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는 諱世民이니 高祖次子也요
方四歲에 有書生謁高祖曰 公在相法에 貴人也니 然必有貴子라하고
及見太宗曰 龍鳳之姿에 天日之表니 其年幾冠하면 必能濟世安民하리라하다
書生已辭去에 高祖懼其語泄하여 使人追殺之로되 而不知其所往이라
煬帝從圍中以木繫詔書하여 投汾水而下하여 募兵赴援이라
不然하여 知我虛實하면 則勝敗未可知也리라하니 定興從之라
太宗爲人 聰明英武하여 有大志하여 而能屈節下士라
時天下已亂에 盜賊起하니 知隋必亡하여 乃推財養士하고 結納豪傑이라
又與晉陽令劉文靜尤善
하여 하니 太宗夜就獄中見之
하고 與圖大事
라
時百姓避賊多入城하여 城中幾萬人이어늘 文靜爲令久하여 知其豪傑하여 因共部署라
計已定하여 乃因裴寂告高祖하니 高祖初不許라가 已而許之하다
高祖已起兵하고 建大將軍府하니 太宗率兵徇西河하여 斬其郡丞高德儒라
唐兵西하여 將至霍邑하니 會天久雨하고 糧且盡이어늘 高祖謀欲還兵太原하니
太宗諫曰 義師爲天下起也니 宜直入咸陽하여 號令天下니이다
對曰 還則衆散於前하고 而敵乘於後하여 死亡須臾라 所以悲爾니이다
夜半에 太宗失道入山谷하여 棄其馬하고 步而及其兵하여 與俱還이라
高祖乃將而前하여 遲明至霍邑이어늘 宋老生不出하니
太宗從數騎傅其城하여 舉鞭指麾하여 若將圍之者하니
老生兵薄東陣하여 建成墜馬어늘 老生乘之하니 高祖軍却이라
太宗自南原馳下坂하여 分兵斷其軍爲二하여 而出其陣後하니
唐兵攻長安할새 太宗屯金城坊하여 攻其西北하여 遂克之하다
義寧元年에 爲光祿大夫唐國內史하고 徙封秦國公하니 食邑萬戶라
薛舉攻扶風하니 太宗擊敗之하여 斬首萬餘級하고 遂略地至隴右하다
率兵十萬攻東都하여 不克而還할새 設三伏于三王陵하여 敗隋將段達兵萬人하다
武德元年에 爲尚書令右翊衛大將軍하고 進封秦王하다
薛舉寇涇州하니 太宗爲西討元帥라가 進位雍州牧이라
八月에 太宗疾間하여 復屯于高墌城하여 相持六十餘日이라가 已而舉死어늘
仁杲將宗羅睺擊實한대 太宗遣將軍龐玉救實하니 玉軍幾敗라
太宗率兵出其後하니 羅睺敗走어늘 太宗追之하여 至其城下하니 仁杲乃出降이라
密見太宗에 不敢仰視하고 退而歎曰 真英主也라하다
獻捷太廟하고 拜右武候大將軍太尉使持節陝東道大行臺尚書令하여 詔蒲陝河北諸總管兵皆受其節度하다
是時에 劉武周據幷州하고 宋金剛陷澮州하고 王行本據蒲州하며
而夏縣人呂崇茂殺縣令以應武周하니 高祖懼하여 詔諸將棄河東以守關中이라
金剛走介州하니 太宗追之하여 一日夜馳二百里하여 宿于雀鼠谷之西原이라
行至浩州乃得食한대 而金剛將尉遲敬德尋相等皆來降이라
劉武周懼하여 奔于突厥하니 其將楊伏念舉幷州降이라
四年二月에 竇建德率兵十萬以援世充이어늘 太宗敗建德于虎牢하여 執之하니 世充乃降하다
六月에 凱旋할새 太宗被金甲하고 陳鐵騎一萬과 介士三萬하고 前後鼓吹하며 獻俘于太廟라
高祖以謂太宗功高하여 古官號不足以稱이라하여 乃加號天策上將하고
增邑戶至三萬하며 賜袞冕金輅雙璧黃金六千斤과 前後鼓吹九部之樂과 班劍四十人하다
高祖怒하여 命太子建成取山東男子十五以上悉阬之하고 驅其小弱婦女以實關中이어늘
七年에 突厥寇邊하니 太宗與遇于豳州호대 從百騎與其可汗語하니 乃盟而去하다
及取天下에 破宋金剛王世充竇建德等하여 太宗功益高하니 而高祖屢許以爲太子어늘
太子建成懼廢하여 與齊王元吉謀害太宗이나 未發이라
九年六月
에 大宗以兵入
하여 殺太子建成及齊王元吉
하니 高祖大驚
하여 乃以太宗爲皇太子
하다
八月甲子에 即皇帝位于東宮顯德殿하고 遣裴寂告于南郊하다
免關內及蒲芮虞泰陝鼎六州二歲租하고 給復天下一年하다
民八十以上賜粟帛하고 百歲加版授하며 廢潼關以東瀕河諸關하다
九月壬子에 禁私家妖神淫祀와 占卜非龜易五兆者하다
是歲에 進封子長沙郡王恪爲漢王하고 宜陽郡王祐楚王하다
二月丁巳에 詔民男二十女十五以上無夫家者를 州縣以禮聘娶하고
丙午에 詔齊僕射崔季舒黃門侍郎郭遵尚書右丞封孝琰以極言蒙難하여
季舒子剛과 遵子雲과 孝琰子君遵竝及淫刑하니 宜免內侍하고 褒敍以官하라하다
四月癸巳에 涼州都督長樂郡王幼良有罪하니 伏誅하다
五月癸丑에 勅中書令侍中朝堂受訟辭에 有陳事者悉上封하라하다
戊申에 利州都督李孝常右武衛將軍劉德裕謀反하니 伏誅하다
二年正月辛亥에 長孫無忌罷하다 兵部尚書杜如晦檢校侍中하여 總監東宮兵馬事하다
壬戌에 李靖爲關內道行軍大總管하여 以備薛延陀하다
己巳에 遣使巡關內하여 出金寶贖饑民鬻子者還之하다
辛卯에 辰州刺史裴虔通以弑隋煬帝削爵하여 流驩州하다
七月戊申
에 萊州刺史牛方裕絳州刺史薛世良廣州長史唐奉義虎牙郎將高元禮
를 以
之黨
이라하여 皆除名
하여 徙于邊
하다
二月戊寅에 房玄齡爲尚書左僕射하고 杜如晦爲右僕射하고 尚書右丞魏徵爲秘書監하여 參預朝政하다
戊戌에 賜孝義之家粟五斛하고 八十以上二斛하며 九十以上三斛하고 百歲加絹二匹하며 婦人正月以來産子者粟一斛하다
九月丁巳에 華州刺史柴紹爲勝州道行軍總管하여 以伐突厥하다
十一月庚申에 幷州都督李世勣爲通漠道行軍總管하고 華州刺史柴紹爲金河道行軍總管하며 任城郡王道宗爲大同道行軍總管하고 幽州都督衛孝節爲恒安道行軍總管하며 營州都督薛萬淑爲暢武道行軍總管하여 以伐突厥하다
是歲에 中國人歸自塞外及開四夷爲州縣者百二十餘萬人이라
御史大夫溫彥博爲中書令하고 王珪爲侍中하며 民部尚書戴冑檢校吏部尚書하여 參豫朝政하고 太常卿蕭瑀爲御史大夫하여 與宰臣參議朝政하다
辛卯에 疾愈하니 賜都督刺史文武官及民年八十以上孝子表門閭者有差하다
十月壬辰에 赦岐隴二州하고 免今歲租賦하며 降咸陽始平武功死罪以下하다
十一月壬戌에 右衛大將軍侯君集爲兵部尚書하여 參議朝政하다
二月己酉에 封弟元裕爲鄶王하고 元名譙王하며 靈夔魏王하고 元祥許王하며 元曉密王하다
庚戌에 封子愔爲梁王하고 貞漢王하며 惲郯王하고 治晉王하며 愼申王하고 囂江王하며 簡代王하다
五月乙丑에 以金帛購隋人沒于突厥者하여 以還其家하다
十二月丁亥에 詔決死刑호대 京師五覆奏하고 諸州三覆奏하며 其日尚食毋進酒肉하다
丁丑에 降雍岐豳三州死罪以下하고 賜民八十以上粟帛하다
八月辛未
에 寇邊
하니 右屯衛大將軍張士貴爲龔州道行軍總管以討之
하다
是夏에 吐谷渾寇涼州하니 左驍衛大將軍段志玄爲西海道行軍總管하고 左驍衛將軍樊興爲赤水道行軍總管하여 以伐之하다
十二月辛丑에 特進李靖爲西海道行軍大總管하고 侯君集爲積石道行軍總管하며 任城郡王道宗爲鄯善道行軍總管하고 膠東郡公道彥爲赤水道行軍總管하며 涼州都督李大亮爲且末道行軍總管하고 利州刺史高甑生爲鹽澤道行軍總管하여 以伐吐谷渾하다
三月庚辰에 洮州羌殺刺史孔長秀하고 附于吐谷渾하다
七月庚子에 鹽澤道行軍副總管劉德敏及羌人戰하여 敗之하다
癸丑에 徙封元景爲荊王하고 元昌漢王하며 元禮徐王하고 元嘉韓王하며 元則彭王하고 元懿鄭王하며 元軌霍王하고 元鳳虢王하며 元慶道王하고 靈夔燕王하며 恪吳王하고 泰魏王하며 祐齊王하고 愔蜀王하며 惲蔣王하고 貞越王하며 愼紀王하다
六月壬申에 溫彥博爲尚書右僕射하고 太常卿楊師道爲侍中하며 魏徵罷爲特進하여 知門下省事하여 參議朝章國典하다
十一年正月丁亥에 徙封元裕爲鄧王하고 元名舒王하다
二月丁巳에 營九嵏山爲陵하여 賜功臣密戚陪塋地及秘器하다
丙午
에 給亳州老子廟
와 兗州孔子廟戶各二十以奉享
하고 復
近墓戶二十以守衛
하다
九月丁亥에 河溢하여 壞陝州河北縣하여 毀河陽中潬하니 幸白司馬坂觀之하고 賜瀕河遭水家粟帛하다
甲戌에 如長春宮하여 免朝邑今歲租賦하고 降囚罪하다
八月壬寅에 吐蕃寇松州하니 侯君集爲當彌道行軍大總管하여 率三總管兵以伐之하다
九月辛亥에 闊水道行軍總管牛進達及吐蕃戰于松州하여 敗之하다
乙未에 至自始平하다 鈞州山獠反하니 桂州都督張寶德敗之하다
十一月己巳에 明州山獠反하니 交州都督李道彥敗之하다
十二月辛巳에 壁州山獠反하니 右武候將軍上官懷仁討之하다
十三年正月乙巳
에 拜獻陵
하여 하고 免縣人今歲租賦
하며 賜宿衛陵邑郎將三原令爵一級
하다
五月甲寅에 以旱避正殿하고 詔五品以上言事하고 減膳하며 罷役하고 理囚하며 賑乏하니 乃雨하다
十二月壬申에 侯君集爲交河道行軍大總管하여 以伐高昌하다
甲寅에 幸魏王泰第하여 赦雍州長安縣하고 免延康里今歲租賦하다
二月丁丑
에 觀釋奠于國學
하고 赦大理萬年縣
하고 賜
