馮立
注+ 馮立:馮立, 馮翊人.이 武德中
에 爲東宮率
注+ 武德中 爲東宮率:率, 音律. 唐制, 東宮置左右率府, 掌兵仗宿衛之政令, 總諸曹之事.하여 甚被隱太子親遇
러니 太子之死也
에 左右多逃散
이어늘
立歎曰 豈有生受其恩
하고 而死逃其難
注+ 死逃其難:難, 去聲.이리오
於是
에 率兵犯
하여 苦戰
하여 殺屯營將軍敬君弘
注+ 殺屯營將軍敬君弘:敬君弘, 絳州人.하고
遂解兵遁於野
라가 俄而來請罪
하니 太宗
이 數之曰
注+ 太宗 數之曰:數, 上聲.汝
가
昨者에 出兵來戰하여 大殺傷吾兵하니 將何以逃死리오
立
이 飮泣而對曰
注+ 立 飮泣而對曰:飮, 去聲.立
이 出身事主
할새 期之效命
이라 當戰之日
에 無所顧憚
이니이다하고
因歔欷
注+ 因歔欷:歔, 音虛, 欷, 音希, 悲歎貌.하여 悲不自勝
注+ 悲不自勝:勝, 平聲.이어늘
太宗
이 慰勉之
하고 授左屯衛中郎將
注+ 授左屯衛中郎將:將, 去聲. 後同. 唐制, 掌宿衛之屬.하다
立이 謂所親曰 逢莫大之恩하여 幸而獲免하니 終當以死奉答이러라
未幾
注+ 未幾:幾, 平聲.에 突厥
이 至
어늘 率數百騎
하여 與虜戰於咸陽
하여 殺獲甚衆
하고 所向皆披靡
하니
太宗
이 聞而嘉歎之
하다 時
에 有齊王元吉府左車騎謝叔方
注+ 時有齊王元吉府左車騎謝叔方:謝叔方, 萬年人.이 率府兵
하여 與立合軍拒戰
할새
及殺敬君弘
과 中郎將呂衡
注+ 中郎將呂衡:將, 去聲. 史作呂世衡, 此避太宗諱, 除世字.하야 王師不振
이어늘
秦府護軍尉
注+ 秦府護軍尉:唐制, 掌宿衛之職.尉遲敬德
注+ 尉遲敬德:尉, 音蔚. 尉遲, 複姓, 名恭, 以字行, 朔州人, 爲劉武周將. 武德初擧地降, 爲右府統軍, 後從討隱巢有功, 封鄂國公, 卒, 贈徐州都督.이 乃持元吉首以示之
하니
叔方
이 下馬號泣
注+ 叔方 下馬號泣:號, 平聲.하여 拜辭而遁
이라가 明日出首
注+ 明日出首:首, 去聲.하니
太宗
이 曰 義士也
라하고 命釋之
하고 授右翊衛郎將
注+ 授右翊衛郎將:唐制, 掌供奉侍衛之職. 按, 通鑑, 武德九年六月, 馮立聞建成死, 乃與副護軍薛萬徹屈咥直府左車騎謝叔方帥東宮齊府精兵二千馳, 赴玄武門. 張公謹多力, 獨閉關以拒之, 不得入. 敬君弘掌宿衛兵, 屯玄武門, 挺身出戰, 與呂世衡大呼而進, 皆死之. 守門兵與萬徹等力戰良久, 萬徹欲攻秦府, 尉遲敬德持建成元吉首示之, 宮府兵遂潰. 萬徹亡入終南山, 馮立遂解兵逃於野. 高祖旣赦天下, 馮立謝叔方皆自出, 萬徹亡匿, 屢使諭之乃出. 秦王曰 “皆忠於所事, 義士也.” 釋之, 馮立後授廣州都督, 卒于官. 敬君弘後贈左屯衛大將軍, 呂衡贈右驍衛將軍.하다
注
【集論】唐氏仲友曰 若立者는 所謂一心可事百君이요 忠義勇敢兼有之니
然君弘世衡이 旣死엔 則解兵而去하여 不爲已甚하니 則異乎徒勇者를 盖可知也라
然立之與叔方이 俱可謂見危致命者矣나 較其人品인댄 叔方은 其立之亞歟인저
注
愚按 馮立之言에 曰 豈有生受其恩하고 而死逃其難가하니
謝叔方도 亦有慷慨殺身하여 從容受死之意하니 二人雖皆受爵이나 然亦可謂忠義也已라
然知進而不知退하여 終以邪謀就誅하니 寧不有愧乎아
史臣是編이 書馮謝於忠義之首하고 萬徹은 乃削而不書는 厥有旨哉인저
풍립馮立이
注+풍립馮立은 풍익馮翊 사람이다. 무덕武德 연간에
동궁율東宮率이
注+솔率은 음音이 율律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동궁東宮에는 좌左‧우솔부右率府를 두고 병장兵仗과 숙위宿衛의 행정을 담당하며, 각 조曹의 일을 총괄하게 했다. 되어
은태자隱太子(
