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有機辯
하여 能敷奏
하고 深識事端
이라 故動無不中
注+去聲.이라
周旣職兼兩宮
할새 處事平允
注+處, 上聲.하여 甚獲當時之譽
라
周見事敏速
하고 性甚愼至
注+一作貞正.하며 至於論量人物
注+量, 平聲.하여는 直道而言
이라
朕比任使之
注+比, 音鼻.한대 多稱朕意
注+稱, 去聲.라
旣寫忠誠
하고 親附於朕
하니 實藉此人
하여 共康時政也
注+按 “帝嘗以賜周曰 ‘鸞鳳沖霄, 必假羽翼. 股肱之寄, 要在忠力.’ 周疾甚, 詔使視護, 躬爲調藥. 周以所上章奏悉焚之曰 ‘暴君之過, 取身後名, 吾不爲也.’ 二十二年, 卒.” 按此章曰 “貞觀五年, 周爲何陳便宜.” 與舊史同. 通鑑考異曰 “五年, 見有詔令百官上封事.” 唐曆曰 “三年六月, 詔文武官言得失, 馬周代常何陳事.” 舊史或本於政要, 而吳氏所紀是也.라하다
由一介草茅
로 言天下事
를 若素宦于朝
하여 明習憲章者
하니 其自視
가 與
로 亦何以異迹
이리오
夫帝銳于立事어늘 而周所建이 皆切一時하여 君宰間不膠漆而固하니 恨相得晚이 宜矣라
然周才不逮傅說呂望하여 使後世未有述焉하니 惜哉로다
如四使催趣와 飛白之賜는 皆異寵也어늘 惜周不及四子하여 功業止此라
史氏謂
가 信矣
나 然周之才
가 豈獨不及說望而已哉
리오
之在漢
과 常何之在唐
에 其才能技業
이 初無大過於人
이나 而無知以擧陳平而獲賞
하고 常何以擧馬周而受賜
라
故無知之名은 託於陳平하고 常何之名은 託於馬周하여 以爲萬世不朽之傳하니
愚按 自
築巖釣渭
로 由匹夫而陞朝著
하여 君臣相得
하여 建事立功者
는 不多見于後世矣
라
太宗覽常何之奏
하여 而知其非何所爲
하고 何又能以實告
하여 하여 濟濟淸要
하여 卒如覽奏之所見
이라
周固未可以竝驅先哲이나 而太宗則可謂有古先哲王之遺風焉이라
마주馬周는 기지와 말재주가 있어
진언進言을 잘하고 일의 기미를 잘 살폈으므로, 행동이 알맞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注+〈중中(들어맞다)은〉 거성去聲이다.
“내가 마주를 잠시라도 보지 않으면 바로 생각이 난다.”
정관貞觀 18년(644)에 여러 번 승진하여
중서령中書令注+〈영令(명령하다)은〉 본래 음의音義대로 독해한다.겸태자좌서자兼太子左庶子가 되었다.
마주가
중서성中書省과
태자부太子府 양궁兩宮의 관직을 겸임할 때 일 처리가 공정하여
注+처處(대처하다)는 상성上聲이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들었다.
또 본래의 관직을 지닌 채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겸임하였다.
“마주는 일을 파악하는 것이 민첩하고 성품이 신중하고 바르며,
注+〈신지愼至는〉 어떤 본에는 ‘정정貞正’으로 되어 있다. 인물을 논할 땐 정당하게 말하오.
注+양量(헤아리다)은 평성平聲이다.
짐이 근래 그에게 일을 맡겼는데
注+비比(근래)는 음이 비鼻이다. 대부분 짐의 뜻에 부응하오.
注+칭稱(걸맞다)은 거성去聲이다.
마주가 충성과 정성을 다하며 짐을 친근히 따르니, 실로 이 사람에게 의지하여 안정된 정치를 구가하고 있소.”