高第生帛
하다
九月癸卯에 赦高昌部及士卒父子犯死期犯流大功犯徒小功緦麻犯杖皆原之하다
十二月丁酉에 侯君集俘高昌王以獻하니 賜酺三日하다
十五年正月辛巳에 如洛陽宮하여 次溫湯하다 衛士崔卿刁文懿謀反하니 伏誅하다
乙未에 免洛州今歲租하고 遷戶故給復者加給一年하며 賜民八十以上物하며 惸獨鰥寡疾病不能自存者米二斛하다 慮囚하다
七月丙寅에 宥周隋名臣及忠烈子孫貞觀以後流配者하다
十一月癸酉에 薛延陀寇邊하니 兵部尚書李世勣爲朔州道行軍總管하고 右衛大將軍李大亮爲靈州道行軍總管하며 涼州都督李襲譽爲涼州道行軍總管하여 以伐之하다
戊辰에 募戍西州者호대 前犯流死亡匿을 聽自首以應募하다
辛未에 徙天下死罪囚實西州하다 中書舍人岑文本爲中書侍郎하여 專典機密하다
甲子에 賜所過六縣高年孤疾氈衾粟帛하고 遂幸慶善宮하다
十七年正月戊辰에 魏徵薨하다 代州都督劉蘭謀反하니 伏誅하다
四月乙酉에 廢皇太子爲庶人하고 漢王元昌과 侯君集等을 伏誅하다
丙戌에 立晉王治爲皇太子하고 大赦하며 賜文武官及五品以上子爲父後者爵一級하고 民八十以上粟帛하며 酺三日하다
己丑에 特進蕭瑀爲太子太保하고 李世勣爲太子詹事하여 同中書門下三品하다
甲午에 以旱避正殿하고 減膳하며 詔京官五品以上言事하다
八月庚戌에 工部尚書張亮爲刑部尚書하여 參豫朝政하다
壬午에 賜酺三日하고 以涼州獲瑞石으로 赦涼州하다
七月甲午에 營州都督張儉率幽營兵及契丹奚以伐高麗하다
八月壬子에 安西都護郭孝恪爲西州道行軍總管하여 以伐焉耆하다
丁卯에 劉洎爲侍中하고 岑文本爲中書令하고 中書侍郎馬周守中書令하다
甲午에 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하고 李世勣馬周爲遼東道行軍大總管하여 率十六總管兵以伐高麗하다
丁巳에 賜所過高年鰥寡粟帛하고 贈比干太師하여 諡忠烈하다
三月壬辰에 長孫無忌攝侍中하고 吏部尚書楊師道攝中書令하다
己未에 薛延陀寇夏州하니 左領軍大將軍執失思力敗之하다
二十年正月辛未에 夏州都督喬師望及薛延陀戰하여 敗之하다
庚辰에 赦幷州하고 起義時編戶給復三年하며 後附者一年하다
十一月己丑에 詔祭祀表疏藩客兵馬宿衛行魚契給驛하고 授五品以上官及除解와 決死罪를 皆以聞하고 餘委皇太子라하다
甲寅
에 하고 賜京師酺三日
하다 慮囚
하여 降死罪以下
하다
三月戊子에 左武衛大將軍牛進達爲青丘道行軍大總管하고 李世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하여 率三總管兵以伐高麗하다
十二月戊寅에 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爲崑丘道行軍大總管하여 率三總管兵以伐龜玆하다
己亥에 中書舍人崔仁師爲中書侍郎하여 參知機務하다
丙午에 左武衛大將軍薛萬徹爲青丘道行軍大總管하여 以伐高麗하다 長孫無忌檢校中書令하여 知尚書門下省事하다
乙卯에 見京城父老하여 勞之하고 蠲今歲半租하며 畿縣三之一하다
三月丁亥에 赦宜君하고 給復縣人自玉華宮苑中遷者三年하다
四月丁巳에 松州蠻叛하니 右武候將軍梁建方敗之하다
六月丙寅에 張行成存問河北從軍者家하여 令州縣爲營農하다
九月庚辰에 崑丘道行軍總管阿史那社爾及薛延陀餘部處月處蜜戰하여 敗之하다
壬寅에 眉邛雅三州獠反하니 茂州都督張士貴討之하다
庚午에 奉大行御馬輿還京師하다 禮部尚書于志寧爲侍中하고 太子少詹事張行成兼侍中하며 高季輔兼中書令하다
上元元年에 改諡文武聖皇帝라하고 天寶八載에 諡文武大聖皇帝라하고 十三載에 增諡文武大聖大廣孝皇帝라하다
湯有天下
에 傳二十八王
하니 而其甚盛者
는 號稱
이라
武王有天下
하여 傳三十六王
하니 而
之治與
之功
이요 其餘無所稱焉
이라
雖詩書所載가 時有闕略이나 然三代千有七百餘年이요 傳七十餘君이나 其卓然著見於後世者는 此六七君而已니
唐有天下하여 傳世二十에 其可稱者三君이나 玄宗憲宗皆不克其終하니 盛哉라 太宗之烈也여
其除隋之亂은 比迹湯武요 致治之美는 庶幾成康하니 自古功德兼隆은 由漢以來未之有也라
至其牽于多愛하고 復立浮圖하며 好大喜功하고 勤兵於遠하여는 此中材庸主之所常爲라
然春秋之法은 常責備於賢者하니 是以後世君子之欲成人之美者는 莫不歎息於斯焉이라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는 휘諱가 세민世民으로, 고조高祖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태목황후太穆皇后 두씨竇氏이니, 출생할 때 순산하였다.
당 고조唐 高祖(《고선군신도상古先君臣圖像》)
4세가 되었을 때 어떤 서생이 고조高祖를 뵙고 “공公은 관상법으로 볼 때 귀한 분이니, 반드시 귀한 아들을 두셨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태종太宗을 보고 나서는 “용과 봉황의 자태를 지니고 하늘의 해(제왕)와 같은 의표儀表가 있으니, 관례할 나이가 되면 반드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입니다.[제세안민濟世安民]”라고 하였다.
서생이 떠난 뒤에 고조가 그의 말이 외부에 알려질까 두려워 사람을 시켜 그를 추격해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의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신기한 일이라 여기고는 그의 말(제세안민濟世安民)을 따라 이름을 세민世民이라 하였다.
대업大業 연간(605~616)에 돌궐突厥이 안문雁門에서 수 양제隋 煬帝를 포위하자,
양제가 포위를 당한 곳에서 나무 끝에 조서詔書를 묶어 분수汾水에 던져 떠내려 보내어 군사를 모아 자신을 구원하러 오게 하였다.
태종太宗이 당시 나이가 열여섯 살로, 가서 구원병에 자원하여
장군將軍 운정흥雲定興의 휘하에 소속되었다.
당 태종唐 太宗(《고선군신도상古先君臣圖像》)
태종이 운정흥에게 말하기를 “적들이 감히 우리 천자를 포위한 것은 구원병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마땅히 전후로 우리 군대를 수십 리에 펼쳐놓아
적들로 하여금 낮에는 깃발을 보게 하고, 밤에는 징소리와 북소리를 듣게 하여
대규모의 구원병이 이르렀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적들을 공격하지 않아도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서 적들이 우리의 허실을 알게 되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운정흥이 태종의 말을 따랐다.
군대가 곽현崞縣에 이르자, 돌궐의 척후 기병이 끊이지 않는 군대의 행렬을 보고
과연 달려가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대규모의 구원병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마침내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고조高祖가 역산비歷山飛를 공격했다가 적들의 포위에 갇혔는데,
태종이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달려가서 고종을 구출해 나와서 마침내 분발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태종太宗은 사람됨이 총명하고 영특하고 용감하여 큰 뜻을 품고 있어서 자신을 낮추고 선비들을 우대하였다.
당시에 천하가 이미 혼란해져 도적이 봉기하자, 태종은 수隋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재산을 털어 선비들을 양성하고, 호걸들과 교유를 맺었다.
