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有天下四百五十餘年이요 商有天下六百三十餘年이요 周有天下八百六十餘年이라
唐之可稱者
는 而已
로되 太宗文皇帝
는 身兼創業守成之事
하여 納諫求治
하여 勵精不倦
하니 其效至于
라
故貞觀之盛
은 有非
之所可及
하여 而太宗卓然爲唐三宗之冠
이라
史臣吳兢이 類輯朝廷之設施와 君臣之問對와 忠賢之諍議하여 萃成十卷하니 曰貞觀政要라
事覈辭質하여 讀者易曉일새 唐之子孫이 奉爲祖訓하고 聖世亦重其書라
夫過唐者
는 을 可鏡也
요 超漢者
는 夏大禹之
를 可規也
요 繼夏者
는 商成湯之
를 可師法也
요
이라 文武之德
과 旦奭之猷
가 具載
周頌之詩
와 召誥立政無逸之書
하여 義理昭融
하며 教戒深切
하니 率而由之
인댄 其不上躋太和景運之隆乎
아
然譬之行遠에 必自邇요 譬之登高에 必自卑하니 則貞觀政要之書가 何可無也리오
庶士戈直이 考訂音釋하고 附以諸儒論說하니 又足開廣將來進講此書者之視聽이라
하夏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것은 450여 년이고, 상商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것은 630여 년이고, 주周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것은 860여 년이다.
삼대三代 이후에 나라를 오래 소유한 것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뿐이다.
당唐나라에서 칭송할 만한 임금은 세 분뿐이었는데,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는 자신이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일을 겸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치적을 구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그 효과가 쌀 1말의 값이 3전錢이고 바깥문을 닫지 않는 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정관貞觀 시대의 성대함은 개원開元(713~741) 시대와 원화元和(806~820) 시대가 따라가지 못하여 당唐나라 태종太宗‧현종玄宗‧헌종憲宗 중에 태종太宗이 월등히 으뜸이 된다.
사신史臣 오긍吳兢이 조정의 시행, 임금과 신하의 문답, 충신과 현신의 간언을 부류별로 편집하여 모아 10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정관정요貞觀政要》이다.
사실이 확실하고 말이 실질적이어서 읽는 이들이 쉽게 이해하기 때문에 당唐나라 자손들이 받들어 조상의 훈계로 삼았고, 성세聖世에도 그 책을 중시하였다.
내가 경연經筵의 자리에 있을 때 일찍이 이 책을 진강進講하였다.
당唐나라보다 나은 것으로는 한漢나라 효문제孝文帝의 공손과 검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거울로 삼을 만하고, 한漢나라보다 나은 것으로는 하夏나라 대우大禹가 훌륭한 말을 좋아한 것과 맛있는 술을 싫어한 일을 법으로 삼을 만하고, 하夏나라를 계승한 것으로는 상商나라 성탕成湯이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은 것과 재물‧이익을 늘리지 않은 것을 본받을 만하다.
주周나라는 하夏‧은殷 두 시대를 살펴서 빛나는 문화를 이루었으므로,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덕과 주공周公 단旦, 소공召公 석奭의 계책이 《시경詩經》의 이남二南, 이아二雅와 〈주송周頌〉의 시詩,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소고召誥〉, 〈입정立政〉, 〈무일無逸〉의 글에 모두 기재되어 의리義理가 밝게 발양되어 교계教戒가 매우 절실하니, 이를 따라 행하면 태평스런 길운의 융성함에 올라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유하자면 먼 데 갈 적에는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고 높은 데에 오를 적에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오르는 것과 같으니, 《정관정요》가 어찌 없어서야 되겠는가.
서사庶士(낮은 관원) 과직戈直이 음석音釋을 살펴 바로잡고 여러 유학자들의 논설을 첨부하였으니 또 장래 이 책을 진강하는 사람의 견문을 크게 열어줄 것이다.
전前 한림학사翰林學士 자선대부資善大夫 지제고知制誥 동수국사同修國史 오징吳澄은 제사題辭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