注+사전史傳을 살펴보면 “태종太宗이 일찍이 비백서飛白書를 마주馬周에게 하사하여 이르기를 ‘난새와 봉황이 하늘 높이 나는 것은 반드시 날개의 힘을 빌려서이며, 고굉지신股肱之臣에게 후사를 맡기는 것은 그 요점이 충성을 바치는 힘에 있다.’라고 하였다. 마주가 병이 깊어지자 조칙을 내려 사람을 보내 간호하게 하고 몸소 약을 조제하였다. 마주가 황제에게 상소했던 글들을 모두 태우며 말하기를 ‘관중管仲과 안영晏嬰이 그 군주의 과오를 드러내 죽은 뒤에 명예를 취한 것과 같은 일을 나는 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정관貞觀 22년(648)에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였다.
이 장章을 살펴보면 “정관 5년(631)에 마주가 상하常何를 위하여 국가에 편리하고 시의에 적합한 내용을 진언했다.”라고 하였으니, 구사舊史와 동일하다.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 “정관 5년(631)에 조서를 내려 백관들에게 봉사封事를 올리도록 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라 하고, 《당력唐曆》에 “정관 3년(629) 6월에 문무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정치의 득실을 말하라고 하였는데, 마주가 상하를 대신하여 그 내용을 진언하였다.”라고 하였다. 구사舊史는 《정관정요貞觀政要》에 근거하고 있는바, 오긍吳兢이 기록한 것이 옳다.
“마주馬周가 태종太宗을 만난 것이 기이하지 않은가.
한낱 초개와 같은 신분으로 마치 조정에서 벼슬하여 법과 제도를 훤히 꿰고 있는 신하처럼 천하의 일을 말하였으니, 자신의 자취가 부암傅巖에서 담을 쌓았던 부열傅說이나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했던 여망呂望과 어찌 다르다고 생각했겠는가.
태종이 일을 성취하는 것을 예의 주시하였는데, 마주가 건의한 것이 모두 당시에 절실한 내용이어서, 임금과 재상 사이가 아교와 옻칠로 붙이지 않아도 견고하였으니,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마주의 재능이 부열과 여망에 미치지 못하여 후세에 기술할 만한 것이 없으니, 애석하다.”
“태종太宗이 마주馬周를 대우한 것을 보면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왕규王珪‧위징魏徵보다 앞선다.
네 번이나 사람을 보내 오라고 재촉한 일과 비백서飛白書를 하사한 것은 모두 남다른 총애인데, 마주가 네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여 공로가 여기에 그친 것은 애석하다.
사신史臣(宋祁)이 ‘임금과 재상 사이가 아교와 옻칠로 붙이지 않아도 견고하다.’고 한 말은 사실일 것이나, 마주의 재능이 어찌 부열과 여망에 미치지 못할 뿐이겠는가.”
“한漢나라 때의 위무지魏無知와 당唐나라 때의 상하常何가 재능과 업적에 있어 애초에 남보다 크게 뛰어난 것이 없지만 위무지는 진평陳平을 천거하여 상을 받았고, 상하는 마주馬周를 추천하여 하사품을 받았다.
그러므로 위무지의 명성은 진평에게 의탁하고 상하의 명성은 마주에게 의탁하여 만세에 영원히 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사람의 훌륭한 점이 어찌 반드시 자신에게서 모두 나오는 것이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신莘에서 농사지었던 이윤伊尹, 남의 소를 먹였던 영척寗戚, 부암傅巖에서 담을 쌓던 부열傅說,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했던 여망呂望으로부터 필부匹夫의 신분이었다가 조정에 들어가 임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맞아 일을 이루고 공을 세운 예는 후세에 많이 보이지 않는다.
태종太宗이 상하常何가 올린 글을 보고 상하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며, 상하도 사실대로 고하여 드디어 일개 평민의 신분으로 신풍新豐의 여관에서 떨쳐 일어나 청요직에 올라, 마침내 올린 글에서 본 소견과 같았다.
마주와 같은 사람은 진실로 대단하지만 태종의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더욱더 대단하지 않은가.
마주가 옛 선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지만, 태종만큼은 옛 현군의 유풍을 지녔다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