장손순덕長孫順德과 유홍기劉弘基 등이 모두 어떤 사건으로 인해 망명하자, 그들을 숨겨주었다.
또 진양령晉陽令 유문정劉文靜과는 더욱 친하여 유문정이 이밀李密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을 때, 태종이 밤에 감옥으로 가서 만나보고는 유문정과 함께 대사大事를 도모하였다.
이때 백성들이 도적을 피하여 대부분 성으로 들어와서 성안에는 수만 명이 있었는데, 유문정이 오랫동안 진양령으로 있었던 터라, 그중에 호걸을 알고 있어서 함께 임무를 안배하였다.
거사의 계획이 정해지자 배적裴寂을 통해 고조高祖에게 알렸는데, 고조가 처음에 허락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허락하였다.
고조高祖가 군대를 일으키고 나서 대장군부大將軍府를 설치하니, 태종太宗이 군대를 이끌고 서하西河를 공격해 취하고, 서하군승西河郡丞 고덕유高德儒를 참수하였다.
그리하여 우령군대도독右領軍大都督에 임명되고, 돈황군공燉煌郡公에 봉해졌다.
당唐나라 군대가 서쪽으로 가서 곽읍霍邑에 다다랐을 때, 때마침 오랫동안 비가 내리고 양식도 바닥이 나자, 고조가 군사를 태원太原으로 되돌리고자 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간언하기를 “의로운 군대는 천하를 위해 일으킨 것이니, 곧장 함양咸陽으로 들어가 천하를 호령해야 합니다.
지금 돌아가서 일개의 성城을 지키면 도적이 될 뿐입니다.”라고 하니, 고조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이 군문軍門에서 곡을 하자, 고조가 놀라서 태종을 불러다 이유를 묻자,
태종이 대답하기를 “돌아가면 앞에서는 군대가 흩어지고, 뒤에서는 적들이 승세를 타고 공격하여 죽음이 눈앞에 닥칠 것이니, 이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깨닫고는 “대사를 일으킨 것은 너이니, 성패도 너에게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좌군左軍이 이미 먼저 출발하여 돌아갔던 터라, 즉시 농서공隴西公 이건성李建成과 길을 나누어 그 뒤를 쫓았는데,
한밤중에 태종이 길을 잃고 산골짜기로 들어가 말을 버리고 걸어서 먼저 출발했던 좌군左軍을 만나 함께 돌아왔다.
고조가 군대를 거느리고 전진하여 날이 밝을 즈음에 곽읍에 이르렀는데, 송노생宋老生이 싸우러 나오지 않자,
태종이 얼마 안 되는 기병을 데리고 성 아래에 이르러 채찍을 들고 지휘하여 포위할 것처럼 하니,
송노생이 격분하여 뛰쳐나와 성을 등지고 진을 쳤다.
고조는 이건성을 이끌고 성 동쪽에 진을 쳤고, 태종과 시소柴紹는 성 남쪽에 진을 쳤다.
송노생의 군대가 동쪽 진영을 들이쳐서 이건성이 말에서 떨어지자, 송노생이 이를 틈타 공격하니 고조의 군대가 퇴각하였다.
태종이 남쪽 언덕에서 질주해서 산비탈을 타고 내려와 군대를 나누어 송노생의 군대를 두 갈래로 분산시키고 나서 그들의 진영 후미로 나오니,
송노생의 군대가 패배하여 달아나 마침내 송노생을 참수하였다.
진군하여 경양涇陽에 이르러 호적胡賊 유요자劉鹞子를 격파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장안長安을 공격할 때에 태종이 금성방金城坊에 주둔하여 서북쪽을 공격하여 마침내 승리하였다.
의녕義寧 원년(617)에 태종을 광록대부光祿大夫 당국내사唐國內史에 임명하고, 새로 진국공秦國公에 봉하니, 식읍食邑이 만호萬戶였다.
설거薛舉가 부풍扶風을 공격하자, 태종이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만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마침내 땅을 공략하여 농우隴右에 이르렀다.
의녕 2년(618)에 태종을 우원수右元帥에 임명하고, 새로 조국공趙國公에 봉하였다.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동도東都(낙양洛陽)를 공격하여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삼왕릉三王陵 부근 세 곳에 군대를 매복시켜 수隋나라 장수 단달段達의 군대 만 명을 패퇴시켰다.
무덕武德 원년(618)에 태종太宗을 상서령尚書令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에 임명하고 높여 진왕秦王에 봉하였다.
설거薛舉가 경주涇州를 침략하자, 태종이 서토원수西討元帥에 임명되었다가 옹주목雍州牧으로 승진하였다.
7월에 태종이 병에 걸리자, 여러 장수들이 설거薛舉에게 패배하였다.
8월에 태종의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고척성高墌城에 주둔하여 60여 일 동안 대치하다가 이윽고 설거가 죽자,
그의 아들 설인고薛仁杲가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를 치르고자 하였는데 태종은 군대를 안정시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설인고의 군량이 바닥이 나서 차츰 배반하는 군사들이 나오자
태종이 “이제 출전出戰을 해도 되겠다.”라고 하고 행군총관行軍總管 양실梁實을 보내어 천수원淺水原에 목책木柵을 세워 군영軍營을 만들게 하였다.
설인고의 장수 종라후宗羅睺가 양실을 공격하자, 태종이 장군將軍 방옥龐玉을 보내어 양실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방옥의 군대가 거의 패배하였다.
태종이 군대를 이끌고 적군의 배후를 치니 종라후가 패배하여 달아났는데, 태종이 추격하여 성 아래까지 이르자, 설인고가 그제야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군사들이 돌아오자, 고조高祖가 이밀李密을 보내어 급히 역말을 타고 빈주豳州로 가서 군대를 위문하게 하였는데,
이밀이 태종을 보고는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물러나서 감탄하기를 “참으로 훌륭한 군주이다.”라고 하였다.
태묘太廟에 승전을 고하고는 태종을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將軍 태위太尉 사지절使持節 섬동도대행대상서령陝東道大行臺尚書令에 제수하였고, 조서詔書를 내려 포주蒲州, 섬주陝州, 하북河北 지역 여러 총관總管의 군대에게 모두 태종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무덕武德 2년(619) 정월에 태종太宗을 장춘궁長春宮에 진수鎭守하게 하고 좌무후대장군左武候大將軍 양주총관涼州總管으로 진배進拜하였다.
이때에 유무주劉武周는 병주幷州를 점거하였고, 송금강宋金剛은 회주澮州를 함락하였으며, 왕행본王行本은 포주蒲州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하현夏縣 사람 여숭무呂崇茂가 현령을 죽이고 유무주와 호응을 하니, 고조高祖가 두려워하여 조서를 내려 제장諸將들에게 하동河東을 버리고 관중關中을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하동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고서 3만의 병력을 얻어 적을 격파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고조가 관중의 병사들을 모두 징발하여 병력을 보태주었다.
11월에 용문관龍門關을 나가서 백벽柏壁에 주둔하였다.
무덕武德 3년(620) 4월에 백벽柏壁에서 송금강宋金剛을 공격하여 물리쳤는데,
송금강이 개주介州로 달아나자 태종太宗이 추격하여 하루 밤낮에 2백 리를 달려서 작서곡雀鼠谷의 서쪽 언덕에서 야영을 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굶주리고 태종도 이틀 동안 밥을 먹지 못하였다.
행군하여 호주浩州에 이르러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송금강의 장수 위지경덕尉遲敬德과 심상尋相 등이 모두 와서 항복하였다.
유무주劉武周가 두려워하여 돌궐突厥로 달아나니, 그의 장수 양복념楊伏念이 병주幷州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고조高祖가 소우蕭瑀를 보내어 군중에 나아가게 하여 태종을 익주도행대상서령益州道行臺尚書令에 제수하였다.
7월에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여 북망北邙에서 물리쳤다.
무덕武德 4년(621) 2월에 두건덕竇建德이 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왕세충王世充을 구원하였는데, 태종이 호뢰虎牢에서 두건덕을 물리치고 사로잡으니, 왕세충이 그제야 항복하였다.
6월에 개선할 적에, 태종은 황금갑옷을 걸치고 철기병鐵騎兵 1만과 갑병甲兵 3만을 배치하고 전후로 군악대를 두었으며, 태묘太廟에 포로를 바쳤다.
고조高祖가 태종의 공이 높아 옛 관직으로는 그 공을 칭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천책상장天策上將의 호칭을 더해주고
사도司徒 섬동도대행대상서령陝東道大行臺尚書令을 겸하게 하고 그 지위를 왕공王公의 위에 두었으며,
읍호邑戶를 더해주어 3만에 이르렀고, 곤면袞冕의 의복, 금수레, 쌍옥, 황금 6천 근, 전후로 구부악九部樂을 연주하는 악대와 호피虎皮로 장식한 검을 든 의장대 40인을 하사하였다.
무덕武德 5년(622) 정월에 명주洺州에서 유흑달劉黑闥을 토벌하여 물리쳤다.
유흑달이 항복하고 나서 이윽고 다시 배반하니,
고조高祖가 진노하여 태자 이건성李建成에게 명을 내려 산동山東의 15세 이상 사내를 잡아 와 모두 산 채로 묻어버리고,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핍박해 데리고 와서 관중關中 지역을 채우게 하자,
태종이 절실히 간언하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 이윽고 그만두었다.
태종에게 좌우左右 십이위十二衛의 대장군大將軍의 직책을 더하였다.
무덕武德 7년(624)에 돌궐突厥이 변경을 침략하자, 태종太宗이 돌궐과 빈주豳州에서 만났는데 기병 100기만을 데리고 가서 돌궐의 가한可汗과 담판을 지으니, 마침내 맹약을 맺고 돌아갔다.