이건성李建成)로부터 매우 친밀한 대우를 받았는데, 태자가 죽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가거나 사라지자,
풍립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살아 있을 때 그의 은혜를 입다가 죽자 그 환난을 도피할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
注+난難(난리, 재난)은 거성去聲이다.,
이에 병사를 이끌고
현무문玄武門으로 쳐들어가 고전 끝에
둔영장군屯營將軍 경군홍敬君弘을 살해하고
注+경군홍敬君弘은 강주絳州 사람이다.,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미약하나마 태자에게 보답했다.” 라고 한 뒤
결국 병사를 해산시키고 시골로 숨었다가, 시간이 흐른 뒤 나와 죄를 청하니,
태종太宗이 다음과 같이 죄를 따졌다.
注+수數(죄를 세어 따지다)는 상성上聲이다.
“네가 지난번에 병력을 동원해서 싸움을 벌여 우리 병사와 장수들을 살해하여 큰 손상을 입혔으니,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느냐?”
풍립이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였다.
注+음飮(마시게 하다)은 거성去聲이다. “풍립이 세상에 나와 군주를 섬길 때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했기에 전쟁을 벌일 때 돌아보거나 기탄할 일이 없었사옵니다.”
그러면서 비탄해하며
注+허歔는 음音이 허虛이고, 희欷는 음音이 희希이니, 비탄悲歎해하는 모습이다. 슬픔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자
注+승勝(견디다, 감내하다)은 평성平聲이다.,
태종이 위로하며 권면하고
좌둔위중랑장左屯衛中郎將에 임명했다.
注+장將(장수)은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당나라 제도에 의하면, 〈좌둔위중랑장左屯衛中郎將은〉 숙위宿衛와 관련된 일을 관장한다.
풍립이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였다. “막대한 은혜를 입어 요행히도 죽음에서 벗어났으니, 끝내 목숨으로 보답할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注+기幾는 평성平聲이다. 돌궐突厥이
편교便橋에 이르자, 수백 기병을 이끌고
함양咸陽에서 전투를 벌여 많은 무리들을 죽이거나 노획하여 가는 길마다 적들이 모두 쓰러졌다.
태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해하고 감탄하였다. 당시
제왕齊王 이원길부李元吉府의
좌차기左車騎 사숙방謝叔方이
注+사숙방謝叔方은 만년萬年 사람이다. 제부齊府의 병사를 이끌고 와서 풍립과 연합해 맞서 싸웠는데,
경군홍敬君弘과
중낭장中郎將 여형呂衡을 살해하자
注+장將(장수)은 거성去聲이다. 사서史書에선 여세형呂世衡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태종太宗의 휘諱를 피하여 세世를 없앤 것이다. 진왕부秦王府 군사들의 사기가 떨쳐지지 못하였다.
