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初
에 太宗謂蕭瑀
注+字時文, 後梁明帝子也. 高祖入關招之, 授光禄大夫. 武德初, 遷内史令. 貞觀初, 拜太子少師, 遷僕射, 又遷御史大夫, 參預朝政. 後拜太子少傅. 卒謚曰恭. 帝以性忌, 改謚貞褊.曰
朕少好弓矢
注+少‧好, 竝去聲.하여 自謂能盡其妙
러니
木心不正
하여 則脈理皆邪
注+皆, 一作多.하며 弓雖剛勁而遣箭不直
이라 非良弓也
라하니
朕이 以弧矢定四方하니 用弓多矣로대 而猶不得其理어늘
況朕有天下之日淺하니 得爲理之意가 固未及於弓이로라
自是
로 詔京官五品以上
注+京官, 謂京都官. 唐制, 五品以上, 皆以名聽制授.하여更宿中書內省
注+更, 平聲. 唐制, 中書內省在禁中.하고
每召見에 皆賜坐與語하여 詢訪外事하여 務知百姓利害와 政教得失焉하더라
太宗이 因識弓之未精하여 而知天下之理를 己不能盡하고 詢謀於衆而不自用하니 此其所以興也라
若使弓材不良하여 發矢不直하면 則當危幾交急之時하여 所欲斃者를 不能應弦而倒하여 而濱於殆也가 久矣라
蓋見太宗之微라 故借弓爲喻하여 所以規之也니 猶曰君心不正하면 則言行皆邪하여 勢雖尊嚴이나 而出政不善云爾하니라
太宗英才蓋世
하고 群臣亦一時豪傑
이나 多不足以望
이요 而造弓者
가 乃自外而窺其内
하니 衆不可揜
이 蓋如此
어늘 人君可不愼哉
아
凡人能反求諸己者實難이어늘 太宗雖愧於聽德之聰이나 然能因是召見京官하고 問民疾苦와 政事得失하니 是亦爲君之道也라
愚按 古者에 工執藝事以諫은 固時見於傳하되 不謂唐之弓工이 能見太宗之微하고 而有木心不正하여 表裏皆邪之語라
정관貞觀 초년에
태종太宗이
소우蕭瑀注+〈소우蕭瑀는〉 자字가 시문時文이니, 후량後梁 명제明帝의 아들이다. 당唐 고조高祖가 관중關中에 들어와 그를 불러서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하였다. 무덕武德(618~626) 초기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옮겼다. 정관貞觀 초기에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임명되었다가 복야僕射로 옮기고 또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옮겨서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였다. 뒤에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임명되었다.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공恭이라고 하였다. 황제(太宗)가 그의 성품이 시기한다고 하여 시호를 고쳐 정편貞褊이라고 하였다.에게 말하였다.
“짐이 젊었을 때 활과 화살을 좋아하여
注+소少(젊다)와 호好(좋아하다)는 모두 거성去聲이다. 스스로 그 묘리를 모두 안다고 생각하였소.
최근 양궁良弓 열 자루를 얻어 궁공弓工(활 제작공)에게 보여주니, 궁공이 말하였소.
‘나무의 심이 바르지 못하여 나뭇결이 모두 삐뚤어져 있으며
注+개皆는 어떤 본에는 다多로 되어 있다. 활은 비록 굳세고 강하나 화살을 발사하는 것이 똑바르지 않으니, 좋은 활이 아닙니다.’
짐은 활과 화살을 들고 천하를 평정하면서 수많은 활을 사용하였는데도 오히려 활의 묘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오.
하물며 짐이 천하를 차지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정치하는 뜻을 이해한 것이 실로 활을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오.
활도 오히려 잘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정치야 더 말할 것이 있겠소.”
이로부터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조서를 내려
注+경관京官은 경도京都의 관官을 말한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5품品 이상은 모두 이름을 올려 제수制授(임명)를 따른다. 교대로
중서내성中書內省에서 숙직을 하도록 하였다.
注+경更(번갈다)은 평성平聲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중서내성中書內省은 금중禁中에 있다.
그들을 불러 볼 때마다 모두 자리를 내주어 함께 대화를 하여 궁궐 밖의 일에 관해 물어 백성의 이해와 정치교화의 득실을 아는 데 힘썼다.
蕭瑀
“《국어國語》에 ‘국가가 흥성하려고 할 적에는 군자君子(집정대신)가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고, 망하려고 할 적에는 군자가 넉넉함이 있는 듯이 여긴다.’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이 활에 정밀하지 못함을 안 것으로 인해 천하의 정치를 자기가 다 알지 못함을 알고는 많은 사람에게 묻고 자기의 의견만을 쓰지 않았으니, 이것이 흥성하게 된 이유이다.”
“태종太宗은 활 솜씨가 세상에서 뛰어나 화살을 헛쏘는 일이 없었다.
만약 활의 재질이 좋지 않아 쏜 화살이 똑바로 나가지 않으면 위기가 교차하는 급한 때를 당하여 죽이려고 하는 자를 활을 쏘기 무섭게 맞춰 넘어뜨릴 수 없어 위태로운 상황에 다다른 지가 오래일 것이다.
태종의 은미한 뜻을 보았으므로 활을 빌려 비유하여 경계시킨 것이니, 마치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언행이 모두 잘못되어, 위세는 비록 존엄하지만 정치를 함이 선하지 못하다.’라는 말과 같다.
집예執藝의 말은 이른바 백아伯牙의 거문고 연주인데, 태종이 듣는 것이 종자기鍾子期가 듣는 것과 다르겠는가.
태종은 영특한 재주가 세상을 덮으니 신하들이 또한 한 시대의 호걸이었으나 대부분 태종의 용안을 우러러보지 못하였고, 활을 만드는 자가 밖으로부터 그 안을 엿보았으니,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임금이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사람이 돌이켜 자기에게서 구하기는 실로 어려운 것인데 태종이 비록 덕이 있는 말을 듣는 총명함에는 부족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경관京官을 불러 보고 백성의 고통과 정사의 득실을 물었으니, 이는 또한 임금의 도리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옛날에 백공百工이 기예의 일로 간언한 것은 진실로 전기傳記에 수시로 보이지만, 당唐나라의 궁공弓工이 태종太宗의 은미한 뜻을 보고 나무의 심이 바르지 못해 겉과 속이 모두 삐뚤어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말은 맹자孟子가 “한 번 임금을 바로잡으면 나라가 안정된다.”라 하고,
동중서董仲舒가 “임금이 된 자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모든 백성을 바르게 하면 원근遠近이 한결같이 바르게 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 뜻과 같으니,
태종太宗이 과연 공인工人의 말로 인하여 경전經傳의 말을 유추하여 적용하였는지는 알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