무덕武德 8년(625)에 태종太宗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시켰다.
애초에 고조高祖가 태원太原에서 거병을 한 것은 본래 그의 뜻이 아니라, 그 일이 태종에게서 나온 것이다.
천하를 차지함에 이르러 송금강宋金剛,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 등을 물리쳐서 태종의 공로가 더욱 높아지자, 고조가 누차 태종을 태자로 삼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태자 이건성李建成은 폐위될까 두려워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과 태종을 해치려고 도모하였으나, 아직 결행하지는 않고 있었다.
무덕武德 9년(626) 6월에 태종太宗이 병력을 이끌고 현무문玄武門으로 들어가 태자太子 이건성李建成과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을 살해하니, 고조高祖가 크게 놀라 마침내 태종을 황태자皇太子로 삼았다.
8월 갑자일甲子日에 태종이 동궁東宮 현덕전顯德殿에서 황제위皇帝位에 오르고 배적裴寂을 보내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고하게 하였다.
크게 사면령을 내려 무덕武德 연간에 유배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였고,
문무관文武官에게 훈작勳爵을 내려주었으며, 관내關內 및 포주蒲州, 예주芮州, 우주虞州, 태주泰州, 섬주陝州, 정주鼎州 6개 지역의 2년간 조세를 면제해주었고, 천하의 백성들에게 1년간의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백성 중에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 100세 이상인 자에게는 명예관직名譽官職을 더해주었으며, 동관潼關 동쪽으로 황하黃河에 가까운 여러 관문을 폐쇄하였다.
계유일癸酉日에 궁녀宮女 3천여 명을 궁에서 내보냈다.
병자일丙子日에 비妃인 장손씨長孫氏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았다.
계미일癸未日에 돌궐突厥이 편교便橋를 침략하였다.
을유일乙酉日에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과 편교便橋에서 맹약을 맺었다.
9월 임자일壬子日에 사가私家에서 모시는 요망한 신과 부정한 제사, 점치는 일 중에 귀갑龜甲, 시초蓍草, 오조五兆(점법의 일종) 이외의 것을 금지시켰다.
10월 초하루 병진일丙辰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계해일癸亥日에 중산군왕中山郡王 이승건李承乾을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았다.
경진일庚辰日에 소우蕭瑀와 진숙달陳叔達을 파직하였다.
11월 경인일庚寅日에 종실宗室의 군왕郡王 중에 공이 없는 자들은 작위를 현공縣公으로 강등시켰다.
12월 계유일癸酉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이해에 아들 장사군왕長沙郡王 이각李恪을 높여 한왕漢王에 봉하고, 의양군왕宜陽郡王 이우李祐를 초왕楚王에 봉하였다.
정관貞觀 원년(627) 정월 을유일乙酉日에 연호를 바꾸었다.
신축일辛丑日에 연군왕燕郡王 이예李藝가 경주涇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복주伏誅하였다.
2월 정사일丁巳日에 조서를 내려 20세 이상 남자와 15세 이상 여자 중에 혼인을 하지 않은 자는 주현州縣에서 예법대로 시집과 장가를 보내도록 하고,
빈궁하여 직접 행할 수 없는 사람은 향리의 부자와 친척들이 재물을 보태서 보내도록 하며,
60세 이상 홀아비와 50세 이상 과부 및 자식을 둔 부인이 수절하려고 하면 강요하지 말게 하였다.
3월 계사일癸巳日에 황후皇后가 친히 양잠養蠶을 하였다.
병오일丙午日에 북제北齊의 복야僕射 최계서崔季舒, 황문시랑黃門侍郎 곽준郭遵, 상서우승尚書右丞 봉효염封孝琰이 극력하게 직언을 하다가 난리를 겪었는데,
최계서의 아들 최강崔剛과 곽준의 아들 곽운郭雲과 봉효염의 아들 봉군준封君遵이 모두 연좌되어 음형陰刑을 받았으니, 마땅히 내시內侍의 직무를 면제해주고 관직을 내려 포상하게 하였다.
윤3월 초하루 계축일癸丑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4월 계사일癸巳日에 양주도독涼州都督 장악군왕長樂郡王 이유량李幼良이 죄를 지어 복주伏誅하였다.
5월 계축일癸丑日에 조서를 내려 중서령中書令과 시중侍中이 조정에서 소장訴狀을 받은 것 중에 황제에게 아뢸 일이 있는 것은 모두 밀봉하여 올리게 하였다.
갑진일甲辰日에 태자소사太子少師 소우蕭瑀를 상서좌복사尚書左僕射에 임명하였다.
이해 여름에 산동山東에 가뭄이 들자 그해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7월 임자일壬子日에 이부상서吏部尚書 장손무기長孫無忌를 상서우복사尚書右僕射로 삼았다.
8월에 하남河南과 농우隴右의 변방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 우문사급宇文士及을 검교량주도독檢校涼州都督으로 삼았다.
무술일戊戌日에 고사렴高士廉을 좌천시켜 안주대도독安州大都督으로 삼았다.
9월 초하루 경술일庚戌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신유일辛酉日에 여러 주州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피해를 입은 전지田地를 살피고, 하급 민호民戶를 구제해주고 위문하게 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 두엄杜淹을 검교이부상서檢校吏部尚書로 삼아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신미일辛未日에 유주도독幽州都督 왕군곽王君廓이 돌궐突厥로 달아났다.
10월 정유일丁酉日에 흉년이 들자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다.
11월 기미일己未日에 19세 이하의 자제子弟는 부형父兄의 임소任所에 따라가는 것을 윤허하였다.
무신일戊申日에 이주도독利州都督 이효상李孝常과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유덕유劉德裕가 반란을 도모하자 복주伏誅하였다.
정관貞觀 2년(628) 정월 신해일辛亥日에 장손무기長孫無忌를 파직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尚書 두여회杜如晦를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임명하여 동궁東宮의 군사에 관한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계축일癸丑日에 토욕혼吐谷渾이 민주岷州를 침략하자, 도독都督 이도언李道彥이 그들을 물리쳤다.
정사일丁巳日에 새로 이각李恪을 촉왕蜀王에 봉하고, 이태李泰를 월왕越王에 봉하고, 이우李祐를 연왕燕王에 봉하였다.
경오일庚午日에 형부상서刑部尚書 이정李靖을 검교중서령檢校中書令으로 삼았다.
2월 무술일戊戌日에 지방관 중에 고과 성적이 상上인 자에게 녹봉을 더해주었다.
3월 초하루 무신일戊申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자일壬子日에 중서문하中書門下의 5품 이상 관원 및 상서尚書에게 명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의결하게 하였다.
임술일壬戌日에 이정李靖을 관내도행군대총관關內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설연타薛延陀를 방비하게 하였다.
기사일己巳日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관내關內를 순시하여 금과 보물을 써서 굶주린 백성이 내다 판 자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경오일庚午日에 가뭄과 해충이 발생하자 자책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4월 기묘일己卯日에 방치된 수隋나라 사람의 시신을 묻어주게 하였다.
임인일壬寅日에 삭방朔方 사람 양낙인梁洛仁이 양사도梁師都를 죽인 뒤에 투항하였다.
6월 갑신일甲申日에 조서를 내려 사자使者로 나간 관원에게는 관청에서 그 집에 식량을 대어주게 하였다.
경인일庚寅日에 아들 이치李治가 태어났으므로, 이날에 자식을 낳은 자들에게는 곡식을 하사하였다.
신묘일辛卯日에 진주자사辰州刺史 배건통裴虔通이 수 양제隋 煬帝를 시해하였다는 이유로 삭탈관직하고 환주驩州로 유배를 보냈다.
7월 무신일戊申日에 내주자사萊州刺史 우방유牛方裕, 강주자사絳州刺史 설세량薛世良, 광주장사廣州長史 당봉의唐奉義, 호아낭장虎牙郎將 고원례高元禮를 우문화급宇文化及의 도당이라 하여 모두 제명除名하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8월 갑술일甲戌日에 조정에서 원통한 옥사獄事가 없는지 살피게 하였다.
신축일辛丑日에 이왕후二王後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제후국에 걸맞는 관원을 두게 하였다.
9월 임자일壬子日에 풍년이 든 것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다.
무자일戊子日에 영주자사瀛州刺史 노조상盧祖尚을 죽였다.
11월 신유일辛酉日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12월 임진일壬辰日에 황문시랑黃門侍郎 왕규王珪를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다.
계사일癸巳日에 5품 이상 관원이 저자를 지나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정관貞觀 3년(629) 정월 병오일丙午日에 가뭄으로 인해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였다.
계축일癸丑日에 관리들 중 고과 점수가 상하上下를 받은 자에게 1년의 녹봉을 더 주었다.
2월 무인일戊寅日에 방현령房玄齡을 상서좌복사尚書左僕射로, 두여회杜如晦를 우복야右僕射로, 상서우승尚書右丞 위징魏徵을 비서감秘書監으로 삼아 조정의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하였다.
3월 기유일己酉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4월 을해일乙亥日에 태상황太上皇이 대안궁大安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갑오일甲午日에 처음으로 태극전太極殿에 나아갔다.
무술일戊戌日에 효의孝義가 있는 집안에 곡식 5곡斛을 하사하고, 80세 이상인 노인에게 곡식 2곡을 하사하고, 9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곡식 3곡을 하사하고, 10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비단 2필을 더 주고, 정월 이래로 자식을 낳은 부인에게는 곡식 1곡을 하사하였다.
5월 을축일乙丑日에 주왕周王 이원방李元方이 죽었다.
6월 무인일戊寅日에 가뭄으로 인해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기묘일己卯日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임오일壬午日에 조서를 내려 문무백관에게 정사政事에 대해 진언을 하게 하였다.
