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十七年에 太宗이 謂侍臣曰 自古草創之主가 至于子孫하여 多亂은 何也오
司空房玄齡
이 曰 此爲幼主
注+ 此爲幼主:爲, 去聲.가 生長深宮
注+ 生長深宮:長, 音掌.하여 少居富貴
注+ 少居富貴:少, 去聲.하여 未嘗識人間情僞
와 理國安危
하니 所以爲政多亂
이니이다
太宗이 曰 公意推過於主어니와 朕則歸咎於臣하노라
夫功臣子弟
注+ 夫功臣子弟:夫, 音扶.多無才行
注+ 多無才行:行, 去聲.이어늘 藉祖父資蔭
하여 遂處大官
注+ 遂處大官:處, 上聲.하여 德義
를 不修
하고 奢縱
을 是好
注+ 是好:好, 去聲.라
主旣幼弱하고 臣又不才하여 顚而不扶하니 豈能無亂이리오
隋煬帝錄宇文述在藩之功
하여 擢化及於高位
하되 不思報效
하고 翻行弑逆
注+ 擢化及於高位……翻行弑逆:化及, 隋相宇文述之子, 爲右屯衛將軍. 武德初, 弑煬帝於江都, 立秦王浩, 復殺浩, 自立, 稱許帝. 二年, 竇建德破化及於聊城, 殺之.하니 此非臣下之過歟
아
朕發此言은 欲公等戒勖子弟하여 使無𠍴過하노니 卽家國之慶也니라
太宗
이 又曰 化及與玄感
은 卽隋大臣受恩深者子孫
이로되 皆反
하니 其故
는 何也
注+ 化及與玄感……其故何也:玄感, 隋相楊素之子, 爲大將. 大業九年, 起兵黎陽, 圍東都. 隋主命宇文述等討之, 遂敗死.오
岑文本
이 對曰 君子
는 乃能懷德荷恩
注+ 乃能懷德荷恩:荷, 去聲.이나 玄感化及之徒
는 竝小人也
라
注
蓋諸侯有大臣輔佐하고 自非甚無道者면 皆足繼其先世나
有周盛世
에 自諸侯入爲公卿
하니 必若
而後
에 可也
라
自兩漢以來
로 未聞宰相大臣有世官者
러니 煬帝無道
하여 하여 玄感化及之禍
를 自取之耳
라
玄齡以爲幼主生長深宮하여 不識人間情僞하니 所以多亂이라하니 其說是矣라
今觀太宗之後면 近而高宗中宗之昏庸하고 遠而穆敬懿僖之謬戾하여 馴致亂亡이 咸其自取하니 豈功臣子弟之罪乎아
정관貞觀 17년(643)에 태종太宗이 근신에게 말하였다. “예로부터 창업한 군주가 자손에 이르러서 대부분 어지러운 것은 무엇이오?”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말하였다. “이는 어린 임금이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자라서
注+장長(기르다)은 음이 장掌이다., 어렸을 적에 부귀하게 살아
注+소少(어리다)는 거성去聲이다. 일찍이 민간의 실정‧허위와 나라를 다스리는 안전‧위험을 알지 못하니 정사를 행함에 대부분 어지럽게 되는 까닭입니다.”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공의 뜻은 허물을 임금에게 미루는데 짐은 잘못을 신하에게 돌리겠소.
공신의 자제들은
注+부夫(발어사)는 음이 부扶이다. 대부분 재주와 행실이 없거늘
注+행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다. 부조父祖의 음덕에 힘입어 마침내 높은 벼슬자리에 처하여
注+처處(처하다)는 상성上聲이다. 덕德과
의義를 닦지 않고 사치와 방종을 좋아하오.
注+호好(좋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임금이 이미 어리며 약하고 신하는 또 재주가 없어서 임금이 넘어져도 부축하지 못하니, 어찌 어지러움이 없을 수 있겠소?
수 양제隋 煬帝는
우문술宇文述이 변방에 있을 때의 공을 기록하여
우문화급宇文化及을 높은 지위에 발탁하였는데 우문화급은 공으로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시해하는 반역을 행하니
注+우문화급宇文化及은 수隋나라 재상 우문술宇文述의 아들로,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이 되었다. 무덕武德 초기에 양제煬帝를 강도에서 시해하고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세웠다가 다시 양호를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허제許帝라고 일컬었다. 2년(619)에 두건덕竇建德이 요성聊城에서 우문화급을 격파하고 그를 죽였다., 이는 신하의 허물이 아니겠소?
짐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공들에게 자제를 훈계하기에 힘써서 그들이 과실이 없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니, 곧 국가의 경사가 될 것이요.”
태종太宗이 또 말하였다. “우문화급과
양현감楊玄感은 곧
수隋나라 대신으로서 은혜를 깊이 받은 자의 자손인데 모두 배반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오.”
注+양현감楊玄感은 수隋나라 재상 양소楊素의 아들로, 대장이 되었다. 대업大業 9년(613)에 여양黎陽에서 병사를 일으켜 동도東都를 포위하였다. 수 양제隋 煬帝가 우문술 등에게 명령하여 토벌하게 하니 마침내 패하여 죽었다.
잠문본岑文本이 대답하였다. “군자는 능히 덕을 생각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注+하荷(받다)는 거성去聲이다. 양현감과 우문화급의 무리들은 모두 소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옛사람들은 그래서 군자를 귀하게 여기고 소인을 천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옛날에 제후는 대물려 봉해짐이 있었으나, 공公‧경卿‧대부大夫가 대물리는 관직이 없는 것은 무엇인가?
제후諸侯는 대신의 보좌함이 있고 스스로 심히 무도한 자가 아니면 모두 그 선조의 대를 이을 수 있었으나,
공公‧경卿‧대부大夫는 하나라도 온당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해를 받는 것이다.
주周나라의 성대한 시대에는 제후로부터 들어와 공公‧경卿이 되었으니, 반드시 여급呂伋‧소호召虎와 같은 이후에야 할 수 있었다.
양한兩漢 이래로 재상宰相‧대신大臣이 대물리는 관직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양제煬帝가 무도하여 일을 옛것을 본받지 않아서 양현감楊玄感과 우문화급宇文化及의 화를 스스로 취하였다.
태종太宗이 묻기를 “수성守成한 임금이 어찌하여 어려움이 많은가.” 라고 하니,
방현령房玄齡이 말하기를 “어린 임금이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자라, 사람들의 실정과 허위를 알지 못하니 대부분 어지럽게 되는 까닭입니다.” 라고 하니, 그 말이 옳다.
태종太宗이 마침내 공신의 자제들에게 허물을 돌렸으니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지금 태종太宗의 후손을 살펴보면 가깝게는 고종高宗‧중종中宗이 우둔하였고, 멀리로는 목종穆宗‧경종敬宗‧의종懿宗‧희종僖宗이 어긋나는 짓을 하여 점차 혼란과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니, 어찌 공신 자제의 죄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