 그의 묘에 제사하고 다시 비석을 세우고 은혜와 예우를 더하였다.
위징魏徵의 네 아들은 위숙옥魏叔玉‧위숙완魏叔琬‧위숙린魏叔璘‧위숙유魏叔瑜이다.
위숙옥은 작위를 세습하여 광록소경光祿少卿이 되었다. 신룡神龍(705~707) 초기에 그의 아들 위응魏膺으로 봉작封爵을 잇게 하였다.
위숙린은 예부시낭禮部侍郎이 되었는데, 무후武后 시기에 혹리酷吏에게 살해당하였다.
위숙유는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었으며,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를 잘 써서 그의 서법書法이 그의 아들 위화魏華와 외손자 설직薛稷에게 전수되었다.
세상에 글씨를 잘 쓴다고 일컬어지는 이는 이전에는 우세남虞世南‧저수량褚遂良이 있었고, 뒤에는 설직薛稷‧위화魏華가 있다.
위화는 검교태자좌서자檢校太子左庶子 무양현남武陽縣男이 되었다.
개원開元(713~741) 시기에 침당寢堂에 화재가 나서 자손들이 3일 동안 곡하자 조서를 내려 백관들을 조문을 가게 하였다.
위징魏徵의 5세손은 위모魏謩이다. 위모는 자字가 신지申之이다.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동주자사同州刺史 양여사楊汝士가 벽소辟召하여 장춘궁순관長春宮巡官이 되었다.
문종文宗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고 위징의 어짊을 생각하여 조서를 내려 그 후손을 찾았는데 양여사가 추천하여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위모는 용모가 건장하고 아름다웠으므로 문종이 그를 특별하게 여겼다.
옹관경략사邕管經略使 동창령董昌齡이 참군參軍 형방후衡方厚를 모함해 살해하여 서주사호漵州司戶로 강등되었으나 조금 뒤에 협주자사峽州刺史로 자리를 옮겼다.
위모가 간언하였다. “왕자王者는 죄 있는 자를 사면하지만 고의로 지은 죄만은 사면이 없습니다.
근래에 동창령이 죄 없는 자를 마음대로 죽였는데 사건의 자취가 드러나서 형방후의 가족들이 원한을 머금고 만 리를 달려가서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를 옥사獄事에 궁문窮問하여 죄가 있었으나 특별히 용서를 받으니, 중외中外에서 합법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또 자사刺史를 제수하여 다시 백성을 다스리게 하니 국법을 어지럽히고 지극한 치세를 어그러뜨려서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조서를 내려서 동창령을 홍주별가洪州別駕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이효본李孝本은 종실宗室의 아들인데 이훈李訓의 일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두 딸이 궁중에 하인이 되어 들어왔다.
위모魏謩가 진언하였다. “폐하陛下께서 즉위하셨을 적에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으시어 지금까지 10년이 되도록 미녀를 선발한 적이 없었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조금씩 성기聲伎(가기歌妓)에 뜻을 두셔서 교방教坊에서 선발한 것이 수십 백 명에 그치지 않고, 장택莊宅(별장과 주택)을 사들인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립니다.
지금 또 이효본의 딸을 취하여 후궁後宮에 들이고자 하시니, 이는 종실宗室 동성同姓을 양육하지 않고 총애寵愛에 결함이 되어 치도治道의 근본을 손상하고 오점을 남기는 혐의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추위를 막는 것은 두터운 갖옷만 한 것이 없고, 비방을 그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수련만 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천년의 성덕盛德을 숭상하시고 한때의 기호嗜好를 버리십시오.”
문종文宗은 바로 이효본의 딸을 내보내고 조서를 내렸다. “위모의 조상이 정관貞觀 시대에 일을 지적하고 직언하여 회피한 것이 없었으니 국사를 살펴볼 때마다 짐朕은 아름답게 여겼다.
위모도 습유拾遺가 되어 여러 차례 충언을 올린 적이 있다. 궁내에서 청소하는 사람으로 충원한 것이니 성기聲妓라고 할 것이 아니며 종실宗室의 어린 여자를 불쌍히 여긴 것이니 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의혹을 집집마다 알려줄 수 없거늘 위모의 말이 심히 절실하니, 그가 짐의 과실을 애석해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지 아니한가.
위모가 비록 벼슬에 있는 기간이 짧았지만 짐이 어찌 한 개의 관직을 아끼랴. 정직한 신하의 기개를 선양宣揚할 것이니 위모를 우보궐右補闕로 삼으라.”
