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二年
에 太宗謂侍臣曰 爲政之要
는 惟在得人
이니 用非其才
면 必難致治
라 今所任用
은 必須以德行
注+① 必須以德行:去聲, 後同.學識爲本
이로다
諫議大夫王珪曰 人臣若無學業이면 不能識前言往行하니 豈堪大任이리잇가
漢昭帝時
注+② 漢昭帝時:昭帝, 名, 弗陵, 武帝幼子.에 有人詐稱衛太子
注+③ 有人詐稱衛太子:名, 據, 武帝太子, 衛皇后所生.어늘 聚觀者數萬人
이라 衆皆致惑
이로되 雋不疑
注+④ 雋(전)不疑:雋, 音吮, 姓也. 不疑, 其名. 字曼倩, 渤海人, 時爲京兆尹.가 斷以蒯聵之事
注+⑤ 斷以蒯聵(괴외)之事:蒯, 古買切. 하니
昭帝曰 公卿大臣
은 當用經術明於古義者
注+⑥ 當用經術明於古義者:昭帝始元五年, 有男子乘黃犢車詣北闕, 自謂衛太子. 詔公卿識視, 皆不敢言. 雋不疑後到, 叱從吏收縛曰 “昔蒯聵出奔, 輒距而不納, 春秋是之. 衛太子得罪先帝, 亡不卽死, 今來自, 此罪人也.” 遂送. 帝嘉之, 라하니 此則固非
所可比擬
니이다
注
昔漢霍光이 因夏侯勝之言하여 而重經術之士하고 昭帝因雋不疑之事하여 謂公卿大臣當用明於古義者라하니
夫漢之諸儒가 要非眞儒也로되 而明效大驗如此어든 況眞知道者哉아
太宗이 謂任人須用德行學識爲本이라하고 王珪謂人臣若無學業이면 豈堪大任이리오하니 其說이 美矣니
此貞觀之治所由致也라 然太宗王珪之所稱道者가 又果眞儒也哉리오
정관貞觀 2년(628)에
태종太宗이
근신近臣에게 말하였다. “정사의 요체는 오직 사람을 얻는 데에 있으니 등용한 것이 제대로 된 인재가 아니면 반드시 정치를 완성하기 어렵소. 이제 임용하는 인물들은 반드시
덕행德行과
注+〈행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학식學識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오.”
간의대부諫議大夫 왕규王珪가 말하였다. “신하가 학식이 없으면 과거 인물들의 말씀과 행위를 알 수 없으니 어떻게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 소제漢 昭帝 때
注+소제昭帝의 이름은 불릉弗陵이며 한 무제漢 武帝의 작은아들이다. 위태자衛太子라고 사칭하는 자가 나타나자
注+〈위태자衛太子의〉 이름은 거據이며, 한 무제漢 武帝의 태자太子인데 위황후衛皇后의 소생이다., 운집하여 구경한 자들이 수만 명이었습니다. 모두들 의혹했는데,
준불의雋不疑가
注+준雋은 음音이 전吮으로 성이며 불의不疑는 그 이름이다. 〈준불의雋不疑는〉 자字는 만천曼倩으로 발해渤海 사람이며 당시에 경조윤京兆尹을 맡고 있었다. 괴외蒯聵의 사건으로 결단하였습니다.
注+괴蒯는 고古와 매買의 반절이다. 괴외蒯聵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위 영공衛 靈公의 세자世子인데 송宋나라로 망명했다. 영공靈公이 죽고 나서 손자인 출공 첩出公 輒이 즉위하자 진晉나라가 척戚에 괴외를 들여보내, 아버지와 아들이 국가를 차지하기 위해 다퉜다. 그로부터 15년 뒤에 괴외가 입국하여 장공莊公이 되자 출공 첩은 망명했다.
이에 한 소제가 말하기를, ‘
공公‧
경卿‧
대신大臣은
경학經學이 있어 옛 도리에 밝은 자를 등용해야 한다.’라고 했으니
注+한 소제漢 昭帝 시원始元 5년(B.C.82)에 황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북궐北闕로 찾아온 사내가 스스로 ‘위태자衛太子이다.’라고 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공경公卿들에게 살펴보게 했는데 모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준불의雋不疑가 뒤늦게 도착하였는데 수행한 아전에게 포박하라고 호통치며, “옛날 괴외蒯聵가 망명하자 출공 첩出公 輒이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춘추春秋》에서 옳은 일이라고 평했다. 위태자가 선제先帝에게 죄를 지어 도망가서 곧바로 죽지 않고 지금 직접 찾아왔으니, 이는 죄인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조옥詔獄으로 압송하였다. 소제昭帝가 이를 가상하게 여겼고, 정위廷尉가 사실을 조사해 결국 기만한 정황을 밝혀냈다. 이것은 진정 속된
도필리刀筆吏 따위가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진실로 경의 말과 같소.”
注
내가 살펴보건대, 가자賈子(가의賈誼)가 말하기를, “풍속을 바꾸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되돌려 도道로 향하게 하는 일은 속된 관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고 했다.
옛날 한漢나라 곽광霍光이 하후승夏侯勝의 말을 들어 경학에 밝은 인사를 중용하고, 한 소제漢 昭帝가 준불의雋不疑의 처사를 통해 “공公‧경卿‧대신大臣은 옛 도리에 밝은 자를 등용해야 한다.” 라고 했다.
한漢나라 유학자들이 진실한 유학자가 아님에도 이처럼 분명한 효과와 큰 증험이 되는데, 하물며 진실로 도를 안 사람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태종太宗이, “사람을 임용할 땐 반드시 덕행과 학식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라고 하고, 왕규王珪가, “신하가 학문이 없으면 어찌 큰 임무를 감당하겠습니까.” 라고 한 그 말은 훌륭하니
이것이 정관貞觀의 치세를 이룩한 이유이다. 하지만 태종과 왕규가 일컬은 내용이 과연 진실한 유학자의 것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