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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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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十一年 侍御史馬周上疏曰
漢晉以來 諸王 皆爲樹置失宜注+ 皆爲樹置失宜:爲, 去聲.하여 不預立定分하여 以至於滅亡하니
人主熟知其然하되 但溺於私愛니이다
今諸王 承寵遇之恩 有過厚者하니 臣之愚慮 不惟慮其恃恩驕矜也
昔魏武帝寵樹陳思러니 及文帝卽位 防守禁閉하여 有同獄囚하니
以先帝加恩太多 故嗣王 從而畏之也注+ 故嗣王從而畏之也:魏武帝, 曹操也. 操生四子, 丕彰植熊. 丕, 文帝也, 植, 陳思王也. 植多藝能, 操愛之. 文帝旣立, 植寵日衰, 後以悖慢, 貶安鄕侯, 後進王東阿.일새니 此則武帝之寵陳思 適所以苦之也
且帝子何患不富貴리오
身食大國하여 封戶不少하니 好衣美食之外 更何所須리오
而每年 別加優賜하여 曾無紀極注+ 曾無紀極:曾, 音層.하니
俚語注+ 俚語曰:俚, 音里. 俚語, 猶云俗諺也.貧不學儉하고 富不學奢라하니 言自然也
今陛下以大聖創業하시니 豈惟處置見在子弟而已注+ 豈惟處置見在子弟而已:處, 上聲. 見, 音現.리오 當須制長久之法하여 使萬代遵行이니이다
疏奏 太宗 甚嘉之하여 賜物百段하다
【集論】唐氏仲友曰 太宗 制古之所不制하고 臣古之所不臣이나
而獨牽於私欲하여 不能自克於嫡庶之際하고 不爲遠處하여
竟使賢才宗支 連頸就戮이라
周言有先見之明이어늘 惜哉 言之不力이여
愚按 周官之文하여 王之衆子不與焉하니
夫先王愛子之心 豈不欲其周徧哉
蓋所以別嫌疑하고 明嫡庶하며 絶覬覦하고 息禍亂也
隋文帝旣立爲太子하고 又使晉漢秦蜀四王으로 各據方面하여 恩寵相埒하고
且誇示於人曰 前代兄弟相爭者 由嫡庶之分也
今吾五子同母 何憂禍亂哉아하여늘
其後五子互相攘奪하여 無一人得令終者하니 至今爲天下笑
太宗 目覩隋室之禍하니 宜知所鑑矣어늘 旣立承乾爲太子하고 復寵待諸王하여 無所高下
馬周窺見禍亂之端하여 亟以爲言한대 太宗雖能嘉賞이나 迄不能改
愚觀太宗每事以隋爲鑑이어늘 獨於諸王定分而忘之하니 豈所謂


정관貞觀 11년(637)에 시어사侍御史 마주馬周가 상소를 올렸다.
나라와 나라 이후로는 제왕諸王을 분봉해주는 데에 마땅함을 잃어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미리 분수를 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으니,
군주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사사로운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앞의 수레가 이미 뒤집혀졌는데도 뒤의 수레가 행로를 바꾸지 않듯이 하였습니다.
지금 제왕諸王 중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총애를 받는 자가 있으니, 어리석은 신의 염려는 그들이 오직 총애를 믿고 교만 떠는 것을 우려할 뿐만이 아닙니다.
옛날 위 무제魏 武帝(조조曹操)는 진사왕陳思王(조식曹植)을 총애하였는데, 문제文帝(조비曹丕)가 즉위하고 나서는 진사왕을 감금하여 옥중의 죄수처럼 지키게 하였습니다.
魏 武帝 曹操魏 武帝 曹操
선제先帝(위 무제)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총애하였기 때문에 사왕嗣王(문제)이 그로 인해 두려워한 것이니注+위 무제魏 武帝조조曹操이다. 조조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조비曹丕조창曹彰조식曹植조웅曹熊이다. 조비曹丕문제文帝이고, 조식曹植진사왕陳思王이다. 조식曹植은 재능이 많아 조조가 총애하였다. 문제가 즉위하고 나서 조식曹植의 총애는 날마다 쇠퇴하였으며, 뒤에 오만하고 불경함으로 인해 안향후安鄕侯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동아왕東阿王으로 승진되었다., 이는 진사왕에 대한 무제의 총애가 바로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입니다.
