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上之不信於下는 必以爲下無可信矣어니와 若必下無可信이면 則上亦有可疑矣라
禮
에 曰 上人
이 疑
하면 則百姓
이 惑
하고 下難知
하면 則君長勞
注+ 禮曰……則君長勞:禮緇衣篇之辭.라하니 上下相疑
하면 則不可以言至理矣
라
當今群臣之內
에 遠在一方
하여 流言三至
하면 而不投杼者
注+ 而不投杼者:秦甘茂告秦王曰 “魯人有與曾參同姓名者殺人, 人告其母, 母織自若, 三人告之, 其母投杼下機, 踰墻而走. 臣之賢不及曾參, 王之信臣, 不如其母, 疑臣者非特三人, 臣恐大王之投杼也.”를 臣竊思度
注+ 臣竊思度:度, 待洛切.하니 未見其人
이라
夫以四海之廣과 士庶之衆으로 豈無一二可信之人哉아
蓋信之則無不可하고 疑之則無可信者니 豈獨臣之過乎아
夫以一介庸夫結爲交友라도 以身相許면 死且不渝어늘
若君爲堯舜
하고 臣爲稷契
注+ 臣爲稷契:契, 音泄. 稷, 農官. 舜命棄曰 “汝后稷, 播時百穀.” 命契曰 “汝作司徒, 敬敷五敎.”하면 豈有遇小事則變志
하고 見小利則易心哉
아
此雖下之立忠이 未有明著나 亦由上懷不信하여 待之過薄之所致也니
以陛下之聖明과 以當今之功業으로 誠能博求時俊하여 上下同心하시면
則三皇
을 可追而四
注+ 三皇:三皇, 史記謂庖犧氏女媧氏神農氏也. 孔安國書序以伏羲神農黃帝爲三皇. 一說謂天皇地皇人皇. 未詳孰是.하고 五帝
를 可俯而六矣
리니 夏殷周漢
을 夫何足數
注+ 夫何足數:數, 上聲.리잇고하니
注
【集論】范氏祖禹曰 昔
捨大臣而與小臣謀
라 故失國出奔
하다
且大臣之所任者大하고 小臣之所任者小어늘 而以小謀大하고 以遠謀近하면
注
唐氏仲友曰 此魏徵論聽納任用之要하여 人君必先知此然後에 能任君子去小人하고 納忠諫察奸言하다
以太宗之聰明으로 惟其見道之淺하여 至於聽言任用之間에 數領鄭公之諫이나
而非諫之左挈右提면 則移於小人하여 惑於奸言多矣라
注
至此䟽復以君臣同心一體를 詳譬而曲陳之하여 甚若致戒於庸君常主之前하니 其愛君亦云至矣라
且終之曰 三皇可追而四하고 五帝可俯而六하리니 夏殷周漢을 夫何足數리오하니
嘗觀
所陳
컨대 都兪吁咈於一堂之上
할새 始而克艱之戒
하고 終之明良之歌
호대
而其要領은 則在欽哉之一言이니 君臣同心이 其在是也라
임금이 신하를 믿지 않는 것은 반드시 신하를 믿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만일 반드시 신하가 믿을 수 없다면 임금 또한 의심스러움이 있게 됩니다.
《
예기禮記》 〈
치의緇衣〉에 말하기를 ‘윗사람이 의심하면 백성이 의혹하고 아랫사람이 일을 알기 어려우면 군주는 오래 고생스럽다.’라고 하였으니
注+《예기禮記》 〈치의緇衣〉편의 말이다., 위아래가 서로 의심한다면 지극한 다스림을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 중에 멀리 한 지방에 있으면서 유언비어가 세 번이나 이르면 베 짜던 북을 던져버리고서 도주하지 않을 자를
注+진秦나라 감무甘茂가 진왕秦王에게 고하기를 “노魯나라 사람 중에 증삼曾參과 성명이 같은 자가 사람을 죽이자 어떤 사람이 증삼의 어머니에게 고하였는데 어머니가 베 짜기를 태연자약하게 하다가 세 사람이 고해주자 증삼의 어머니가 북을 던지고 베틀에서 내려와 담을 넘어서 달려갔습니다. 신의 어짊은 증삼에 미치지 못하고 왕께서 신을 믿음도 증삼의 어머니만 못한 데다 신을 의심하는 이들은 세 사람일 뿐만이 아니니, 신은 대왕께서 북을 던져버릴 지경이 될까 우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신이 가만히 헤아려 생각해보니
注+도度(헤아리다)은 대待와 낙洛의 반절이다. 그런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넓은 천하와 수많은 백성 중에 어찌 믿을 만한 한두 사람이 없겠습니까?