진부秦府의
호군위護軍尉注+호군위護軍尉는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숙위宿衛와 관련된 일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울지경덕尉遲敬德이
注+위尉은 음音이 울蔚이다. 울지尉遲는 복성複姓이고 이름은 공恭인데, 자字로 통행되며 삭주朔州 사람이다. 유무주劉武周 휘하의 장수였으나 무덕武德 초에 관할지역 통째를 가지고 투항하여 우부통군右府統軍이 되었고, 뒤에 은태자隱太子와 황소黃巢를 토벌하는 데 참여하여 공로를 세웠고 악국공鄂國公에 책봉되었다. 세상을 떠나자 서주도독徐州都督에 추증되었다. 이원길의 머리를 들어 보이자,
尉遲敬德
사숙방이 말에서 내려 울부짖은 뒤
注+호號(부르짖다)는 평성平聲이다. 절을 하고 도망갔다가 이튿날 나와 자수하니
注+수首(자백하다, 자수하다)는 거성去聲이다.,
태종이 “
의사義士다.” 라고 하고 풀어주라고 명한 뒤
우익위랑장右翊衛郎將에 임명하였다.
注+우익위랑장右翊衛郎將은 당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황제를 시봉하고 호위하는 일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무덕武德 9년(426) 6월에 풍립馮立이 건성建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호군副護軍 설만철薛萬徹, 굴질직부좌차기屈咥直府左車騎 사숙방謝叔方과 함께 동궁東宮‧제부齊府의 정병精兵 2,000기병을 이끌고 현무문玄武門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장공근張公謹이 홀로 전력을 다해 문을 걸어 잠근 채 저항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경군홍敬君弘이 숙위병宿衛兵을 관장하여 현무문玄武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앞장서서 나와 싸워 여세형呂世衡과 함께 크게 함성 치며 진격했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수문守門 병사가 설만철 등과 한참을 사력을 다해 싸운 뒤 설만철이 진부秦府를 공격하려 하자, 울지경덕이 이건성李建成과 이원길李元吉의 잘린 머리를 들어 보여주자 동궁東宮과 제부齊府의 병사들이 결국 궤멸되었다. 설만철은 종남산終南山으로 도망가고 풍립은 무장을 해제하고 시골로 도망갔다. 고조高祖가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자 풍립과 사만숙은 다 나와 자수했지만, 설만철은 도망해 숨었다가 여러 차례 달래고 나서야 나왔다. 진왕秦王(태종太宗)이 “모두 모셨던 군주에게 충성했으니 의로운 사람들이다.”라고 하고 석방해주었다. 풍립은 뒤에 광주도독廣州都督에 임명되어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경군홍은 뒤에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將軍에 추증되었으며, 여형呂衡은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에 추증되었다.
注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풍립馮立과 같은 사람은 한 마음으로 모든 임금을 섬길 수 있고 충성과 의리와 용맹을 모두 갖춘 인물이니,
은태자隱太子가 죽었을 때 환난을 피하지 않는 것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경군홍敬君弘과 여세형呂世衡이 죽고 나서는 무장을 해제하고 떠나 너무 지나친 것을 하지 않았으니 한낱 용기만 부린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풍립과 사숙방이 모두 위험 앞에서 목숨을 바친 자라 할 수 있지만 그 인품을 따진다면 사숙방은 풍립의 아류일 것이다.”
注
내가 살펴보건대, 풍립馮立이 말하기를 “어떻게 살아 있을 때 그의 은혜를 입고서 죽자 그 환난을 도피할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하니,
자로子路가 말한 “녹을 받아먹고 나서는 그 환난을 회피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사숙방謝叔方 역시 비분강개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비록 두 사람이 모두 관작을 받긴 했지만 또한 충성스럽고 의로웠다 말할 만하다.
태종太宗이 그들을 표창한 것은 바로 흥성을 꾀하는 왕이 응당 해야 할 자세이다.
설만철薛萬徹의 경우도 모신 상관에게 충성했다 할 만하니 처음에는 풍립‧사숙방과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몰라 결국 사악한 모의로 죽음을 맞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는가.
사신史臣이 이 글을 편집할 때 풍립과 사숙방은 충성과 의리편의 맨 앞에 쓰고 설만철은 삭제하여 쓰지 않은 것은 그 뜻이 들어 있다 할 것이다.