또 황제의 아들이 어찌 부귀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대국大國을 식읍으로 받고 봉해진 영지 내의 호구 수도 적지 않으니, 좋은 옷을 입고 맛난 것을 먹는 것 이외에 다시 또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매년 별도로 넉넉히 물품을 내려주어 그 한도가 없었습니다.注+(일찍)은 음이 이다.
속담에 말하기를注+(속되다)는 음이 이다. 이어俚語속언俗諺이라는 말과 같다. ‘가난한 사람은 검소함을 배우지 않아도 검소하고, 부귀한 사람은 사치를 배우지 않아도 사치를 한다.’라고 하였으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대성인大聖人으로서 창업하셨으니, 어찌 현재의 자제들을 잘 처리할 뿐이겠습니까.注+(처하다)는 상성上聲이다. (현재)은 음이 이다. 마땅히 장구한 법을 제정하여 만대에 걸쳐 준수하도록 해야 합니다.”
상소문이 올라가자 태종은 매우 기뻐하며 마주에게 비단 100을 내렸다.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태종太宗이 옛날에 다스리지 못한 것을 다스리고, 옛날에 신하로 삼지 못한 인물들을 신하로 삼았으나,
다만 사사로운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적서嫡庶의 서열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원대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뛰어난 왕자들이 목을 나란히 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다.
마주馬周의 말이 비록 선견지명이 있었지만 강력하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 안타깝다.”
내가 살펴보건대, 《주례周禮》 〈천관天官 선부膳夫〉에 “왕과 세자의 음식 비용은 다소를 따지지 않는다.” 는 말이 있어 왕의 여러 아들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선왕先王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찌 동일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이는 혐의嫌疑를 구별하고, 적서嫡庶를 분명히 하며, 윗자리를 넘보는 것을 막고, 재앙과 난리를 그치게 하려는 것이다.
수 문제隋 文帝가 이미 양용楊勇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나서, 또 진왕晉王한왕漢王진왕秦王촉왕蜀王 4왕으로 각각 방면을 점거하게 하여 은총을 동일하게 베풀고,
또 남들에게 과시하기를 “이전 시대에 형제들이 서로 다툰 것은 적서嫡庶의 구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지금 나의 다섯 아들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니, 어찌 난리를 일으킬 근심을 하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그 후에 다섯 아들이 서로 쟁탈전을 벌여 한 사람도 제명에 죽은 자가 없어 지금까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다.
태종이 직접 나라 황실의 재앙을 보았으니 마땅히 귀감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미 승건承乾을 태자로 세우고 나서 다시 여러 왕들을 총애하여 높낮이의 구분이 없었다.
마주馬周가 재앙과 난리의 단서를 엿보고 신속히 말을 하였는데, 태종이 비록 가상하게 생각했으나 결국에는 고치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태종은 매사에 나라를 귀감으로 삼았는데, 유독 제왕諸王의 분수를 정해주는 일에 대해서는 잊었으니, 어찌 이른바 “사랑에 빠진 자는 밝지 못하다.” 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역주
역주1 前車旣覆 而後車不改轍也 : 과거의 잘못을 고치지 않아 되풀이함을 말한다. 《韓詩外傳》 권5의 “前車覆而後車不誡 是以後車覆也”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2 王世子不會 : 《周禮》 〈天官 膳夫〉의 “唯王及后世子之膳不會”에서 유래한 것이다. 不會는 鄭玄 注에 “다소를 회계하지 않는다.[不會計多少]”라고 풀이하였다.
역주3 : 隋 文帝의 長子이다.
역주4 溺愛者不明 : 《大學》 8장 “人莫知其子之惡”의 朱熹 注에 보인다.

정관정요집론(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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