이보다 앞서 문종文宗이 재상宰相에게 말하였다. “태종太宗께서 위징魏徵을 얻어 결함을 보충하였고, 짐朕은 지금 위모魏謩를 얻어 그가 또 극력하게 간언을 하니,
짐은 감히 정관貞觀의 때를 바라지는 못하지만 과실이 없는 경지에 처하기를 바라고 있소.”
교방教坊에 새로운 음악 소리를 잘 내는 악공이 있자 조서를 내려 양주사마揚州司馬로 제수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사마司馬는 품계가 높아서 낭관郎官과 자사刺史가 번갈아 맡는 자리이니, 미천한 악공을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문종이 악공을 옹호하였다.
재상宰相이 간관諫官들에게 타일러 다시 말하지 말게 하였는데, 위모가 홀로 굳이 불가함을 간언하여 악공이 윤주사마潤州司馬로 강등되었다.
형남감군荊南監軍 여령침呂令琛의 방종한 겸졸傔卒(위사衛士)이 강릉령江陵令을 모욕하였으나 관찰사觀察使 위장韋長이 회피하여 들추어내지 않고, 언장言狀(진술서陳述書)을 내추밀사內樞密使에게 보냈다.
위모가 탄핵하기를 “위장은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감군監軍이 관원을 침범한 것을 알고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근신近臣에게 보고하여 법도法度를 어지럽혔으니 그의 벌을 밝히십시오.”라고 하였으나, 황제가 회답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는데 문종文宗이 물었다. “경卿의 집에 조서詔書가 꽤 보존된 것이 있소?”
위모魏謩가 대답하였다. “오직 옛날 홀笏(수판手板)만 남아 있습니다.”조서를 내려 그것을 올려 보내게 하였다.
정담鄭覃이 말하였다.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있지 홀에 있지 않습니다.”
문종이 말하였다. “정담은 짐朕의 뜻을 알지 못하니, 이 홀은 지금의 감당甘棠이오.”
문종이 이어서 위모에게 조칙을 내려 말하였다. “일에 마땅하지 않음이 있으면 논하여 아뢰는 것을 꺼리지 마시오.”
위모가 대답하였다. “신이 이전에 간신諫臣이었기 때문에 진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황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고 있으니 감히 직분을 넘지 못합니다.”
문종이 말하였다. “양성兩省(중서성中書省과 문하성門下省)의 소속 관원은 모두 조정의 일을 의론할 수 있으니 그대는 사양하지 마시오.”
문종이 《기거주起居注(황제皇帝의 언행록言行錄)》를 보겠다고 요구하자, 위모가 상주하였다. “옛날에는 좌사左史‧우사右史를 두어 잘잘못을 기록하여 감계鑑戒로 삼았습니다.
폐하陛下께서 행하신 선은 기록하지 않을까 우려할 것이 없고, 선하지 못한 행동은 천하 사람들이 또한 그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문종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내가 이미 일찍이 그것을 본 적이 있소.”
위모가 말하였다. “지난번에 취하여 보신 일은 사관史官이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한 번 보시면 후대에 기록하는 것에 반드시 꺼려서 사실대로 쓰지 않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선악善惡이 진실하지 않으면 역사가 될 수 없으니, 또 후대에 어찌 믿겠습니까.”마침내 《기거주》를 보려던 계획을 중지하였다.
중위中尉 구사량仇士良이 요망한 백성 하란진흥賀蘭進興 및 그 당여黨與를 붙잡고 군중軍中에서 다스려 반란의 증거를 갖추어냈다.
문종文宗이 친림하여 심문하고 조서를 내려 죄수를 참수하여 조리돌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고원유高元裕가 건의하였다. “옥송獄訟은 마땅히 여러 사람과 함께 심리해야 합니다.
형부刑部와 대리大理는 법관法官인데 대옥大獄을 판결하는 데에 참여하여 알지 못하면 율령律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담당 관청에 귀속시키기를 청합니다.”황제는 회답하지 않았다.
위모가 상서하였다. “일이 군대軍隊와 관계가 있으면 바로 군중軍中에서 추문推問하시고, 평민의 일이라면 부현府縣에 맡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옥송獄訟이 담당 관청에 있지 않으니, 형법刑法의 경중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문종이 판결을 정지하고 조서를 내려 신책군神策軍은 관부官府의 병기를 가지고 장내仗內(보위부대保衛部隊 안)에 머물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사대御史臺에 부쳤다.