8월 초하루 기사일己巳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정해일丁亥日에 이정李靖을 정양도행군대총관定襄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돌궐突厥을 정벌하게 하였다.
9월 정사일丁巳日에 화주자사華州刺史 시소柴紹를 승주도행군총관勝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돌궐突厥을 정벌하게 하였다.
11월 경신일庚申日에 병주도독幷州都督 이세적李世勣을 통막도행군총관通漠道行軍總管으로, 화주자사華州刺史 시소柴紹를 금하도행군총관金河道行軍總管으로, 임성군왕任城郡王 이도종李道宗을 대동도행군총관大同道行軍總管으로, 유주도독幽州都督 위효절衛孝節을 항안도행군총관恒安道行軍總管으로, 영주도독營州都督 설만숙薛萬淑을 창무도행군총관暢武道行軍總管으로 삼아 돌궐突厥을 정벌하게 하였다.
12월 계미일癸未日에 두여회杜如晦를 파직시켰다.
윤12월 계축일癸丑日에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절을 세워주었다.
신유일辛酉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이해에 중국 사람으로 변경 밖에 있다가 돌아온 사람과 사이四夷 지역을 개척하여 주현州縣으로 삼은 곳의 사람이 120여만 명이었다.
정관貞觀 4년(630) 정월 초하루 정묘일丁卯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계사일癸巳日에 무덕전武德殿 북원北院에 화재가 났다.
갑진일甲辰日에 이정李靖이 음산陰山에서 돌궐突厥과 전투를 벌여 물리쳤다.
갑인일甲寅日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5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온언박溫彥博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왕규王珪를 시중侍中으로, 민부상서民部尚書 대주戴冑를 검교이부상서檢校吏部尚書로 삼아 조정의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하고, 태상경太常卿 소우蕭瑀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아 재상宰相들과 함께 조정의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의논하도록 하였다.
정사일丁巳日에 가뭄으로 인해 조서를 내려 공경公卿들에게 정사政事에 대해 진언을 하게 하였다.
3월 갑오일甲午日에 이정李靖이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포로로 잡아서 바쳤다.
4월 무술일戊戌日에 서북西北 지역의 군장君長들이 황제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천가한天可汗’이라 부르기를 요청하였다.
6월 을묘일乙卯日에 군졸을 징발하여 낙양궁洛陽宮을 수리하였다.
7월 초하루 갑자일甲子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갑술일甲戌日에 태상황太上皇(고조高祖)이 병이 나서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다.
신묘일辛卯日에 병이 차도를 보이자 도독都督, 자사刺史, 문무관文武官과 백성들 중 80세 이상의 노인 및 집 앞에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표창한 효자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8월 갑인일甲寅日에 이정李靖을 상서우복사尚書右僕射로 삼았다.
9월 경오일庚午日에 장성長城 남쪽에 방치된 수隋나라 사람들의 시신을 묻어주게 하였다.
임오일壬午日에 옛날의 명군明君, 현신賢臣, 열사烈士의 묘소에서 풀을 베거나 방목하는 일을 금지시켰다.
10월 임진일壬辰日에 기주岐州, 농주隴州 두 지역에 사면령을 내리고, 이해의 조세를 면제해주었으며, 함양咸陽, 시평始平, 무공武功 지역에 사형수 이하 죄인을 감형해주었다.
신축일辛丑日에 귀천곡貴泉谷에서 사냥을 하였다.
갑진일甲辰日에 어룡천魚龍川에서 사냥을 하여 잡은 짐승을 대안궁大安宮에 바쳤다.
을묘일乙卯日에 무공 지역의 이해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11월 임술일壬戌日에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후군집侯君集을 병부상서兵部尚書로 삼아 조정의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논의하도록 하였다.
무인일戊寅日에 채찍으로 죄인의 등을 때리는 형벌을 없앴다.
12월 갑진일甲辰日에 녹원鹿苑에서 사냥을 하였다.
이해에 천하에서 사형수로 판결 받은 사람이 29명이었다.
정관貞觀 5년(631) 정월 계유일癸酉日에 곤명지昆明池에서 사냥을 하였다.
병자일丙子日에 곤명지에서 돌아와 잡은 짐승을 대안궁大安宮에 바쳤다.
2월 기유일己酉日에 아우 이원유李元裕를 봉하여 회왕鄶王으로, 이원명李元名을 초왕譙王으로, 이영기李靈夔를 위왕魏王으로, 이원상李元祥을 허왕許王으로, 이원효李元曉를 밀왕密王으로 삼았다.
경술일庚戌日에 아들 이음李愔을 봉하여 양왕梁王으로, 이정李貞을 한왕漢王으로, 이운李惲을 담왕郯王으로, 이치李治를 진왕晉王으로, 이신李愼을 신왕申王으로, 이효李囂를 강왕江王으로, 이간李簡을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5월 을축일乙丑日에 수隋나라 때 돌궐突厥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을 금과 비단으로 값을 치르고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8월 갑진일甲辰日에 고구려高句麗에 사신을 보내어 전사한 수隋나라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무신일戊申日에 대리승大理丞 장온고張蘊古를 죽였다.
11월 병자일丙子日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12월 정해일丁亥日에 조서를 내려, 사형수를 판결할 때 경사京師에서는 다섯 차례 심리를 거쳐 조정에 아뢰고 제주諸州에서는 세 차례 심리를 거쳐 조정에 아뢰며, 그날 상식尚食(음식 담당하는 관리)은 술과 고기를 올리지 말게 하였다.
계묘일癸卯日에 여산驪山에서 사냥을 하고 신풍新豐의 고령자에게 비단을 하사하였다.
정관貞觀 6년(632) 정월 초하루 을묘일乙卯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계유일癸酉日에 정주靜州의 산료山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이자화李子和가 물리쳤다.
정축일丁丑日에 옹주雍州, 기주岐州, 빈주豳州 세 지역의 사형수 이하의 죄인을 감형해주고, 80세 이상의 백성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5월에 위징魏徵을 검교시중檢校侍中으로 삼았다.
6월 기해일己亥日에 풍왕酆王 이원형李元亨이 죽었다.
7월 기사일己巳日에 조서를 내려 천하에서 향음주례鄉飲酒禮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9월 기유일己酉日에 경선궁慶善宮에 행차하였다.
10월에 후군집侯君集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았는데 복직시켰다.
12월 신미일辛未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펴 사형수를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이해에 제강諸羌에서 중원中原으로 귀속된 사람이 30만 명이었다.
정관貞觀 7년(633) 정월 무자일戊子日에 우문화급宇文化及 도당의 자손들을 축출하고 관원으로 등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신축일辛丑日에 경성京城의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다.
경인일庚寅日에 위징魏徵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8월 신미일辛未日에 동동東洞과 서동西洞의 요獠가 변경을 침략하자,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장사귀張士貴를 공주도행군총관龔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서 토벌하게 하였다.
9월에 석방하였던 죄수들이 돌아오자, 모두 사면해주었다.
10월 경신일庚申日에 구성궁九成宮에서 돌아왔다.
11월 임진일壬辰日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장손무기長孫無忌를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12월 갑인일甲寅日에 부용원芙蓉園에 행차하였다.
병진일丙辰日에 소릉원少陵原에서 사냥을 하였다.
정관貞觀 8년(634) 정월 신축일辛丑日에 장사귀張士貴가 요獠와 전투하여 패비시켰다.
임인일壬寅日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천하를 살피게 하였다.
2월 을사일乙巳日에 황태자皇太子의 관례冠禮를 치렀다.
병오일丙午日에 사형수 이하 죄인을 감형해주고, 5품 이상의 관원의 경우에 집안의 대를 계승하는 아들에게 작爵 1급을 내려주었으며,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다.
5월 초하루 신미일辛未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이해 여름에 토욕혼吐谷渾이 양주涼州를 침략하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단지현段志玄을 서해도행군총관西海道行軍總管으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번흥樊興을 적수도행군총관赤水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8월 갑자일甲子日에 허수虛宿와 위수危宿에서 혜성이 출현하였다.
기축일己丑日에 토욕혼이 양주를 침략하여 사신 홍로승鴻臚丞 조덕해趙德楷를 잡아갔다.
12월 신축일辛丑日에 특진特進 이정李靖을 서해도행군대총관西海道行軍大總管으로, 후군집侯君集을 적석도행군총관積石道行軍總管으로, 임성군왕任城郡王 이도종李道宗을 선선도행군총관鄯善道行軍總管으로, 교동군공膠東郡公 이도언李道彥을 적수도행군총관赤水道行軍總管으로, 양주도독涼州都督 이대량李大亮을 차말도행군총관且末道行軍總管으로, 이주자사利州刺史 고증생高甑生을 염택도행군총관鹽澤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욕혼을 정벌하였다.
정묘일丁卯日에 태상황太上皇을 모시고 성 서쪽에서 열병식閱兵式을 하였다.
정관貞觀 9년(635) 정월에 당항강黨項羌(탕구트)이 반란을 일으켰다.
3월 경진일庚辰日에 조주강洮州羌(조주洮州의 강족羌族)이 자사刺史인 공장수孔長秀를 죽이고 토욕혼吐谷渾으로 귀속하였다.
을유일乙酉日에 고증생高甑生이 강인羌人과 전투하여 물리쳤다.
윤4월 초하루 병인일丙寅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5월에 장손무기長孫無忌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았는데 복직시켰다.
경자일庚子日에 태상황太上皇이 서거하자, 황태자皇太子에게 정무政務를 대리하게 하였다.
임자일壬子日에 이정李靖이 토욕혼과 전투하여 물리쳤다.
7월 경자일庚子日에 염택도행군부총관鹽澤道行軍副總管 유덕민劉德敏이 강인羌人과 전투하여 물리쳤다.
