諫議大夫
注+唐制, 掌諫論得失侍從贊相之職.注+詳見任賢篇.이 對曰
古者에 聖哲之主는 皆亦近取諸身이라 故能遠體諸物하니이다
昔楚聘
注+楚, 春秋時國名, 僭稱王. 詹何, 楚詹尹之後, 隱於釣. 楚莊王聞而異之, 召而問焉. 出列子.하여 問其理國之要
한대 詹何對以修身之術
하니
楚王又問理國은 何如오한대 詹何曰 未聞身理而國亂者니이다하니
陛下所明
은 實同古義
注+按通鑑武德九年, 太宗謂侍臣曰 “君依於國, 國依於民, 刻民以奉君, 猶割肉以充腹, 腹飽而身斃, 君富而國亡. 故人君之患, 不自外來, 常由身出. 夫欲盛則費廣, 費廣則賦重, 賦重則民愁, 民愁則國危, 國危則君喪矣. 朕嘗以此思之, 故不敢縱欲也.” 與此章辭異而旨同, 故附見于此.니이다唐 太宗에게 간언을 하는 魏徵
【集論】愚按 中庸
에 修身爲先
하고 大學
에 修身爲本
하니
古者에 二帝三王之治는 未有不先正其身하고 而能正天下者也라
故堯必克明峻德而後에 能黎民時雍하고 舜必帝德罔愆而後에 能萬邦咸寧하고 禹必祗台德先而後에 能朔南暨聲教하고 湯必懋昭大德而後에 能表正萬邦하고 武王必建其有極而後에 能作民父母라
蓋身者
는 表也
요 天下者
는 也
니 未有表正而景曲者也
라
身者는 源也요 天下者는 流也니 未有源淸而流濁者也라
後之人君에 若漢高之約法除苛하고 文景之幾致刑措하고 宣帝之綜核名實하고 光武之恭勤儉約하고 明帝之明察善斷하고 孝章之寛厚長者는 其愛民之心과 治民之具가 蓋亦有合乎先王者矣요 特其本原之地에 有未純焉者爾라
由此觀之컨대 身心與家國天下爲一者는 三代以上之治也요 身心與家國天下爲二者는 三代以下之治也라
唐太宗은 以英武之姿로 當大亂之後하여 芟除群雄하여 拓定四海하고
一旦君臨南面에 首告其群臣曰 安天下인댄 必須先正其身이니 未有身正而影曲者라하니
魏徵이 斯時에 正當告之以中庸之九經과 大學之八目하여 于以闡揚聖學之奧하고 于以發明心術之微는 可也나
使太宗斯時得聞二帝三王之學
이런들 必將終始如一
하여 而無
하고 内外如一
하여 而無
矣
리니 豈特貞觀之治而已邪
아
太宗은 能言之나 而不能行之하고 魏徵은 能贊美之나 而不能發明之也로다
呉氏編是書에 置此於開卷之首하니 其有所取也夫아 抑有所感也夫아
간의대부諫議大夫注+〈간의대부諫議大夫는〉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임금의 잘잘못을 충고하여 논하며 곁에서 모시고 돕는 일을 관장한다.위징魏徵이
注+〈위징魏徵은〉 본서 제3편 〈논임현論任賢〉에 자세히 보인다. 대답하였다.
“옛날에 성철聖哲한 임금은 모두 또한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하였기 때문에 여러 사물을 멀리 살필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초楚나라에서
첨하詹何를 초빙하여
注+초楚는 춘추春秋시대의 나라 이름인데, 왕王(天子)이라고 참칭하였다. 첨하詹何는 초楚나라 첨윤詹尹의 후손인데, 낚시하며 숨어 지냈다. 초楚 장왕莊王이 소문을 듣고 특이하게 여겨 불러서 하문下問하였다. 내용이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나온다. 국가를 다스리는 요점을 물었는데, 첨하는 몸을 닦는 방도로 대답하였습니다.