어사대에서는 구사량을 두려워하고 감히 다르게 하지 않아서 마침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위모는 간의대부諫議大夫에 발탁되어 기거사인起居舍人 홍문관직학사弘文館直學士를 겸하게 하자 굳이 사양하였으나 황제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마침내 임명되었다.
처음 위모魏謩를 등용할 적에 이각李珏‧양사복楊嗣復이 실제로 그를 추천하여 끌어주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자 위모는 두 사람의 당인黨人으로 연좌되어 외직으로 나가 분주자사汾州刺史가 되었고, 얼마 뒤에 신주장사信州長史로 강등되었다.
선종宣宗이 이어 즉위하자 영주자사郢州刺史와 상주자사商州刺史로 옮겼다. 조정으로 불러 급사중給事中에 제수하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승진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 두중립杜中立의 뇌물죄를 적발하니 황제의 외척들이 기세를 움츠렸다.
얼마 뒤에 호부시랑戶部侍郎의 일을 겸하였는데 위모가 상주하였다. “어사중승은 기강紀綱을 맡은 곳이므로 전곡錢穀을 겸하여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오로지 호부戶部만 다스리도록 해주십시오.”
조서를 내려 옳다고 하였다. 조금 뒤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위모가 건의建議하였다. “지금 천하가 조금 다스려졌으나 오직 동궁東宮을 아직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일찍 바른 사람으로 스승을 삼아 인도하지 않으면 태자의 중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또 눈물을 흘리자 선종宣宗이 감동하였다. 경종敬宗 이후로부터 태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 싫어하였기 때문에 공경公卿들이 감히 이 일을 앞장서 말하는 이가 없었다.
당시 선종의 나이가 많고 태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적에 위모가 정사를 보좌하면서 그 단서를 명백하게 발언하니 조정의 의론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마침 첨비국詹毗國이 코끼리를 바쳤는데 위모가 말하였다. “본토의 습성이 아니라 기를 수 없으니 받은 코끼리를 돌려주기를 청합니다.”조서를 내려 옳다고 하였다.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이업李業이 투항한 오랑캐를 죽이자 변경 지역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업이 조정에 의지할 자를 믿고 있어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위모가 상주하여 활주滑州로 좌천되었다.
위모는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옮기자, 대리경大理卿 마서馬曙는 물소 가죽 갑옷 수십 벌이 있었는데 두려워하여 갑옷을 땅에 묻었다.
마서의 가노家奴 왕경王慶이 사사로운 원한으로 마서가 갑옷을 숨기고 역모를 꾀하였다고 고발하였는데 그것을 조사하였으나 다른 정황이 없어서 마서를 영외嶺外로 추방하고 왕경은 죄를 면하였다.
의논하는 이들은 가노가 주인을 고발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법에서 들어주지 않았다. 위모는 법률을 인용하여 굳게 쟁변하여 마침내 왕경을 죽음으로 논죄하였다.
누차 자리를 옮겨 문하시랑門下侍郎이 되고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겸하였다.
대중大中 10년(856)에 위모魏謩가 평장사平章事로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를 겸직하였다.
병으로 인하여 표를 올려 교체할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으로 불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제수하고 병이 오래되자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태자소보太子少保를 제수하였다.
죽을 때 나이가 66세였다. 사도司徒를 추증하였다.
위모가 재상宰相이 되어 천자 앞에서 일을 의논할 적에 다른 재상들은 혹은 완곡하게 권유하여 풍간諷諫하였으나 위모만은 정직하고 절실하게 하여 회피하고 두려워함이 없었다.
선종宣宗이 일찍이 말하였다. “위모는 명신의 후손이기 때문에 조상의 풍모가 있어서 짐의 마음속에 그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마침내 바르고 강함 때문에 영호도令狐綯에게 꺼림을 받아 참소로 파직되었다.
찬贊한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위징魏徵의 충성과 태종太宗의 현명함으로도 위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기와 참언이 바로 행해졌다.
처음에 위징의 간언이 모두 수십여만 자였고,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에 대해서는 일찍이 태종을 위해 반복하여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간사한 자들이 충신을 어지럽히는 것을 오랫동안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깨끗한 자는 더럽혀지기 쉽고, 강직한 자는 보전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예로부터 이를 탄식하는 말이다.
당唐 유방柳芳이 말하기를 ‘위징이 죽자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한탄하여, 삼대三代의 유직遺直(강직한 유풍遺風이 있는 이)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진실하구나! 유모의 논의는 바르고 곧아 조상의 풍격이 있었으니, 《시경詩經》에서 말한 ‘이 때문에 그와 같이 한다.’라고 한 것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