10월 경인일庚寅日에 태무황제太武皇帝(당 고조唐 髙祖의 초시初諡)를 헌릉獻陵에 안장安葬하였다.
11월 임술일壬戌日에 특진特進 소우蕭瑀를 조정의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하였다.
정관貞觀 10년(636) 정월 갑오일甲午日에 정무政務에 복귀하였다.
계축일癸丑日에 다시 봉하여 이원경李元景을 ##형왕荊王으로, 이원창李元昌을 한왕漢王으로, 이원례李元禮를 서왕徐王으로, 이원가李元嘉를 한왕韓王으로, 이원칙李元則을 팽왕彭王으로, 이원의李元懿를 정왕鄭王으로, 이원궤李元軌를 곽왕霍王으로, 이원봉李元鳳을 괵왕虢王으로, 이원경李元慶을 도왕道王으로, 이영기李靈夔를 연왕燕王으로, 이각李恪을 오왕吳王으로, 이태李泰를 위왕魏王으로, 이우李祐를 ##제왕齊王으로, 이음李愔을 촉왕蜀王으로, 이운李惲을 장왕蔣王으로, 이정李貞을 월왕越王으로, 이신李愼을 기왕紀王으로 삼았다.
3월 계축일癸丑日에 제왕諸王들을 내보내어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6월 임신일壬申日에 온언박溫彥博을 상서우복사尚書右僕射로 삼고 태상경太常卿 양사도楊師道를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위징魏徵을 파직시켜 특진特進으로 삼아 문하성門下省의 일을 맡아 국가의 전장典章과 제도를 논의하는 데 참여하도록 하였다.
11월 경인일庚寅日에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소릉昭陵에 안장安葬하였다.
경진일庚辰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정관貞觀 11년(637) 정월 정해일丁亥日에 다시 봉하여 이원유李元裕를 등왕鄧王으로 삼고, 이원명李元名을 서왕舒王으로 삼았다.
을묘일乙卯日에 옹주雍州의 이해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2월 정사일丁巳日에 구종산九嵏山에서 공사를 하여 능陵을 만들어 공신과 황실 인척들에게 배장陪葬할 무덤과 상례 때 사용할 관을 하사하였다.
을축일乙丑日에 100세 이상의 백성들에게는 옆에서 돌볼 사람 5인을 주었다.
임오일壬午日에 녹대령鹿臺嶺에서 사냥을 하였다.
3월 초하루 병술일丙戌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계묘일癸卯日에 낙주洛州의 죄수 중에 도형徒刑으로 복역하고 있는 자들을 감형해주고, 백성들에게 1년의 조세租稅와 조세調稅를 면제해주었다.
신해일辛亥日에 광성택廣成澤에서 사냥을 하였다.
기미일己未日에 제왕諸王들에게 대대로 자사刺史의 직임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무신일戊辰日에 공신들에게 대대로 자사의 직임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기사일己巳日에 이원상李元祥을 다시 봉하여 강왕江王으로 삼았다.
7월 계미일癸未日에 폭우가 내려 홍수가 나서 곡수穀水와 낙수洛水가 범람하였다.
을미일乙未日에 조서를 내려 백관百官들에게 정사政事에 대해 진언을 하게 하였다.
임인일壬寅日에 명덕궁明德宮의 현포원玄圃院을 없애어 수해를 입은 가호家戶에 하사하였다.
병오일丙午日에 박주亳州의 노자묘老子廟와 연주兗州의 공자묘孔子廟에 각각 20호戶의 조세를 제향祭享하는 비용으로 내리고, 다시 양무소왕涼武昭王 묘지 부근의 20호戶에 부역을 면제하여 능묘陵墓를 지키게 하였다.
9월 정해일丁亥日에 황하黃河가 범람하여 섬주陝州 하북현河北縣을 파괴하고 하양河陽의 중단中潬을 허물어뜨리자, 태종이 친히 백사마판白司馬坂에 행차하여 살펴보고는 황하黃河 인근에 수해를 입은 가호家戶에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10월 계축일癸丑日에 선조先朝의 모신謀臣과 무장武將 및 죽은 친척親戚들에게 헌릉獻陵에 배장陪葬할 무덤을 하사하였다.
을미일乙未日에 제원濟源의 맥산麥山에서 사냥을 하였다.
정관貞觀 12년(638) 정월 을미일乙未日에 총주叢州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2월 계해일癸亥日에 하북현河北縣에 가서 저주底柱를 구경하였다.
갑자일甲子日에 무주巫州의 요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기주도독夔州都督 제선행齊善行이 물리쳤다.
갑술일甲戌日에 장춘궁長春宮에 가서 제읍朝邑의 이해 조세를 면제해주고, 갇힌 죄수들을 감형해주었다.
을해일乙亥日에 황하黃河 부근에서 사냥을 하였다.
윤2월 초하루 경진일庚辰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7월 계유일癸酉日에 이부상서吏部尚書 고사렴高士廉을 상서우복사尚書右僕射로 삼았다.
8월 임인일壬寅日에 토번吐蕃이 송주松州를 침략하자, 후군집侯君集을 당미도행군대총관當彌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3총관總管의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다.
9월 신해일辛亥日에 활수도행군총관闊水道行軍總管 우진달牛進達이 토번吐蕃과 송주松州에서 전투하여 물리쳤다.
10월 기묘일己卯日에 시평始平에서 사냥을 하면서 고령자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을미일乙未日에 시평에서 돌아왔다. 균주鈞州의 산료山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계주도독桂州都督 장보덕張寶德이 물리쳤다.
11월 기사일己巳日에 명주明州의 산료山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교주도독交州都督 이도언李道彥이 물리쳤다.
12월 신사일辛巳日에 벽주壁州의 산료山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상관회인上官懷仁이 토벌하였다.
이해에 저주滁州, 호주豪州 두 지역에서 산누에가 고치가 되었다.
정관貞觀 13년(639) 정월 을사일乙巳日에 헌릉獻陵을 참배하고, 삼원현三原縣의 범죄자와 수행한 인원 중의 범죄자를 사면해주고, 삼원현의 이해 조세를 면제해주었으며, 능陵을 지키는 고을의 낭장郎將과 삼원현령三原縣令에게는 작爵 1급을 내려주었다.
2월 경자일庚子日에 대대로 자사刺史를 세습하게 한 명을 거두었다.
3월 을축일乙丑日에 필수畢宿와 묘수昴宿에서 혜성이 출현하였다.
갑신일甲申日에 중낭장中郎將 아사나결사솔阿史那結社率이 반란을 일으키자 복주伏誅하였다.
5월 갑인일甲寅日에 가뭄으로 인해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조서를 내려 5품 이상의 관원에게 정사政事에 대해 진언을 하게 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으며, 백성들의 요역을 멈추고, 죄수들을 심리하며, 빈곤한 사람들을 구제하니, 그제야 비가 내렸다.
6월 병신일丙申日에 아우 이원영李元嬰을 봉하여 등왕滕王으로 삼았다.
8월 초하루 신미일辛未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10월 갑신일甲申日에 구성궁九成宮에서 돌아왔다.
11월 신해일辛亥日에 양사도楊師道를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았다.
무신일戊辰日에 상서좌승尚書左丞 유계劉洎를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삼아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주관하도록 하였다.
12월 임신일壬申日에 후군집侯君集을 교하도행군대총관交河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고창高昌을 토벌하였다.
을해일乙亥日에 아들 이복李福을 봉하여 조왕趙王으로 삼았다.
정관貞觀 14년(640) 정월 경자일庚子日에 유사有司에게 시령時令(월령月令)을 읽게 하였다.
갑인일甲寅日 위왕魏王 이태李泰의 사저에 행차하여 옹주雍州 장안현長安縣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연강리延康里의 이해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2월 정축일丁丑日에 국학國學에서 석전釋奠을 관람하고, 대리시大理寺와 만년현萬年縣에 있는 죄수를 사면해주었으며, 학관學官과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비단을 하사하였다.
을미일乙未日에 양梁나라의 황간皇偘‧저중도褚仲都, 북주北周의 웅안생熊安生‧침중沈重, 진陳나라의 심문아沈文阿‧주홍정周弘正‧장기張譏, 수隋나라의 하타何妥‧유작劉焯‧유현劉炫의 후손을 수소문하게 하였다.
3월에 나주羅州와 두주竇州 두 지역의 요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광주총관廣州總管 당인홍党仁弘이 물리쳤다.
5월 임인일壬寅日에 이영기李靈夔를 다시 봉하여 노왕魯王으로 삼았다.
을유일乙酉日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8월 경오일庚午日에 양성궁襄城宮을 건립하였다.
계유일癸酉日에 후군집侯君集이 고창高昌을 정벌하였다.
9월 계묘일癸卯日에 고창 지역의 사람과, 고창 정벌에 참여했던 사졸과 부자父子 관계인 자로 사형을 받은 경우,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친척 관계인 자로 유형流刑을 받은 경우,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친척 관계인 자로 도형徒刑을 받은 경우, 소공복小功服이나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친척 관계인 자로 장형杖刑을 받은 경우 모두 관대하게 사면하게 하였다.
11월 갑자일甲子日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12월 정유일丁酉日에 후군집侯君集이 고창왕高昌王을 사로잡아 바치자,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다.
정관貞觀 15년(641) 정월 신사일辛巳日에 낙양궁洛陽宮에 가서 온천에 머물렀다. 위사衛士 최경崔卿과 조문의刁文懿가 반란을 일으키자 복주伏誅하였다.
4월 신묘일辛卯日에 조서를 내려 다음 해 2월에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하게 하였다.