초왕楚王이 또 묻기를 ‘국가를 다스림은 어떻게 해야 하오?’라고 하자, 첨하는 ‘자신이 잘 다스려졌으면서 국가가 어지럽게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밝히신 것은 실로
고인古人의 도리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注+살펴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 무덕武德 9년(626)에 태종太宗이 근신에게 “임금은 국가에 의지하고 국가는 백성에게 의지하오. 백성에게서 각박하게 거두어 임금을 받드는 것은 마치 살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으니, 배는 부르지만 몸이 죽고 임금은 부유해도 국가는 망하오. 그러므로 임금의 근심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오. 욕심이 많으면 비용이 많아지고, 비용이 많아지면 세금이 무거워지고, 세금이 무거워지면 백성이 근심하고, 백성이 근심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임금은 죽게 되오. 짐朕이 일찍이 이를 생각하였으므로 감히 내키는 대로 욕심 부리지 않소.”라고 하였는데, 이 장章과 말은 달라도 뜻이 같으므로 여기에 붙여 소개한다.
【集論】내(戈直)가 살펴보건대 《중용中庸》의 구경九經에는 수신修身이 우선이고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에는 수신修身이 근본이다.
옛날에 이제二帝 삼왕三王의 정치는 자기 몸을 먼저 바로잡지 않고 천하를 바르게 할 수 있었던 경우는 없었다.
그러므로 요堯임금은 반드시 능히 큰 덕을 밝힌 뒤에 능히 백성들이 이에 화합하였고, 순舜임금은 반드시 제帝의 공덕이 허물이 없은 뒤에 능히 모든 나라가 다 편안하였고, 우禹임금은 반드시 자신의 덕을 공경히 하여 솔선한 뒤에 능히 교화가 남북에 미쳐갔고, 탕湯임금은 반드시 큰 덕을 힘써 밝힌 뒤에 능히 의표로 모든 나라를 바로잡았고, 무왕武王은 반드시 표준을 세운 뒤에 능히 백성의 부모가 되었다.
몸은 의표이고 천하는 그림자이니, 의표가 바르면서 그림자가 굽은 경우는 없었다.
몸은 샘이고 천하는 지류支流이니, 샘이 맑으면서 지류가 흐린 경우는 없었다.
후세의 임금들 중에 약법約法으로 번거로움을 제거한 한漢나라 고조高祖, 거의 형벌을 쓰지 않은 데에 이른 문제文帝‧경제景帝, 명칭과 실상을 치밀하게 밝혀 부합하게 한 선제宣帝, 공손하고 검약한 광무제光武帝, 밝게 살펴 잘 판단한 명제明帝, 관후하고 점잖은 효장제孝章帝 같은 이들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백성을 다스리는 도구가 또한 선왕先王에게 합치하는 것이 있었고, 다만 그 본원本原인 마음에 순수하지 못한 것이 있었을 뿐이다.
이를 말미암아 살펴보면 몸‧마음과 집안‧나라‧천하가 하나였던 것은 삼대三代 이전의 정치이고, 몸‧마음과 집안‧나라‧천하가 둘이었던 것은 삼대三代 이후의 정치이다.
당唐 태종太宗은 영준英俊 무용武勇의 자질로 큰 난리를 겪은 뒤에 여러 영웅들을 제거하여 천하를 평정하였고,
어느 날 임금이 되어 남면南面할 때 여러 신하들에게 첫째로 고하기를 “천하를 안정시키려 하면 반드시 제 몸을 먼저 바르게 해야 하니, 그 몸이 바른데 그림자가 굽은 경우는 없었다.”라고 하니,
위징魏徵이 이때에 곧바로 《중용中庸》의 구경九經과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으로 고하여 성학聖學의 심오함을 열어주고 심술心術의 은미함을 드러내 밝힌 것은 옳다.
그러나 초왕楚王과 첨하詹何의 말로 고한 것은 얼마나 거리가 먼가.
만일 태종이 이때에 이제二帝 삼왕三王의 학문을 들을 수 있었다면 반드시 장차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아서 늘그막의 뉘우침이 없었을 것이고, 안팎이 한결같아서 후궁後宮의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정관貞觀의 치적만 이룰 뿐이었겠는가.
태종은 말을 잘하였으나 시행하지는 못하였고 위징은 찬미贊美는 잘하였으나 드러내 밝히지는 못하였다.
오긍吳兢이 본서本書를 편집하는 데에 이것을 책의 맨 앞에 두었으니 채택한 것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느낀 것이 있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