믿으면 옳지 않을 것이 없고 의심하면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니, 어찌 신하의 잘못이기만 하겠습니까?
무릇 한 사람 평범한 사내가 교유를 맺더라도 몸을 함께하기로 서로 허락하였으면 죽도록 변하지 않거늘,
하물며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하여 물고기와 물처럼 기탁한 경우이겠습니까?
만일 임금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고 신하가
후직后稷이나
설契인 경우라면
注+설契은 음音이 설泄이다. 직稷은 농관農官이다. 순舜이 기棄에게 명하기를 “너는 후직后稷이니 제때에 백곡을 파종하라.”라고 하고, 설에게 명령하기를 “너는 사도司徒가 되어 공경히 다섯 가지 가르침을 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어찌 작은 일을 만나서 뜻을 달리하고 작은 이익을 보고서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이는 비록 신하가 충성을 함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또한 임금이 못 믿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대함이 지나치게 박하게 한 소치이니,
어찌 임금이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겠습니까?
폐하의 성명聖明과 지금의 공적으로 진실로 이 시대의 인재를 널리 구하여 상하가 마음을 같게 하신다면
곧
삼황三皇을 추가하여
사황四皇으로 할 수 있고
注+삼황三皇은 《사기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 말하기를 포희씨庖犧氏‧여와씨女媧氏‧신농씨神農氏이다. 공안국孔安國의 〈서서書序〉에는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로 삼황三皇을 삼았다. 일설에는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이라고 한다.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하지 않다. 오제五帝를 머리 숙여
육제六帝로 할 수 있을 것이니,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한漢나라를 어찌 따지겠습니까?”
注+수數(계산하다)는 상성上聲이다.
태종太宗이 위징魏徵의 상소를 매우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注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옛날에 위 헌공衛 獻公이 대신大臣을 버려두고 소신小臣들과 도모하였으므로 나라를 잃고 망명하게 되었다.
또 대신의 임무는 크고 소신의 임무는 작은 것이거늘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도모하거나 원대한 것으로 비근한 것을 도모하면,
이는 임금이 정사를 치우치게 듣는 폐단이 되니 일을 실패하지 않는 자가 적다.”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이는 위징魏徵이, 임금이 임용의 요점을 들어 받아들여서 반드시 먼저 이것을 안 후에 군자에게 맡기며 소인을 버리고 충성스런 간언을 받아들이며 간사한 말을 살펴야 한다고 논한 것이다.
태종太宗의 총명함으로 오직 도를 살펴봄이 천근하여 말을 듣고 임용하는 사이에 있어서 정공鄭公(위징)의 간언을 자주 채용하였으나
왼쪽에서 끌고 오른쪽에서 끌어 간언하지 않으면 소인에게 변화되어 간사한 말에 현혹됨이 많았다.
이것이 위징이 정관지치貞觀之治에 최고로 공이 있는 점이니,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注
내가 살펴보니, 태종太宗이 지금에 천하를 다스린 지 오래되었다.
위징魏徵이 정성을 다하여 간언을 올려서, 마지막까지 신중하기를 처음과 같이 해야 한다는 말을 간곡하게 하고,
이 상소에 이르러 다시 임금과 신하가 같은 마음과 한 몸이라는 것을 자세히 비유하고 간곡히 진술하여 심지어 용렬한 임금과 평범한 임금의 앞에서 경계를 하듯이 하였으니, 위징이 임금을 사랑함이 또한 지극하다 하겠다.
또 끝에 말하기를 “삼황三皇을 추가하여 사황四皇으로 할 수 있고 오제五帝를 머리 숙여 육제六帝로 할 수 있을 것이니, 하夏나라‧은殷나라‧주周나라‧한漢나라를 어찌 따지겠습니까.” 라고 하니,
삼황三皇의 도는 오래되고 오제五帝의 덕도 더할 것이 없다.
일찍이 전모典謨에서 진술한 것을 살펴보았는데 함께 대청 위에서 찬성 불찬성의 토론[도유우불都兪吁咈]을 할 적에 처음에는 어려움을 이기는 것을 경계하였고 명량明良의 노래로 끝마쳤는데,
그 중요한 부분은 ‘공경하라.’라는 한마디 말에 있으니,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이것에 있다.
위징이 “삼황三皇을 추가하여 사황四皇으로 할 수 있고 오제五帝를 머리 숙여 육제六帝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한 말은 또한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권한다는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