을미일乙未日에 낙주洛州의 이해 조세를 면제해주고, 원래 살던 곳에서 이주하여 요역을 면제받은 자들에게 1년 동안의 요역을 더 면제해주었으며, 80세 이상의 백성들에게는 재물을 하사하고, 의탁할 곳이 없는 자와 독거노인과 홀아비와 과부와 병들어 혼자 살아가기 힘든 자들에게는 쌀 2곡을 하사하였다.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6월 기유일己酉日에 태미성太微星 자리에서 혜성이 나타났다.
병진일丙辰日에 태산泰山에서 봉선하는 일을 정지하고,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였으며,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다.
7월 병인일丙寅日에 북주北周와 수隋나라의 명신名臣과 충신열사의 자손으로서 정관貞觀 연간 이후로 유배된 사람을 용서하여 풀어주었다.
10월 신묘일辛卯日에 이궐伊闕에서 사냥을 하였다.
11월 계유일癸酉日에 설연타薛延陀가 변경을 침략하자, 병부상서兵部尚書 이세적李世勣을 삭주도행군총관朔州道行軍總管으로,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이대량李大亮을 영주도행군총관靈州道行軍總管으로, 양주도독涼州都督 이습예李襲譽를 양주도행군총관涼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하였다.
12월 무자일戊子日에 낙양궁洛陽宮에서 돌아왔다.
경자일庚子日에 명을 내려 3품 이상 관원의 적자嫡子는 태자太子를 시봉하도록 하였다.
신축일辛丑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갑진일甲辰日에 이세적李世勣이 설연타薛延陀와 낙진수諾真水에서 전투하여 물리쳤다.
을사일乙巳日에 전사한 장사將士를 추증하여 훈관勳官 3급을 내려주었다.
정관貞觀 16년(642) 정월 을축일乙丑日에 서주西州를 안정시킬 사자使者를 파견하였다.
무신일戊辰日에 서주西州를 지킬 병사들을 모집하면서 이전에 유배형이나 사형 죄를 짓고 달아나 숨어 살던 자들이 자수하여 응모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신미일辛未日에 감옥에 수감된 천하의 사형수들을 옮겨 서주西州에 충원하였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잠문본岑文本을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삼아 기밀機密에 관한 일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6월 무술일戊戌日에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출현하였다.
7월 무오일戊午日에 장손무기長孫無忌를 사도司徒로 삼고 방현령房玄齡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11월 병진일丙辰日에 무공武功에서 사냥을 하였다.
임술일壬戌日에 기산岐山의 남쪽에서 사냥을 하였다.
갑자일甲子日에 거쳐 가는 여섯 현縣의 의탁할 데 없고 병이 든 고령자에게 털 이불과 침구,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는 이윽고 경선궁慶善宮에 행차하였다.
정관貞觀 17년(643) 정월 무신일戊辰日에 위징魏徵이 죽었다. 대주도독代州都督 유난劉蘭이 반란을 일으키자 복주伏誅하였다.
2월 기해일己亥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무신일戊申日에 능연각凌煙閣에 공신들의 화상畵像을 그리게 하였다.
3월 임자일壬子日에 상례喪禮와 장례葬禮에 관련된 법령과 법규를 어기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병진일丙辰日에 제왕齊王 이우李祐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세적李世勣이 토벌하였다.
갑자일甲子日에 가뭄으로 인해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죄수들을 다시 심리하여 옥사를 처리하게 하였다.
을축일乙丑日에 제왕齊王 이우李祐를 복주伏誅하고, 제주齊州 백성들에게 1년 동안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4월 을유일乙酉日에 황태자皇太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한왕漢王 이원창李元昌과 후군집侯君集 등을 복주伏誅하였다.
병술일丙戌日에 진왕晉王 이치李治를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문무관文武官과 5품 이상 관원의 경우 집안의 대를 계승하는 아들에게 작爵 1급을 내려주었다. 80세 이상의 백성들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다.
기축일己丑日에 특진特進 소우蕭瑀를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삼고, 이세적李世勣을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삼아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하였다.
경인일庚寅日에 태묘太廟에서 이승건李承乾의 과오에 대한 죄를 청하였다.
계사일癸巳日에 위왕魏王 이태李泰를 등급을 낮추어 봉하여 동래군왕東萊郡王으로 삼았다.
6월 초하루 기묘일己卯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진일壬辰日에 수隋나라 공제恭帝를 안장安葬하였다.
갑오일甲午日에 가뭄으로 인해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으며, 조서를 내려 5품 이상의 경관京官들에게 정무政務에 대해 진언하게 하였다.
정유일丁酉日에 고사렴高士廉을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으로 삼아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윤6월 정사일丁巳日에 조서를 내려 황태자皇太子에게 좌우둔영左右屯營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병자일丙子日에 이태李泰를 다시 봉하여 순양군왕順陽郡王으로 삼았다.
7월 정유일丁酉日에 방현령房玄齡을 파직시켰다.
8월 경술일庚戌日에 공부상서工部尚書 장량張亮을 형부상서刑部尚書로 삼아 조정의 정무政務에 참여하게 하였다.
10월 정미일丁未日에 경성京城에 각주各州의 경저京邸(각 지방 사무를 보는 서울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정사일丁巳日에 방현령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았는데 복직시켰다.
11월 기묘일己卯日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임오일壬午日에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고, 양주涼州에서 상서로운 돌을 얻었으므로 양주에 사면령을 내렸다.
정관貞觀 18년(644) 정월 을미일乙未日에 종관성鍾官城에 갔다.
정사일丁巳日에 돌궐突厥과 고창高昌 지역의 백성들 중에 각 주州에 소속된 자들에게 2년 동안의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7월 갑오일甲午日에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이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병력 및 거란契丹과 해奚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였다.
8월 임자일壬子日에 안서도호安西都護 곽효각郭孝恪을 서주도행군총관西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언기焉耆를 정벌하게 하였다.
정묘일丁卯日에 유계劉洎를 시중侍中으로 삼고, 잠문본岑文本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았으며, 중서시랑中書侍郎 마주馬周를 수중서령守中書令으로 삼았다.
9월에 황문시랑黃門侍郎 저수량褚遂良을 조정의 정무政務에 참여하게 하였다.
신묘일辛卯日에 곽효각이 언기焉耆와 전투하여 물리쳤다.
10월 초하루 신축일辛丑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계묘일癸卯日에 상림원上林苑에서 옹주雍州의 부로父老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11월 무인일戊寅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경진일庚辰日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정주鄭州, 여주汝州, 회주懷州, 택주澤州 네 지역을 순시하여 고령자를 위문하고 연회를 베풀어주게 하였다.
갑오일甲午日에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이세적李世勣과 마주馬周를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열여섯 총관總管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12월 임인일壬寅日에 서인庶人 이승건李承乾이 죽었다.
무오일戊午日에 이사마李思摩의 부락이 반란을 일으켰다.
정관貞觀 19년(645) 2월 경술일庚戌日에 낙양궁洛陽宮으로 갔는데, 이는 고구려高句麗를 토벌하기 위함이다.
계축일癸丑日에 무덕武德의 북산北山에서 호랑이를 쏘아 맞췄다.
을묘일乙卯日에 황태자皇太子가 정주定州에 머물면서 국사國事를 대리하였다.
정사일丁巳日에 지나가는 곳의 고령자, 홀아비, 과부에게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 비간比干을 태사太師로 추증하여 충렬忠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3월 임진일壬辰日에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시중侍中을 대리하고, 이부상서吏部尚書 양사도楊師道가 중서령中書令을 대리하였다.
4월 계묘일癸卯日에 유주幽州에서 출정식을 열어 결의를 다지고 군사들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
계해일癸亥日에 이세적李世勣이 개모성蓋牟城을 함락하였다.
5월 기사일己巳日에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總管 정명진程名振이 사비성沙卑城을 함락하였다.
경오일庚午日에 요택遼澤에 주둔하면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수隋나라 사람들의 유골을 묻어 주었다.
을해일乙亥日에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總管 장군예張君乂가 죄를 짓자, 복주伏誅하였다.
정축일丁丑日에 마수산馬首山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6월 정유일丁酉日에 백암성白巖城을 함락하였다.
기미일己未日에 안시성安市城의 동남쪽 산에서 고구려를 크게 물리쳤고,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왕군악王君愕이 죽었다.
신유일辛酉日에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다.
7월 임신일壬申日에 전쟁으로 죽은 관원들을 묻어주고, 작爵 4급을 더하여서 한 명의 아들이 작위를 승계하도록 하였다.
10월 병오일丙午日에 영주營州에 주둔하며 전쟁으로 죽은 자들을 위해 태뢰太牢로 제사를 지냈다.
병진일丙辰日에 황태자皇太子가 임투관臨渝關에서 황제를 맞이하여 배알하였다.
무오일戊午日에 한무대漢武臺에 주둔하며 비석에다 공적을 새겼다.
11월 계유일癸酉日에 유주幽州에서 군사들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었다.
계미일癸未日에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總管 장문간張文幹이 죄를 짓자, 복주伏誅하였다.
정해일丁亥日에 양사도楊師道를 좌천시켜 공부상서工部尚書로 삼았다.
기미일己未日에 설연타薛延陀가 하주夏州를 침략하자, 좌령군대장군左領軍大將軍 집실사력執失思力이 물리쳤다.
정관貞觀 20년(646) 정월 신미일辛未日에 하주도독夏州都督 교사망喬師望이 설연타薛延陀와 전투하여 물리쳤다.
정축일丁丑日에 사자使者 22인을 보내어 6가지 조목으로 천하 각 지방 관리들의 고하高下를 매겼다.
경진일庚辰日에 병주幷州에 사면령을 내리고, 당唐나라가 태원太原에서 기의起義했을 때 호적에 편제되었던 백성들에게는 3년간 요역을 면제해주었고, 뒤에 편제된 자들에게는 1년의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2월 갑오일甲午日에 고구려高句麗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지 못한 자들에게도 모두 훈관勳官 1급을 내려주었다.
경신일庚申日에 지나가는 곳의 고령자와 홀아비, 과부에게 곡식을 하사하였다.
경오일庚午日에 병이 나자, 황태자皇太子가 정무政務를 대리하였다.
기축일己丑日에 장량張亮이 반란을 도모하자 복주伏誅하였다.
윤3월 초하루 계사일癸巳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6월 을해일乙亥日에 강하군왕江夏郡王 이도종李道宗과 이세적李世勣이 설연타薛延陀를 정벌하였다.
7월 신해일辛亥日에 병이 나았다. 이세적이 설연타와 전투하여 물리쳤다.
8월 갑자일甲子日에 황손皇孫 이충李忠을 봉하여 진왕陳王으로 삼았다.
경진일庚辰日에 경주涇州에 주둔하여 고령자와 홀아비, 과부에게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병술일丙戌日에 농산관隴山關을 넘어 와정瓦亭에 머무르며 말 목장을 살펴보았다.
정해일丁亥日에 황릉皇陵에 배장陪葬되는 자의 자손들의 배장陪葬을 허락하였다.
9월 신묘일辛卯日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영남嶺南 지역을 순찰하게 하였다.
갑진일甲辰日에 철륵鐵勒의 여러 부락에서 태종에게 존호를 올려 ‘가한可汗’으로 부르기를 요청하였다.
10월에 소우蕭瑀를 좌천시켜 상주자사商州刺史로 삼았다.
11월 기축일己丑日에 조서를 내려 제사를 지내는 일, 표문과 상소를 올리는 일, 번국藩國에서 조회 오는 일, 병마兵馬와 관련된 일, 숙위宿衛와 관련된 일은 물고기 모양의 신부信符를 쓰게 하고 역말을 제공해주고, 5품 이상 되는 관원의 임명과 해직 및 사형수에 대한 결정은 모두 황제에게 아뢰며, 그 나머지는 황태자皇太子에게 위임하게 하였다.
정관貞觀 21년(647) 정월 임진일壬辰日에 고사렴高士廉이 죽었다.
정유일丁酉日에 조서를 내려 다음 해 2월에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하게 하였다.
갑인일甲寅日에 철륵鐵勒의 여러 부락에 주현州縣을 설치하고 경사京師의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연회를 허락하였다. 죄수들의 기록을 살펴 사형수 이하의 죄인을 감형해주었다.
2월 정축일丁丑日에 황태자皇太子가 태학太學에서 석채례釋菜禮를 거행하였다.
3월 무자일戊子日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青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세 총관總管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게 하였다.
임진일壬辰日에 명을 내려 모든 관사의 일을 황태자皇太子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였다.
경술일庚戌日에 이세적이 남소성南蘇城과 목저성木底城을 함락하였다.
6월 정축일丁丑日에 철륵의 여러 부락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억류되어 있던 중국 사람들을 값을 치르고 돌려보내게 하였다.
7월 을미일乙未日에 우진달이 석성石城을 함락하였다.
임술일壬戌日에 태산에서 봉선하는 일을 정지하였다.
9월 정유일丁酉日에 황자皇子 이명李明을 봉하여 조왕曹王으로 삼았다.
10월 계축일癸丑日에 저수량褚遂良을 파직시켰다.
11월 계묘일癸卯日에 이태李泰를 높여 복왕濮王으로 봉하였다.
12월 무인일戊寅日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곤구도행군대총관崑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세 총관總管의 병력을 이끌고 구자龜玆를 정벌하게 하였다.
정관貞觀 22년(648) 정월 경인일庚寅日에 마주馬周가 죽었다.
기해일己亥日에 중서사인中書舍人 최인사崔仁師를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삼아 기무機務에 참여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병오일丙午日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青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를 검교중서령檢校中書令으로 삼아 상서성尚書省과 문하성門下省의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2월에 저수량褚遂良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았는데 복직시켰다.
을묘일乙卯日에 경성京城의 부로父老들을 접견하여 위문하고 이해 조세의 절반을 감면해주고, 기현畿縣(경성 부근의 고을)은 조세의 삼분의 일을 감면해주었다.
정묘일丁卯日에 조서를 내려 요수遼水를 건너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했을 때 공을 세웠으나 아직까지 훈관勳官을 받지 못한 채 죄를 범한 자는 훈관을 받은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하게 하였다.
기묘일己卯日에 화원華原에서 사냥을 하였다. 최인사崔仁師를 연주連州로 귀양 보냈다.
3월 정해일丁亥日에 의군현宜君縣의 죄수를 사면하고 의군현 백성들 중에 옥화궁玉華宮의 금원禁苑 지역 안에 있다가 이주해온 사람에게는 3년 동안의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4월 정사일丁巳日에 송주松州의 만蠻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양건방梁建方이 물리쳤다.
6월 병인일丙寅日에 장행성張行成이 하북河北 지역 사람으로 종군從軍한 자들의 가족을 위문하고, 주현州縣 관청에 명을 내려 그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해주었다.
병자일丙子日에 설만철薛萬徹이 박작성泊灼城에서 고구려와 전투하여 물리쳤다.
7월 갑신일甲申日에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출현하였다.
임진일壬辰日에 화주자사華州刺史 이군선李君羨을 죽였다.
8월 초하루 기유일己酉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신미일辛未日에 집실사력執失思力이 금산金山에서 설연타薛延陀의 나머지 부락을 정벌하였다.
9월 경진일庚辰日에 곤구도행군총관崑丘道行軍總管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가 설연타薛延陀의 잔존 부락, 처월處月, 처밀處蜜과 전투하여 물리쳤다.
기해일己亥日에 저수량褚遂良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았다.
임인일壬寅日에 미주眉州, 공주邛州, 아주雅州 세 지역의 요獠가 반란을 일으키자, 무주도독茂州都督 장사귀張士貴가 토벌하였다.
10월 계축일癸丑日에 옥화궁玉華宮에서 돌아왔다.
기사일己巳日에 아사나사이가 구자龜玆와 전투하여 물리쳤다.
12월 신미일辛未日에 장안長安과 만년萬年 지역의 유배형 이하의 형벌을 받은 죄수들을 감형해주었다.
윤12월 계사일癸巳日에 문서에 기록된 죄수들의 죄상罪狀을 살폈다.
정관貞觀 23년(649) 정월 신해일辛亥日에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가 구자왕龜玆王을 사로잡아 바쳤다.
3월 기미일己未日에, 지난겨울부터 가물었던 날씨가 이때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정묘일丁卯日에 병이 나서 황태자皇太子에게 금액문金液門에서 정무를 대리하도록 명하였다.
4월 기해일己亥日에 취미궁翠微宮에 행차하였다.
5월 무오일戊午日에 이세적李世勣을 좌천시켜 첩주도독疊州都督으로 삼았다.
기사일己巳日에 태종이 함풍전含風殿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3세였다.
경오일庚午日에 대행大行(갓 돌아간 황제)을 황제 전용 마차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예부상서禮部尚書 우지녕于志寧을 시중侍中으로 삼고, 태자소첨사太子少詹事 장행성張行成에게 시중侍中을 겸임하게 하였으며, 고계보高季輔에게 중서령中書令을 겸임하게 하였다.
임신일壬申日에 발상發喪을 하고, 시호諡號를 문文이라 하였다.
상원上元 원년(674)에 시호를 고쳐 문무성황제文武聖皇帝라 하고, 천보天寶 8년(749)에 시호를 문무대성황제文武大聖皇帝라 하였으며, 13년(754)에 시호를 더하여 문무대성대광효황제文武大聖大廣孝皇帝라고 하였다.
찬贊에 말하였다. “지극히 잘 다스린 군주가 세상에 나오지 않음이 심하구나.
우禹임금은 천하를 소유하여 16명의 군주에게 전하였으니, 소강少康이 중흥中興의 업業을 이루었다.
탕湯임금은 천하를 소유하여 28명의 왕에게 전하였으니, 그중에 아주 성대했던 군주들은
삼종三宗이라 일컬어진다.
당 현종唐 玄宗(《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讚》) 당 헌종唐 憲宗(《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讚》)
무왕武王은 천하를 소유하여 36명의 왕에게 전하였으니,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치적과 선왕宣王의 공로뿐이고, 그 나머지 왕은 칭송되는 이가 없다.
비록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실린 내용이 때때로 빠지거나 생략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삼대三代(하夏, 은殷, 주周) 1,700여 년이요, 70여 명의 군주에게 전하였으나, 우뚝하게 후세에 드러나는 군주는 이 예닐곱 명의 군주뿐이니,
아! 훌륭한 군주를 얻기가 어렵다고 할 만하다.
당唐나라가 천하를 소유하여 20대代를 전하였는데 칭송할 만한 군주가 셋이지만 그중에 현종玄宗과 헌종憲宗은 모두 끝을 잘 마치지 못하였으니, 태종太宗의 공렬이 훌륭하구나.
수隋나라의 난리를 제거한 것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게 공적을 견줄 만하고, 훌륭한 정치를 이룩한 아름다움은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까웠으니, 예로부터 태종처럼 공功과 덕德이 모두 높은 군주는 한漢나라 이후로 있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이 많은 정애情愛에 이끌려 다니고, 또 불교佛敎를 세우며,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고, 먼 외국에 군대를 동원한 일로 보자면, 이는 중등의 재주를 가진 용렬한 군주가 항상 일삼은 일이다.
그러나 《춘추春秋》의 법은 항상 현자賢者에게 완비하기를 요구하니, 이 때문에 후세의 군자로서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자 하는 자가 이에 대해서 탄식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